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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역의 청동생산(靑銅生産) 공방운영(工房運營)에 대한 일고찰 (Research to Bronze production related workshop management of the Gyeongju Area)

  • 차순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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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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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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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경주지역(慶州地域)에서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17개소의 청동공방유적(靑銅工房遺漬)들에 대한 연구결과 이들 유적들은 운영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궁중공방(宮中工房), 관영공방(官營工房), 사영공방(私營工房)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경주지역의 청동공방은 소규모의 궁중수공업(宮中手工業)을 위한 공방에서 대규모의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을 위한 공방으로 발전을 했고, 이후 귀족의 등장에 따라 사영수공업(私營手工業)으로 변화하였다. 궁중공방은 궁성(宮城)이 위치했던 월성(月城), 전 임해전지(傳 臨海殿址)와 인근의 황남동(皇南洞) 주변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공방으로서 소규모로 운영되었다. 관영공방은 경주시 동천동 일대에 집중된 청동공방으로 한 지역에 집중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관영공방 단계에서는 공방 옆에 대형 도로가 위치하는데 이는 공방에 소요되는 원자재(原資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도로의 보수작업에 청동공방에서 발생한 폐기물(廢棄物)이 사용된 점은 도로와 청동공방이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영공방은 귀족들에 의해서 운영된 공방으로 관영공방에 속한 장인(匠人)들이나 개별적인 공장(工匠)들이 귀족들에게 흡수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공방으로 시내 곳곳에 공방이 위치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귀족들의 가택(家宅) 안에 마련된 작업장인 사영공방이 등장하게 되면서 공방의 운영주체는 국가에서 개인으로 점차 변화해 나간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영공방은 왕경 안에 위치한 대형사찰에서 절 안에 공방을 두고 필요한 물품을 직접 생산하던 공방으로 청동주조와 관련된 작업장이 주로 발견되었다. 이상과 같이 신라왕경 안에서 운영된 청동공방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기술력과 상품의 교역권, 생산지(生産地)와 수요처(需給處)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 해자(垓字)의 역사와 문화적 해석 (An Historical and Cultural Analysis on the Eastern and Western Moat)

  • 정용조;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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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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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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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해자란 성벽 외곽에 파 놓은 못 또는 물길로 적이 성벽에 직접 접근할 수 없도록 하거나 이를 경계로 공간을 구분하고자 설치된 시설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 서양에서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군사적 방어 기능으로부터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수단으로, 지반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역사적으로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 아시아, 미국 등에서 존재하였다. 또한 해자는 물을 이용한 다양한 문화 활동과 동물들의 서식처 장소를 제공하는 등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큰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복원 계획에 있어 해자의 복원에 대한 고려가 미비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동 서양 해자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여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해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연구로 해자의 기원, 시대적 고찰, 사상적 배경, 서양 해자의 역사와 문화, 동양의 한국, 중국, 일본 해자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나라의 해자는 고구려 도성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의 도성에 모두 존재하였으며, 천연의 해자인 넓은 강을 끼고 적들이 기어오르기 힘든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은 자연적 해자와 성벽 밖에 인공적 해자를 설치하여 적의 접근을 방지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해자를 방어적 기능으로 활용하였다. 2. 해자의 설치는 성벽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넓고 깊게 파는 것이 보통이며, 성의 외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시설이 설치되었는데, 성 밖에 있는 해자는 방어력을 높이는 것 외에도 지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해자는 물이 있어 접근을 제한하며, 낮은 벽이나 담장은 경계를 물리적으로 분리시키지만 해자는 열린 공간으로 시각적 특성을 살려 경계 및 방어 수단을 가지면서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나 근처의 나무도 정원 안으로 차경할 수 있게 한다. 3. 낙안읍성은 풍수지리적으로 청룡(동천)의 기가 드센 관계로 청룡의 흐름을 "S"자로 꺾어 흐르게 함으로써 기를 꺾을 수 있었으며, 몽촌토성은 해자의 복원으로 공원에 풍부한 수경 요소를 제공하는 경관요소로 활용하였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는 자연이라는 진경 속에 선조들의 삶과 문화가 공간 속에 설득력 있게 배어든 역사와 문화적 경관이 표상이다. 4. 중국의 자금성 성벽은 찹쌀에 흙을 반죽하여 다져 넣어 매우 견고하며, 해자의 폭은 52m, 깊이는 6m로 자금성 성벽을 에워싸고 있어 적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다. 5. 일본의 해자는 도시에 있어 수로 역할을 하였으며, 보트놀이, 배낚시, 레스토랑 등의 레저시설이 설치되어 도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6. 한국의 해자는 중국의 자금성, 일본의 에도성, 오사카성보다 규모가 작으며 동양의 해자는 왕궁이나 읍성을 보호하기 위해 해자를 설치하였으나, 서양에서는 왕이나 영주, 대저택, 부호들의 저택 등을 보호하기 위해 해자를 설치하였다.

