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hinese orth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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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문자(五經文字)』 부수 분류의 표준과 소속자의 귀속 체례 - 여가석(余嘉錫)의 『오경문자(五經文字)』 부수 평가에 대한 반박 (The Radical-rule and Arrangement System of Characters of Wu Jing Wen Zi: a Rebuttal of Yu Jiaxi's View)

  • 이경원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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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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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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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Compiled in 776 by Zhang Shen, Wu Jing Wen Zi was regarded as the epitome of model book for standardized regular script in Tang Dynasty. Following early works like Shuo Wen Jie Zi, Zhang Shen adopted radical-rule for the compilation of this work. 3,250 characters were selected from the Five Classics and 160 radicals were established. Yu Jiaxi (1884-1955) harshly criticized the radical system of Wu Jing Wen Zi for being inconsistant and confusing. With careful review and analysis of examples from Wu Jing Wen Zi, this paper discusses the pupose of the compilation of this work, its unique radical-rule system, principles of arrangement of characters with the same or similar radicals, and the differentiation of variant characters. It further discusses the value of Wu Jing Wen Zi by its innovative radical-rule and effective differentiation of variant characters. It concludes with a rebuttal of Yu Jiaxi's argument and restate the necessity of reevaluation of this work even to this day.

북한의 학교수학 용어의 현상적 특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Actual State of School Mathematics Terms in North Korea)

  • 박교식
    • 대한수학교육학회지:학교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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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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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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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연구에서는 최근의 북한 수학 교과서에 제시된 학교수학 용어에서 찾을 수 있는 외형적 특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북한의 맞춤법에 따라 용어를 표기하고 있고, 많은 수의 한자 용어를 한글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지만, 한자용어도 여전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용어와 북한 용어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장차 우리나라 용어와 북한 용어를 통합하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자 용어를 한글화하는 것이 수학 교수$\cdot$학습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나, 북한의 사례를 볼 때, 한자 용어의 한글화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용어와 완전히 다른 북한 용어의 장단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용어와 북한 용어의 의미론적인 분석과 함께 선호도 조사가 필요하다 의미론적인 분석은 선호도에 맹종하는 것을 피하게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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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시기 천문학 교과서 비교 (COMPARISON OF ASTRONOMY TEXTBOOKS DURING THE PERIOD OF KOREAN EMPIRE)

  • 박은미;민병희;이용삼
    • 천문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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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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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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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ere were two books on astronomy published in 1908. One is "Astronomy (天文學)" written by Jeong, Yeong-Taek (鄭永澤, 1874 ~ 1948), an educator. The other is "Introduction to Astronomy(텬문략 )" written by William Martyn Baird (裵偉良, 1862 ~ 1931), an American missionary. It was known that these two books were translated into Korean as astronomical textbooks of the Korean Empire. We investigated the life of translators, the motivation of writing textbook, and the translators' specialty in astronomy. We also compared the two books in terms of content, orthography of terminology, scale of units, and so forth. We suggest that these books were really utilized as textbooks of astronomy in the modern school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Korea. We also conclude that in astronomy education these two textbooks bridged the gap between the traditional Chinese astronomy of the middle age and modern astronomy from the West.

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The Origin of Changseung and Ongjung Stone)

  • 정승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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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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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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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