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Folk Culture

검색결과 347건 처리시간 0.023초

애니메이션 <대요천궁>에 사용된 색상의 상징적 의미에 관한 연구 : 중국 전통 오색관을 중심으로 (The study of the symbolic meaning of colors used in the animation "Uproar in the Heaven" - Focused on the traditional Chinese five color concept)

  • 경령;이종한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 /
    • 통권51호
    • /
    • pp.129-158
    • /
    • 2018
  • 1950년부터 중국은 민족적 특색을 표현한 우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대표적으로 <산수정(山水情)>, <대요천궁(大?天?)>, <나타요해(???海)> 등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 애니메이션은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을 모방하고 있으며, 중국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표현한 애니메이션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중국의 민족적 특색을 표현한 애니메이션이라 하더라도 관객들의 마음을 얻은 애니메이션은 현재까지 없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족적 특색을 담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중국식 그림이 아니라, 중국 전통과 민족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본 논문은 중국 애니메이션이 스타일과 색상 방면에서 다른 나라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독특한 특징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중국 전통의 오색관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응용 연구이다. 중국 전통 오색관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중국 조상들의 사상과 인식이자, 홍(?), 황(?), 청(?), 백(白), 흑(黑) 등 5가지 단색(?色)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생활과 문화가 축적되어 끊임없이 발전한 색상 관념(?念)이다. 또한, 중국 전통 색상 체계의 이론적 기초이자, 중국의 역사와 문화, 철학, 종교의 이론을 종합한 학설(??)이다. 이를 기반으로 상하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上海美??影制片?)가 제작한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대요천궁(大?天?)>에 등장한 손오공(?悟空)과 옥황상제(玉皇大帝)의 불교적 의상 색상과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고자 한다. 색상은 첫 번째 시각적 언어이며, 캐릭터의 내적 심리 상태와 지위, 선악(善?) 등을 표현하는 색상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감정과 행동,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중국 전통 오색관이 상징하는 그 의미는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중국인들에게 점점 더욱 깊은 영향을 주어 왔다. 따라서 중국 전통 오색관의 색상 이념과 상징적 의미를 적용하여 중국식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색상을 조합한다면, 중국 특유의 캐릭터 특징과 감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중국 전통색의 특성을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찾아보고, 그 의미를 오색관에 의거해 분석함으로써 중국의 전통문화 활용의 한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나비의 이미지를 응용한 의상 디자인 연구 -수용성부직포에 의한 누비 응용기법을 중심으로- (A Study on Fashion Design Applied by Butterfly Image -Focused on the Application Method of the Nubi by Watersoluble Paper-)

  • 허진영;김혜연
    • 디자인학연구
    • /
    • 제19권6호
    • /
    • pp.9-14
    • /
    • 2006
  • 민화나 고화에 많이 등장하는 호랑나비나 제비나비형태의 그림은 다수 있지만 한자 문화권이라 그런지 '나비'라는 말은 늦게 나타난다. 나비라는 말은 나불나불 나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고서에 호접(胡蝶:범나비), 황접(黃蝶:노랑나비) 등으로 나타나다가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杜詩諺解)에서 나비 또는 나뵈로,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訓夢字會)에는 나뵈로, 숙종 시대(1675$\sim$1720)에 나온 시몽언해물명(時夢諺解物名)에는 남이로 나온다. 그 후로는 나?????? 또는 나비로 불러오다가 현재 나비가 표준말이 되어 쓰여 지고 있다. 아직도 지방에 따라서는 나부 또는 나베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나비는 연인의 사랑 기쁨 행운 장수 영원 등의 의미와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끌려 예로부터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공예품, 장신구등에 응용되어 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나비의 형태와 색채를 분석하고 수용성 부직포를 이용한 누비 응용기법을 적용하여 나비의 형태미, 날개시맥의 섬세한 조형미를 표현하였으며 가볍고 드레이프성이 좋은 기본소재를 사용함으로서 나비의 날개 짓이 주는 율동적 움직임을 용이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상기의 표현 기법이 나비 이미지의 미적표현에 적합함과 아울러 디자인 전개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결과 나비 날개 윤곽선의 부드러운 곡선은 인체의 선적 조형미에 잘 부합되어 의상과 인체가 조화롭게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누비 응용 기법이 가진 특성들이 소재 표현기법으로 다양화 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누비 기법의 응용을 통한 혼합기법이 의상에 적용됨으로서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적인 고급스러운 작품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PDF