순천 환선정(喚仙亭)의 역사적 변천에 따른 경관 변화와 시사점 (Changes and Implications of Landscape by Historical Transition of Suncheon Hwanseonjeong Pavilion)

  • 김순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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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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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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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순천 환선정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과거 본래의 환선정의 경관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파악한 후, 이를 현존하는 죽도봉 환선정의 경관과 비교함으로서, 현재의 복원이 가지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향후 복원을 위한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인 환선정은 관아의 원림 건축으로 1543년 당시 순천부사로 있던 심통원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과거 선향 순천을 대표하는 누정으로서 동천과 맞은편 죽도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호수와 다른 원림 요소들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무사히 유지되어온 환선정은 1968년 8월 28일 순천에 큰 수해가 나면서 유실되었다. 환선정이 다른 소실된 누정과 다른 점은 소실되기 이전인 1935년 환선정의 사정 역할을 분리한 또 다른 환선정을 죽도봉에 지었고, 해당 누정이 1988년 현재 위치로 이동되면서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선정의 복원 사례는 누정 복원에 있어 중요한 다음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누정의 가치는 건축물 그 자체가 아닌, 누정을 둘러싼 주변 경관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누정의 복원은 단순히 건축물의 복원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누정의 복원은 기존의 경관 가치를 이해하고 건축물과 함께 경관 요소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둘째, 환선정과 함께 인공적으로 조성된 남북으로 긴 형태의 호수가 매우 중요한 경관 구성요소이자 경관 유람의 방법을 제공하는 수단이었다. 환선정의 문화적 맥락에서의 복원을 위해서는 과거 환선정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행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통합적인 고증과 복원을 통해 문화적 행위에 대한 체험 등을 복원하는 노력 또한 요구된다. 셋째, 현존하는 환선정은 과거 본래의 환선정과 비교하여 건축물 복원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 및 구성, 규모, 색채 등을 보인다. 건축물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더욱 정확한 고증과 연구, 조사 등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강릉 연곡면 유등리 '유상대(流觴臺)' 곡수로(曲水路)의 조명(照明) (A Study on the Yousang-Dae Goksuro(Curve-Waterway) in Gangneung, Yungok-Myun, Yoodung Ri)

  • 노재현;신상섭;이정한;허준;박주성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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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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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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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 대상인 강원도 강릉시 연곡동 유등리 뱀골 하류의 너럭바위에 새겨진 '유상대(流觴臺)' 각자와 암각바둑판은 이곳이 유상곡수 놀이와 신선 풍류 행위가 이루어졌던 풍류처임을 확인시켜 준다. 3차에 걸친 정밀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운(道雲)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허가 되었고, 1954년에 재건된, 백운사 경내에 새겨진 '만월산 백운동천(萬月山白雲洞天)'이란 암각서는 뱀골 계곡에 선도적(仙道的)풍류와 선비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스며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단서이다. 최백순이 1934년 편찬한 강릉의 읍지인 동호승람 제2권에 인종원년(1545)을 전후하여 '남전현(籃田縣)의 백운사는 율곡 이이, 성제 최옥 등 명유(名儒)의 강례처(講禮處)'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공간이 유서 깊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호승람과 완역 증보임영지에 기술된 무오년, 즉 철종9년(1858) 김윤경(金潤卿)이 창건한 백운정(白雲亭)의 존재를 통해 누정 및 동천 경영의 흔적을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유상대 각자 바위 계류 건너 입석에 새겨진 '백운정동천(白雲亭洞天)' 암각서는 백운정 건립 3년 뒤인 철종12년(1861)에 조성되었으며, 유상대와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는 상징적 표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황과 입지성을 전제로 유상대 곡수유구 흔적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유상대 주변 계류 및 암반에는 수량과 유속을 조절하기 위한 세분석(細分石)과, 유로와 잔을 가두기 위한 홈인 금배석(擒盃石)과 유배공(留盃孔)의 조탁 흔적 등을 발견하였다. 