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Buddha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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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불교사찰 벽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Mural Paintings in Thai Temples)

  • 노장서
    • 수완나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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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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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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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is research tries to review the history and concepts of Thai temple mural painting. According to the research results, the history of Thai mural painting dates back to the late 14th century when Wat Chedi Chet Taeo in Si Satchanalai was built. The Sinhalese elements embedded in the Sukhothai murals are also found in the Ayuthayan stupa murals made in the early 15th century. The mid 18th century's Burmese invasion into Ayuthaya destroyed most of Buddhist temples in the Kingdom of Ayuthaya and as a result, Buddhist murals of the late Ayuthayan age are hardly found except for some temple murals located outside of the capital. The late Ayuthayan murals are much different from the early Ayuthayan murals in that they are narrative in depicting Jataka and the life of Lord Buddha. This classical mural painting culminated in the age of Rama III of Bangkok Dynasty. His successor Rama IV undertook westernized reforms which influenced the area of traditional mural painting. Consequently, new western style Buddhist mural paintings were produced while themes of mural painting were enlarged to the other subjects such as historical recording of royal and social events. This trend continued in the age of Rama V but the development of Thai Buddhist mural painting discontinued after the death of Rama V due to the rapid westernization and decrease of illiteracy. The existing Buddhist murals produced on or before the reign of Rama V are deteriorating and disappearing. The reasons for this are partly because of Thailand's humid climate. However, some social backgrounds such as the lack of concern for preserving old Buddhist murals can not be disregarded. Considering the substantial value of Thai Buddhist murals as a cultural resource in Thai society, it is very urgent to establish appropriate conservation policy for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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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성불사 고려시대 마애십육나한상 (天安 成佛寺 高麗時代 磨崖十六羅漢像) (The Sixteen Arhat Images of the Koryo Period at Sungbul-sa, Chunan)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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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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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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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This paper investigates sixteen rock-cut arhat images of the Koryo period at Sungbul-sa (成佛寺) in Chunan (天安), South Chungchung Province. These images, together with a Buddha triad in the center, are carved in thin relief on the large granite wall ($375cm{\times}248cm$), and below them is engraved a huge lotus petal which looks to be supporting all the images above. According to extant textual sources, arhats were popularly worshipped in the Koryo period. The Painting of Five Hundred Arhat Images was brought to Koryo from Later Liang (後梁) of the Five Dynasties (五代) in 923. From that time on, the cult of arhat had become gradually known in Koryo. More than thirty ceremonies worshipping arhats (羅漢齊) were officially held in Koryo court. The Sixteen Arhat images (十六羅漢像) were enshrined in many temples. In Boje-sa (普濟寺), which kings and aristocrats often visited for ritual ceremonies, had its main hall dominated by the Five Hundred Arhats, called Nahan-pocheon (羅漢寶殿). However, a limited number of arhat images of the Koryo period, originally made as sets of sixteen or five hundred arhats, are now extant. The Sixteen Arhat images at Sungbul-sa are unique examples that show all sixteen images in situ. The Sixteen Arhat images, though some of them are abraded, show various postures and gesture. One of them sits with his knee bent, and one arhat is sitting on a chair with his hand held upward. Each image is carved in a niche, just as the arhat images of Northern Song China are normally represented in niches of a cave, and are quite similar in style to the arhat images of the Northern Song period at Qinglindong (靑林洞) cave, Feilaifeng (飛來峰), Zejiang province (浙江省). This similarity between the arhat images of Sungbul-sa and those of Qinglindong certifies the strong impact of Song Buddhist art on Koryo frequently mentioned in texts. The Sixteen Arhat images surround the central Buddha raising his hand up to his chest. This Buddha triad could be ascribed to be either the Maitreya Buddha triad or the Sakyamuni Buddha triad based on the Lotus Sutra (妙法蓮華經). Still, the Sakyamuni Buddha triad was more often represented with sixteen or five hundred arhats in the Koryo period, as was seen in the record of Boje-sa where the Sakyamuni triad was enshrined with five hundred arhat images. The Sixteen Arhat images of Sungbul-sa arc most likely to be a rare example of Koryo Arhat images showing the Sakyamuni Buddha triad and the Sixteen Arhats who were predicted to be Buddhas by Sakyamuni in the Lotus Sutra.