당산숲 구성요소인 돌탑의 기원 유래 고찰 - 안동 서지리 성황당 돌탑을 중심으로 - (Study on the Origin of Stone Tower as a Component of Dangsan Forest - Focus on Village Shrine at Seoji-ri, Andong -)

  • 최재웅;김동엽;권진량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28권3호
    • /
    • pp.98-104
    • /
    • 2010
  • 본 논문의 목적은 삼첩석, 이첩석 및 돌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안동 서지리 성황당'을 사례로 하여 당산숲의 구성요소인 돌탑의 조형 양식에 대한 유래와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세개의 돌탑은 옛당산숲으로 보이는 마을 안쪽의 개천변 소나무 동산 정상에 있다. 세 돌은 일직선상으로 9m 거리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바라보며 왼쪽에 삼첩석, 가운데에 이첩석, 오른쪽에 돌탑이 있다. 삼첩석의 제일 아래 쪽은 길이 2.5m, 폭 1.8m, 높이 1.3m이고, 이첩석의 아래 자연석은 길이 1.3m, 폭 1.5m, 높이 0.9m이다. 돌탑은 지름 3m의 원추형에 높이 1.8m로서 작은 돌을 쌓은 것인데, 일명 '모관석'은 현재 이첩석의 맨 위에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서, 현재의 이첩석은 원래 삼첩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까닭은 우리나라 고대 조형 방식의 원리인 삼재사상(三才思想)에 비추어 볼 때, 짝수로 이루어진 조형물은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이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와 후대의 민간신앙이 이어져 오는 과정을 보여 주는 예가 되는 것과 같이, 시기적으로 볼 때 돌탑은 청동기시대의 거대석인 왼쪽의 삼첩석을 기원으로 하고, 가운데에 위치한 좀 더 작은 크기의 삼첩석(현재는 이첩석)을 거쳐, 후대에 오른편에 있는 작은 크기의 보통 돌탑으로 그 조형 양식이 변화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은 돌탑의 기원이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주요 다목적 공간들에서의 공연양상 - 전통음악공연을 중심으로 - (The Aspects of Performance in Major Multipurpose Plac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Focusing on the performance of traditional music -)

  • 금용웅
    • 공연문화연구
    • /
    • 제36호
    • /
    • pp.603-647
    • /
    • 2018
  • 일제강점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경성공회당 부민관은 여러 공연과 행사가 이루어지던 다목적 공간이었다. 각 공간들에서 연행된 전통음악공연은 전통음악의 명맥유지와 전통음악인들의 활동영역확대에 영향을 주었지만, 이들 공간은 주로 서양음악과 타 장르의 공연에 편향되어 있었던 까닭에, 전통음악공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명된 바가 없다. 이에 본 연구는 앞의 다목적 공간들에서 연행된 전통음악의 공연양상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당시의 여러 신문자료를 통해 각 공간들에서의 전통음악공연양상을 공연형태 공연 프로그램 공연자 및 공연단체 전개양상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먼저 전통음악이 각 공간에서 주로 어떤 형태로 공연되고 있었는지 고찰하였으며, 공연 프로그램은 기악과 성악 정악과 민속악 등으로 분류하고, 공연자는 기악과 성악 전문연주자와 일반인 남자명창과 여류명창 및 기생 등으로 분류하여 개개의 비중이 공간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파악하였다. 또한, 공연자와 공연단체의 출연여부는 공간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었으며, 공연양상은 시기별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각 공간에서 연행된 전통음악공연의 양상은 그들 공간이 지닌 특성의 영향이 컸음을 인지했으며, 공연 프로그램 및 공연자들과 단체들의 활동양상에 대해서도 더욱 명확하고 구체적인 파악이 가능했다. 본 연구를 계기로 아직까지 조명되지 못한 여타 공간들에서의 전통음악공연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어, 일제강점기 전통음악공연의 추이와 동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전통적 언어유희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 - 한국 재담(才談)과 중국 상성(相聲)을 중심으로 - (The Historical Transition and Current Meaning of Traditional Language Plays - Focusing on Korean Jaedam and Chinese Xiangsheng -)