더불어 하단 암벽에서 '오성(午星)'이란 명기 아래 23인명의 각자를 발견하게 됨에 따라 이곳이 20C중반까지 유상곡수연의 성격을 갖는 풍류 문화경관의 거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는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유상대를 중심으로 한 선비 풍류의 문화가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유 불 선(儒 彿 仙)이 습합된 독특한 역사문화공간'이란 측면에서도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23인명의 정체와 유상대 각자 주체 파악 등 유상곡수 등 풍류행위를 기록한 자료 발굴 등을 통해 본 공간의 성격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기록에 전해지는 암각장기판 또한 발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바, 현재 콘크리트포장 도로의 파쇄를 통한 추가 유적의 발굴 및 노선 변경 등 원형경관 회복방안 또한 시급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리인식(地理認識)과 문인(門人)들의 지지편찬(地誌編纂) 의의 (Yeoheon's Recognition of Geography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ompilation of Geographical Records by His Disciples)

  • 최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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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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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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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여헌 장현광(1554-1637)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 우주론과 자연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이다. 조선조 유학의 지리적인 학맥에서 여헌은 남명 조식과 한강 정구의 학풍을 이어받으면서 풍수와 지지편찬을 계승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여헌은 주자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역학(易學)의 기틀을 견지하였으며, 사변적인 공리공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용적 경세학(經世學)으로서의 지리를 인식하였다. 여헌의 지리인식 방법은 역학(易學)의 체계와 구도 상에서 이루어졌다. 여헌은 자연에 대한 인간 본위(本位)의 인식태도를 드러내며, 따라서 인사의 공능이 지리의 조건보다 우선되는 준칙이었다. 여헌에게 산수와 자연은 비덕(比德)의 공부대상이었고, 자연공부 방법은 대상물의 관찰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자득하고, 무심한 경지를 통해 천지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여헌에게 있어서 낙토(樂土)는 안분자족(安分自足)함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여헌에게 지리인식의 의의는 생활의 실용적인 이익 됨에 목적을 둔 필수적인 지식정보였다. 여헌은 은거지의 생활현장에 자신이 견지한 유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우주사업'의 일환으로 구현하였다. 이러한 의식과 태도는 주거지의 장소경관과 자연경물(自然景物)을 북극성과 주위 28수의 별자리로 상징화하여 명명하고 우주적 중심 공간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에서 비롯된 유학자들의 동천구곡(洞天九曲) 전통은 조선시대에 유행되었지만, 여헌의 장소 구성 체계는 여타의 형태와 방식을 뛰어넘은 우주적 구도의 독창성이 있다. 여헌의 장소 명명 의식에는 선현을 본받고자하는 태도, 자연물의 형용과 성정에 대한 비덕(比德), 그리고 은거(隱居) 의식의 반영이 나타난다. 여헌의 국토관 및 국토이해는 지형개관, 산수이해, 도읍입지, 지역이해, 풍토론, 현실인식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지리적 조건과도 비교되어 파악되었다. 그의 국토인식과 이해방식은, 국토의 유기체적인 인식, 주자학의 자연관이 반영된 기적(氣的)인 국토인식, 산천 인식과 도읍 입지의 풍수적 이해, 지역구분을 통한 비교론적 이해, 인물과 풍속에 대한 풍토론적 이해 방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헌은 역의 포괄적인 사상체계 범주에서 풍수도 수용하였다. 그가 풍수를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명과 한강을 계승하는 학풍에서 연유되는 바가 있었다. 여헌은 풍수지식을 활용하여 주거지의 입지를 정하기도 하였고, 고향 연고지의 여러 곳에 대해 풍수적 견지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풍수관을 보면, 묘지풍수에서 형세론적 이치는 수긍하고 있지만 장례기일을 미루는 발복 목적의 행위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풍수에서 숲의 조성을 통한 비보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풍수관은 문도(門徒)들의 지지편찬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여헌 학풍에서 주목할 만한 지리학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지(地誌)의 편찬이다. 이것은 남명과 한강의 치용(治用) 정신과 경세적(經世的) 실천을 계승한 학풍이기도 했다. 여헌은 지지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면서 문인들에게 편찬을 독려하였다. 