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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승전의 체재 변화와 그 의미 (A Study on the Evolution of the Ten Subjects and Their Significance in the Biographies of Eminent Monks of China)

  • 정천구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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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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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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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혜교(慧皎)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퍼지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한 고승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고승전(高僧傳)』을 저술했다. 혜교는 열 개의 과목을 설정해 행적들을 세분했는데, 이른바 '십과(十科)' 체재다. 이 십과는 고승전이 불교사서로서 의의를 갖게 해주는 중요한 틀이다. 『고승전』을 이어 저술된 『속고승전(續高僧傳)』, 『송고승전(宋高僧傳)』, 『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 등이 십과 체재를 따른 데서 확인된다. 그러나 십과는 고승전 저자들의 인식과 의도에 따라 형태에서 변화를 겪었다. 도선은 『속고승전』에서 일부 과목들의 명칭을 바꾸고 새로운 과목을 추가했으며, 찬녕은 『송고승전』에서 『속고승전』의 십과를 그대로 이으면서 각 과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뒤늦게 『대명고승전』을 편찬한 여성은 세 과목만 남기고 일곱 과목을 없앴다. 십과의 체재는 형태뿐만 아니라 의미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혜교가 교화를 중시했다면, 도선은 '수행'과 '실천'을 강조했고 찬녕은 '지혜' 와 '깨달음'을 강조했다. 여성은 십과의 붕괴를 보여주면서 불교가 쇠퇴하고 있었던 상황을 담아냈다. 이렇게 각 고승전의 십과에 각기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저자들이 불교사를 각기 다르게 인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 불교사의 전개 과정이 일부 반영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각 고승전의 내용을 다양한 측면에서 심도 있게 분석해 비교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7~8세기 중국 고승전의 정형화와 다양화 (A Study on the Standardization and Diversification of Chinese Biographies of the Eminent Monks in the 7th and 8th Century)

  • 정천구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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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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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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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7~8세기에 중국 불교는 가장 융성했고 주요한 종파들이 등장해 각기 다른 길을 갔다. 이러한 사실은 잇따라 저술된 여러 고승전과 그 체재의 성격 변화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6세기 초, 혜교(慧皎)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역사를 담은 『고승전(高僧傳)』을 편찬했다. 이때 십과(十科)라는 체재를 마련했는데, 645년에 도선(道宣)은 이 십과를 기본틀로 삼아 『속고승전(續高僧傳)』을 편찬했다. 그러나 십과의 일부를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십과를 역사서에 걸맞은 체재로서 정형화했다. 『속고승전』 이후에는 십과를 변형한 체재를 갖춘 고승전들이 편찬되었다. 법장(法藏)은 『화엄경전기』(690년?)를 저술하면서 십과로 구성했으나, 과목들의 명칭과 의미가 화엄철학을 강조하는 쪽으로 크게 변했다. 이어 혜상(惠詳)은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706년?)을 편찬하면서 『고승전』과 『속고승전』의 십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변형한 팔과(八科)를 갖추었고, 승상(僧詳)은 『화엄경전기』의 십과에 두 과목을 새로 추가한 십이과(十二科) 체재의 『법화전기(法華傳記)』(750년?)를 편찬했다. 두 고승전의 체재는 철학보다 신앙에 방점을 찍었다. 선종에서도 8세기 초부터 고승전이 잇달아 편찬되었다. 『전법보기(傳法寶紀)』(713년?),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 『보림전(寶林傳)』(801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고승전의 체재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어떠한 과목도 설정하지 않고,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계보를 세워 서술했다. 이는 선종이 경전에 의거하지 않고 수행자가 스스로 깨닫는 것을 요체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중국의 조사들만 입전하다가 『보림전』에 이르러서는 붓다 및 가섭 이하 27명의 조사들을 계보에 포함해 역사화했다. 이 허구적인 계보는 선종이 번성하면서 종파적 우월성과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