  • 강소천
    • 공연문화연구
    • /
    • 제37호
    • /
    • pp.61-94
    • /
    • 2018
  • 본고는 한국과 중국 전통 언어유희 가운데 하나인 재담(才談)과 상성(相聲)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한국의 재담과 중국 상성은 모두 웃음을 주기 위한 대표적인 언어유희이며 전통적인 공연예술이다. 재담과 상성의 기원은 우희(優戱)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희는 가장 전통적인 언어유희이며 우희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공연물이 파생되었다. 그 중에서 한국 재담과 중국의 상성은 비교적 우희의 전통을 잘 이어간 공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로써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박춘재 등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공연하였다. 20세기 초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면서 재담은 주로 극장 무대와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때 재담에서 새로운 공연물인 만담이 파생되었는데 만담은 재담보다 시사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판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만담은 한참 동안 인기를 끌었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현재까지 한국에 전승하고 있는 재담은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남아 있다. 한편 한국 재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세기 중후반에 구축된 중국 상성은 처음에는 천민의 비속한 기예로 여겨졌으나 20세기 초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드디어 공연예술로써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상성은 개혁을 통해서 사회를 칭송하고 교과하는 내용이 주로 다루는 신상성이 형성되었으나, 신상성에는 세태를 풍자하고 해학적인 내용이 축소되어 재미가 없어졌으므로 얼마 후 인기를 잃었다. 21세기 초 상성은 만담과 똑같이 소멸될 지경에 처했지만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젊은 상성 배우들의 노력을 통해 '전통'과 '소극장'으로 회귀하자는 또 한 번의 상성 개혁이 일어났다. 전통으로 돌아온 현재의 '전통 상성'은 다시 중국 관중들의 애호와 성원을 받고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역사와 연행양상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현재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해 있다. 두 공연물의 내용이나 형식 측면에서 공통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중국 상성의 경우 전통 곡예 장르 가운데 하나로 현재까지도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요한 전통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독립적인 공연예술로써의 재담이 소멸되어 가고 이제는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재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전승과정에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재담이 사라진 반면 중국 상성은 잘 보존되고 전승되어 있는 이유를 본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전(現傳) 창원 퇴촌농악의 양식적 특징과 전승 의의 (A Study on the Distinguished Characteristics and Transmittion significance of Toichon Nongak in Changwon city)

  • 양옥경
    • 공연문화연구
    • /
    • 제37호
    • /
    • pp.187-221
    • /
    • 2018
  • 본고는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현전하는 퇴촌농악의 공연 양식적 면모와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전승 의의에 대해 논구해 보았다. 창원 퇴촌농악은 마을공동체의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제의성이 두드러지는 농악으로 출발하여 근현대 시대 새로이 쌓이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문화적 토대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한 전승사를 가지고 있다. 마을농악은 의식농악, 농사풀이 농악, 마을 연예농악의 세 성격이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현전 퇴촌농악 역시도 의식농악과 마을 연예농악의 성격이 하나의 거시적 구조 안에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마을농악 양식이다. 이 농악의 유래와 배경, 목적, 연행양식 등을 종합해 봤을 때 공동 축원 형태의 동제에서 비롯된 의식농악이 본령(本領)이고, '퇴촌'이라는 특정 마을을 중심으로 현대사회의 변천 궤도 안에서 다양한 영향요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세시-놀이 형태의 연예농악 양식이 확대된 변화를 담지한 농악임이 분명하다. 공동 축원 형태의 의식농악에 속하는 근거는 마을의 형성 배경과 공유하고 있는 전설, 신목(神木)과 동제의 유래 및 전개에 관한 토착민 보전 지식이 이를 뚜렷이 뒷받침하고 있다. 또, 크게 확장된 연예농악 양식은 해방이후 급속히 전국적으로 번진 '대회용 농악 공연 양식'의 출현이 이후의 농악 공연-향유 방식, 농악 학습-전승 방식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전문 농악 공연집단 뿐만이 아니라 마을단위 농악대, 일반 시민농악대에 이르기까지 연예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경향과 외부로 부터의 수혈이 맞닿은 변모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퇴촌농악 황일태(보존회장, 설장구)에 의해 연행되는 '지신밟기 고사소리'와 치밀한 의도 하에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음악구조이다. 종합적으로, 현전 퇴촌농악 공연양식은 마을농악의 시대적 변천 맥락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다시 말해 전통성과 변천성을 동시에 보전한 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산간농촌 노년층의 소달구지 이용관행과 그 의미 (The Customary Employment of So Dalguji(Ox-Cart) among the Old Generation in a Mountain Village and its implication)

