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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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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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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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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국 당대~금대 목조 건축의 귀포 변천에 관한 연구 - 좌우대의 결구 유형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s in Gwi-po from Tang to Jin Dynasty in China - Focusing on the connection type of Jwau-dae(左右隊) -)

  • 이병춘;이호열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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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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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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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연구는 중국의 중세 목조건축을 대상으로 귀포(轉角鋪作)의 변천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목적은 당대(唐代)부터 금대(金代)에 건축된 목조건축 중 중국정부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國保)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71동의 건물을 대상으로 귀포의 시기별 변천 양상을 살펴보고 변화요인을 파악하는데 있다. 이 연구에서는 귀포를 구성하는 좌우대(左右隊)의 다양한 결구유형에 주목하여 귀포의 변천과 전개과정을 고찰했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귀포의 형식 변화는 건축을 주도했던 장인들의 좌우대에 대한 인식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초기의 귀포에서는 소첨과 대첨으로 구성되는 중공조(重?造) 구성과 일두삼승(一斗三升)의 첨차 구성 원칙이 잘 유지되었으나 건축기술의 발달로 귀포의 출목부(出目部)에 귀잡이한대(말각공)와 좌우대가 결구되면서 다양한 형식이 나타났다. 초기의 귀포에서 진일보한 과도기형 귀포는 홀수 단에 놓인 좌우대의 모양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즉 귀한대에 면해 좌우대의 뺄목이 형성되지 않은 '무(無)뺄목형'(요, 북송)을 비롯한 좌우대의 뺄목이 사두(?頭)와 같은 모양인 '사두뺄목형'(북송, 금)과 좌우대의 뺄목이 소공두(小?頭)와 같은 '소공두형'(남송, 금)이 그것이다. 귀포의 후기형인 정형은 각 출목에 사두가 결구되는 유형으로 비록 요대에 형성되었지만 폭넓게 적용된 시기는 원대이후로 추정된다. 요대(遼代)에 이르러 건물의 지붕이 대형화되고 처마가 길게 돌출되는 변화가 나타나면서 하중이 집중되는 귀포를 구조적으로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이 시기에 처음 사용된 귀잡이한대는 귀포의 구조 보강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이후 귀포의 형식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요대(遼代)에 발달한 공포재인 익형공(翼型?)은 귀포를 비롯한 건물의 공포형식이 투심조(偸心造)에서 계심조(計心造)로 변화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와 같은 변화는 무앙계 건축을 중심으로 귀포의 정형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동시기 하앙계 건축에서는 무앙계에 비해 귀포가 '사두(?頭)뺄목형'에서 '소공두형'으로 바뀌는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다. 무엇보다 귀포의 변화에 요대의 건축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