고을의 통치자나 지식인으로서 지역의 역사와 옛 일을 잘 알아야하고, 권면하고 징계하는 기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헌의 견해는 이후 문인들의 지지편찬 취지와 내용 구성에 지침이 되었다. 이 연구는 여헌의 지리인식에 관한 사실적인 면모의 정리와 지리적 학풍의 계승 맥락에 관한 고찰에 그친 한계가 있다. 다음에는 여헌 전후 유학자들의 지리인식과 지지편찬 전통이 어떻게 전승되면서 전개 발전되었고 질적으로 변천해 나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학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조선 초 중기 유교지식인의 지리학사를 정립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입지와 장소 특성으로 본 암각바둑판의 의미와 문화재적 가치 (A Study on the Meaning and Cultural Properties Value of Rock-Go-Board from the Viewpoint of Site and Location Characteristics)

  • 박주성;노재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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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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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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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종합적인 현황 조사 분석을 통해 국내 돌바둑판의 위치 및 형태 그리고 입지 유형을 파악하는 한편 주변 경물과 각자 그리고 인근의 전래지명과의 관련성 분석과 해석을 통해 암각바둑판의 본질적 특성 및 장소적 의미 그리고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바둑판에 나타난 '네모난 바둑판과 둥근 바둑돌'의 천원지방적(天圓地方的) 형상, 흑백 바둑돌로 표상되는 음양조화 그리고 하늘 회전을 표현한 361로 등은 '우주적 질서가 투사(投射)된 상징체'이다. 또한 영원성을 바탕으로 바둑 삼매경에 빠진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상산사호(商山四皓)' 그리고 '난가(爛柯)' 모티프는 속세를 벗어난 망우청락(忘憂淸樂)의 '위기선미(圍棋仙味)'를 통해 '인생과 자연'의 관계를 시공간적으로 일치하고자 했던 천인합일의 표상이자 우미와 소요를 추구한 고아한 풍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돌바둑판은 총본 연구는 종합적인 현황 조사 분석을 통해 국내 돌바둑판의 위치 및 형태 그리고 입지 유형을 파악하는 한편 주변 경물과 각자 그리고 인근의 전래지명과의 관련성 분석과 해석을 통해 암각바둑판의 본질적 특성 및 장소적 의미 그리고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바둑판에 나타난 '네모난 바둑판과 둥근 바둑돌'의 천원지방적(天圓地方的) 형상, 흑백 바둑돌로 표상되는 음양조화 그리고 하늘 회전을 표현한 361로 등은 '우주적 질서가 투사(投射)된 상징체'이다. 또한 영원성을 바탕으로 바둑 삼매경에 빠진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상산사호(商山四皓)' 그리고 '난가(爛柯)' 모티프는 속세를 벗어난 망우청락(忘憂淸樂)의 '위기선미(圍棋仙味)'를 통해 '인생과 자연'의 관계를 시공간적으로 일치하고자 했던 천인합일의 표상이자 우미와 소요를 추구한 고아한 풍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돌바둑판은 총 18개로 이중 강진 월남사지 돌바둑판, 양산 소한정 돌바둑판, 반룡대 돌바둑판 등 3개소(16.1%)는 이동이 가능한 석국으로 분류된 반면 방학동 돌바둑판을 비롯한 15개소(83.9%)는 자연 암반에 새긴, 원래 장소를 이탈하지 않은 암각바둑판으로 밝혀졌다. 돌바둑판의 입지조건을 유형화한 결과, 계류형 15개소(83.9%), 암봉형 3개소(16.1%)로 나타났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1,389m)이었다. 총 15개 돌바둑판은 모두 500m 이하의 저산지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둑판이 새겨진 입지는 속세와 멀지 않은 생활권의 일부였으며 모두 경관성이 탁월한 계곡 및 산봉에 입지하였다. 돌바둑판은 옛 선비들의 풍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찰되는바 특히 암각바둑판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화를 추구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함께 노니는 풍류도의 정신을 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궁극적으로 바둑의 전통적인 상징성인 '은일의 매개체이자 자연귀의의 도에 다다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정수'인 동시에 유선적 취향의 도구로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징적으로 암각바둑판이 새겨진 단양 소백산 신선봉을 비롯하여 괴산 선국암, 무주 사선암, 장수 신선바위 등은 신선과 관련된 지명의 일체감이 매우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선' 바위와 암각바둑판이야말로 선계에 대한 숭배와 동경의 소통방식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관대상이자 조망처로 판단된다. 