  • 손대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4권4호
    • /
    • pp.42-55
    • /
    • 2011
  • 이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방법은 문화변동론적 시각에서, 소달구지 이용의 근현대적 양상이 어떠하며 그것이 갖는 사회 경제적 적절성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한 마을의 자연지리적 경제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서 전통적 문화요소가 어떻게 지속 변용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사지역인 경북 군위군 부계면 가호 2리인 동림마을에서는 소달구지를 일제강점기부터 이용하여 왔으며, 1972년 저수지 축조를 계기로 전통적 소달구지를 개량소달구지로 교체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소달구지로 농산물과 짐을 운반하고, 멀리 부계면이나 군위읍 소재 장터까지 소달구지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경운기 도입 이후 소달구지는 마을에서 서서히 사라지면서 단순한 이동수단으로 그 기능이 변했다. 반면 젊은층은 현대식 운송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1980년대에는 경운기가, 1990년 후반부터는 트럭이 마을의 주요 운송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계속 소달구지를 이용하였다. 노인들은 노동력이 고령화되어, 현대식 운송수단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사진 농토를 경작하고, 원거리에 분산된 농토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소를 사육하면서 소달구지를 개량하여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동림마을의 개량형 소달구지 이용 전통은 노령의 농민들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실천하는 것이며 고령화된 농촌사회의 문화적 표상이기도 하다. 즉, 노인들이 전통문화의 적합성과 실용성을 인정하여 소달구지라는 전통적 운송수단을 재창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간농촌이라는 지리적 제약조건 속에서 남녀 노인들이 소달구지를 즐겨 이용하는 현상은 동림마을 노인들의 문화적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림마을에서 소달구지가 지속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농민들이 고령화되면서, 소달구지가 마을의 자연지리적 경제적 측면과 노인들의 문화적 관성이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제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문화를 전승 변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세기 후반기 시나위의 현장 조사와 음악이론의 성립 (The Fieldwork of Sinawi and the Establishment of Musical Theory in the Late 20th Century)

  • 최선아
    • 공연문화연구
    • /
    • 제34호
    • /
    • pp.355-382
    • /
    • 2017
  • 본 연구에서는 먼저 이보형의 시나위 이론의 근거가 된 (조사보고서나 논문에서만 확인되는) 시나위 전승자의 단편적인 증언 내용을 이보형 소장 카세트테이프와 수첩 등에서 찾아내었다. 그리고 이보형의 시나위 현장 조사 과정과 시나위 음악이론의 성립 과정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민속악의 생명이 지역 현장에 있음을 일찍부터 간파한 민속음악학자 이보형은 전국 각지의 민속악 현장을 누비며 민속악을 녹음하는 동시에 민속악 전승자와의 대담 등을 카세트테이프 2천여 개와 수첩 3백여 개에 채록해 왔다. 이 중 이보형 소장 시나위 현장 조사 자료에는 1970년대 초부터 20여 년 동안 경기도와 전라도, 경상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시나위 현장에서 새로운 시나위 전승자를 발굴하여 대담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간혹 즉흥적으로 연주한 시나위가 녹음되어 있기도 하다. 이보형의 시나위 현장 조사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진행되어서 다행히 과거의 시나위 현장을 기억하는 전승자들의 증언이 다수 남아 있다. 이보형은 이 자료들을 활용하여 조사보고서와 논문 등에 시나위 관련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시나위 논문은 "시나위 청"(1979)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제1차 시나위 현장 조사에서 경기도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의 시나위 청에 대한 증언을 듣고서, 본격적으로 경기와 호남의 피리, 대금, 해금 시나위 청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시나위 전승자 11명의 시나위 청에 대한 증언을 바탕으로 "시나위 청"을 발표하였다. 이후 1987년에는 경남 지역이 포함된 시나위 권(圈)으로 조사 범위를 확장시켜서 경기와 호남, 경남 지역에서 새로운 시나위 전승자 12명을 발굴하고,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나위 청 이론을 보완하여 발표하였다. 이보형은 새로운 조사 현장에서 다른 지역 또는 기존 대담자가 증언한 시나위 정보와 다른 내용이 증언되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재차 사실 확인을 한 후 잘못 증언된 부분은 바로 수정되도록 이끌었고, 차이점은 특징으로 밝힘으로써 시나위 청 이론을 정립하였다. 다행히 그의 조사보고서나 논문 등에서 인용한 시나위 전승자들과의 대담 내용은 대부분 카세트테이프와 수첩에 채록되어 있다. 앞으로 이 자료가 공개된다면 새로운 시나위 혹은 민속악 이론이 탄생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에 전래된 고려악 나소리(納曾利)와 한국 가면의 조형적 특징 (Formative Characteristics of Nasori(納曾利) Masks in Komagaku (高麗樂) and Korean Masks)

  • 강춘애
    • 공연문화연구
    • /
    • 제33호
    • /
    • pp.129-163
    • /
    • 2016
  • 본고에서는 일본의 궁중악무 부가쿠(舞樂) 중 고마가쿠(高麗樂, 고려악)에 속하는 나소리(納曾利, なそり) 가면의 조형적 특징에 주목하여 한 중 일 문화패턴의 전래 및 변용 과정을 살펴보았다. 과거의 가면 연구는 가면 자체의 캐릭터와 관련된 예능적 측면 연구에 중점을 두어 왔다. 반면이 논문에서는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을 통해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문화교류사적인 측면에 대한 시론적 접근을 하였다. 일본에 전하는 대표적인 도가쿠(唐樂) 난릉왕과 고마가쿠 나소리는 한쌍의 답무(答舞)로 공연된다. 난릉왕 가면과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은 매달린 턱(吊り顎)이다. 일본의 오키나(翁) 가면처럼 눈이 'へ'자 모양을 하고 있는 탈은 한국 탈에서 얼굴과 턱을 따로 만들어 붙인 분리 턱(切顎)을 하고 있다. 난릉왕과 나소리 가면의 또 하나의 공통적 특징은 그로테스크한 귀면(鬼面)에 쌍환형의 외곽 원이 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동심원 눈이다. 쌍환형 동심원 눈은 도가쿠 이전의 더 넓은 지역에서 교류, 전파되면서 다양한 신수(神獸) 가면의 유형이 패턴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부가쿠는 민간신앙과 결부하여 신사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전해진 고마가쿠 나소리 가면과 관련된 기록과 유물은 한국에 남아있지 않다. 한국 탈춤에서도 나소리 가면의 쌍환형 동심원과 턱이 분리된 특징이 남아 있는 것은 동아시아 공연예술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연구과제가 된다. 본 논문은 고마가쿠의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을 통해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한국 가면과 비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고마가쿠 나소리의 원류를 밝히고자 한 국내의 선행연구에서 난릉왕 대면무(大面舞)가 신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나소리를 신라악으로 보는 근거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연구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전 판소리의 재탄생 연구 -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중심으로 - (The study on the rebirth from a lost pansori : An aspect of a changgeuk )

  • 이소정
    • 공연문화연구
    • /
    • 제33호
    • /
    • pp.59-95
    • /
    • 2016
  • 본 논문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담 옹(Madame Ong)>이라는 제목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국립창극단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통해 실전판소리가 어떻게 새롭게 재탄생되었는지, 그 과정에 주목하여 이 작품의 텍스트와 음악적 특징을 분석해보았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현재에는 실전된 판소리 <변강쇠가>를 각색하여 창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변강쇠의 치상부분인 후반부의 내용을 삭제하고, 옹녀가 변강쇠를 되찾아오기 위해 장승들과 전쟁을 벌이는 내용을 새롭게 삽입하여 텍스트의 변화를 주었다. 또한 <변강쇠 점찍고 옹녀>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원작과는 다른 관점으로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동안 음녀로만 여겨졌던 옹녀를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모든 소리가 작창으로 만들어졌는데, 극과 가장 부합되는 소리, 즉 이면에 맞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창자간의 화음을 넣는 등,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소리를 하는 인물 혹은 등장인물의 심경 변화에 따라 그 소리의 조와 성음이 달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특히 반주음악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소리북을 여러 개 사용하거나 대중가요에서 왈츠, 클래식, 각도민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용하는 등 도전적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고 사실감 있는 극적표현을 도와주었다. 이렇듯,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고전서사를 차용했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창극에서 벗어난 다양한 변화와 시도들을 통해, 온고지신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창극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현대 사회에서 창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해 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