한편 암각바둑판이 입지하는 장소의 입지유형 등 물리적 환경과 팔경 및 동천구곡의 설정 여부, 유학자 등의 관련 여부를 중심으로 한 '인간활동' 그리고 '상산사호' 모티프 및 '난가고사' 상징의미 등 3가지를 '장소정체성 판단을 위한 해석 틀'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한 결과, 암각바둑판 주변에 각자 되어있는 동천, 동문 등의 모티프는 주자학적 '구곡팔경'의 개념 보다는 선취적 '선유동천' 개념의 공간성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계류형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공간은 유가의 은둔지향적 공간이나 선도적 은일지향적 공간으로 시대추이에 따라 습합되어 온 것으로 판단되며 산봉형의 암각바둑판은 별도로 신선 강림의 숭엄지향성이 장소정체성 지배의 중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곳을 포함하여 그 주변은 동천구곡이나 팔경의 일부로 널리 알려진 승경의 요처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선비 및 사대부 계층이 주체인 주변 각자들 중에도 신선 관련 표현어가 다수 발견됨에 따라 바둑판 조영의식의 이면에는 신선경 동경을 바탕으로 한 선도적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총합할 때 암각바둑판은 조선조 선비들의 은일과 운둔을 통한 자연경영의 문화 현상이 집약적으로 함축된 유산이자 전래 승경의 요처로, 명승과 같은 자연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탁월한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한내 17개의 돌바둑판 중에서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을 비롯하여 방학동 암각바둑판, 충주 사로암 암각바둑판, 무주 사선암 암각바둑판, 양산 어곡동 반룡대 석국 등은 세월의 풍파와 사람들의 접촉으로 마모되면서 바위가 깨어지거나 바둑판 줄이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언양 반구대 집청정 암각바둑판은 토사 매몰로 그 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암각바둑판은 자연과 바람의 흐름을 그대로 투영한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탁월한 조형물이자 선인들의 자연 사랑의 마음과 선계동경의 문화가 만나 이루어진 문화유적으로, 이에 대한 국내 분포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정밀조사와 보존관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된다. 18개로 이중 강진 월남사지 돌바둑판, 양산 소한정 돌바둑판, 반룡대 돌바둑판 등 3개소(16.1%)는 이동이 가능한 석국으로 분류된 반면 방학동 돌바둑판을 비롯한 15개소(83.9%)는 자연 암반에 새긴, 원래 장소를 이탈하지 않은 암각바둑판으로 밝혀졌다. 돌바둑판의 입지조건을 유형화한 결과, 계류형 15개소(83.9%), 암봉형 3개소(16.1%)로 나타났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1,389m)이었다. 총 15개 돌바둑판은 모두 500m 이하의 저산지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둑판이 새겨진 입지는 속세와 멀지 않은 생활권의 일부였으며 모두 경관성이 탁월한 계곡 및 산봉에 입지하였다. 돌바둑판은 옛 선비들의 풍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찰되는바 특히 암각바둑판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화를 추구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함께 노니는 풍류도의 정신을 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궁극적으로 바둑의 전통적인 상징성인 '은일의 매개체이자 자연귀의의 도에 다다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정수'인 동시에 유선적 취향의 도구로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징적으로 암각바둑판이 새겨진 단양 소백산 신선봉을 비롯하여 괴산 선국암, 무주 사선암, 장수 신선바위 등은 신선과 관련된 지명의 일체감이 매우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선' 바위와 암각바둑판이야말로 선계에 대한 숭배와 동경의 소통방식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관대상이자 조망처로 판단된다. 한편 암각바둑판이 입지하는 장소의 입지유형 등 물리적 환경과 팔경 및 동천구곡의 설정 여부, 유학자 등의 관련 여부를 중심으로 한 '인간활동' 그리고 '상산사호' 모티프 및 '난가고사' 상징의미 등 3가지를 '장소정체성 판단을 위한 해석 틀'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한 결과, 암각바둑판 주변에 각자 되어있는 동천, 동문 등의 모티프는 주자학적 '구곡팔경'의 개념 보다는 선취적 '선유동천' 개념의 공간성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계류형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공간은 유가의 은둔지향적 공간이나 선도적 은일지향적 공간으로 시대추이에 따라 습합되어 온 것으로 판단되며 산봉형의 암각바둑판은 별도로 신선 강림의 숭엄지향성이 장소정체성 지배의 중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곳을 포함하여 그 주변은 동천구곡이나 팔경의 일부로 널리 알려진 승경의 요처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선비 및 사대부 계층이 주체인 주변 각자들 중에도 신선 관련 표현어가 다수 발견됨에 따라 바둑판 조영의식의 이면에는 신선경 동경을 바탕으로 한 선도적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총합할 때 암각바둑판은 조선조 선비들의 은일과 운둔을 통한 자연경영의 문화 현상이 집약적으로 함축된 유산이자 전래 승경의 요처로, 명승과 같은 자연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탁월한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한내 17개의 돌바둑판 중에서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을 비롯하여 방학동 암각바둑판, 충주 사로암 암각바둑판, 무주 사선암 암각바둑판, 양산 어곡동 반룡대 석국 등은 세월의 풍파와 사람들의 접촉으로 마모되면서 바위가 깨어지거나 바둑판 줄이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언양 반구대 집청정 암각바둑판은 토사 매몰로 그 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암각바둑판은 자연과 바람의 흐름을 그대로 투영한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탁월한 조형물이자 선인들의 자연 사랑의 마음과 선계동경의 문화가 만나 이루어진 문화유적으로, 이에 대한 국내 분포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정밀조사와 보존관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