보물 자수가사의 제작 시기와 배경 고찰 (A Study of the Era and Background of Embroidered Kasaya, Designated as a Treasure in South Korea)

  • 안보연;홍나영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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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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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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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embroidered Kasaya is the twenty-five column Kasaya of Triratna: Buddha, Dharma, and Sangha. Even though it is a representative artifact of embroidery, the method of manufacturing heavily depends on the collector's reports. This study focuses on the prayer's recorder: Gonmyeong Park, born in Muja, and Ven. Haebung, who acted as a historical investigator of embroidered Kasaya. The beginning of Haebung's public record was in 1815, and his entrance into nirvana in 1826. The birth year of prayer in Muja was 1768. Therefore, the embroidered Kasaya was manufactured at the end of the 18th century or the early 19th century. Haebung appears to have played a critical role in historical investigation, and consequently the 125 icons of Triratna are almost identical in three treasures: the Kasaya at Seonamsa Temple, the embroidered Kasaya, and the painting of the embroidered Kasaya at Cheongnyongsa Temple. The embroidered Kasaya was particularly affected by the religion of a thousand Buddhas and by Triratna in the late Joseon era. Unlike the Kasaya of a thousand Buddhas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the embroidered Kasaya shows the Triratna in detail, suggesting that the icons of Triratna were newly created.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체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Making Wall Techniques behind the Buddha in Main Building of Bongjeongsa Temple)

  • 정혜영;한경순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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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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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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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안동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체의 제작기법 특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벽체의 구조 및 재료적 특성을 자연과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조사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벽체의 구조 및 재료학적 특성이 규명되었으며 제작기법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었다. 대상벽체는 목부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맞벽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초벽, 중벽, 화벽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벽체의 구조적 경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작과정에 따라 형성된 각각의 층위는 재료 및 제작기법의 차이를 보이며, 대체적으로 상부 층위일수록 세립의 물질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벽체의 형성에 사용된 주재료들과 첨가물질의 배합은 벽체내구력 및 보존력 향상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며, 보존력의 원인이 되는 물질간의 상호작용과 제작자의 세부적인 기법적 효과로 견고한 벽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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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 안료의 과학적 분석 (A Scientific Analysis of Pigments for A Scroll Painting in Daeungjeon Hall of Bulguk Temple)

  • 김소진;한민수;이한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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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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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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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고대부터 회화 장신구 장식품 무기 일상용품 등에 사용된 안료는 시대 제작기법 문화이동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물질로,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부터 분석을 통해 안료의 성분을 확인하였으며 최근에는 휴대용형광X선분석기를 사용하여 안료에 손상을 주지 않고 성분분석을 실시하여 고대 안료 물질을 밝히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연구로는 시대별, 지역별 안료의 쓰임 및 사용시기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안료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조성시기가 전해지는 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사용안료를 밝히는 한편, 시대와 지역이 비슷한 조선시대 불화 안료와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성분분석 결과와 기존의 연구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연백을 이용해 배채하였으며, 채색안료로는 연백, 주사, 연단, 구리 화합물인 석록(혹은 동록, 녹염동광), 철산화물인 석간주 및 금분 등을 이용하여 색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에 사용된 안료들은 전통안료를 혼합하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나 모든 안료에 대해 결정구조를 분석한 것이 아니므로 명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향후 회화 안료의 성분 및 제작특성, 특히 조선시대 불화의 안료에 대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판단된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시주질(施主秩)」 분석 (Analysis of the Shijujils(施主秩), the records on the creation of Buddha statues, of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Triad of Hwaeomsa Temple)

  • 유근자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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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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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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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가운데 좌존(左尊) 노사나불상과 우존(右尊) 석가불상의 복장에서 수습한 2점의 불상 조성기인 「시주질(施主秩)」을 분석한 것으로, 두 자료는 2015년 9월과 2020년 7월의 복장조사를 통해 나온 것이다. 2015년 9월에 수습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한동안 미공개로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다가 2020년 7월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이 발견되면서, 2021년 9월 '지리산 대화엄사' 특별전을 통해 함께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화엄사 두 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7세기에 조성된 불상에 관한 기존 조성기의 일반적인 낱장 또는 두루마리 형식과 다르게, 선장(線裝) 방식으로 가철(假綴)된 책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9장 38면으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1장 2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주질(施主秩)」의 내용은 불상 조성의 목적, 제작 시기, 봉안(奉安) 연도 및 봉안처(奉安處), 존명(尊名), 소임자(所任者), 조각승(彫刻僧), 시주(施主) 물목(物目), 시주자(施主者) 등을 담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화엄사에 주석하고 있던 승려들까지 수록하고 있는 점에서 「시주질(施主秩)」은 약 400여 년 전 화엄사의 중창 불사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에 소상하게 알려주는 타임캡슐(time capsule) 같은 것이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 및 노사나불상의 대좌 기록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 3월에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해 8월에 완성한 후, 1635년(인조 13) 가을에 대웅전에 봉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은 중관(中觀) 해안(海眼)이 1636년(인조 14)에 저술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에 의존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시기를 1636년으로 추정해 왔는데, 이제는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碧巖) 각성(覺性)의 역할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벽암 각성은 1630년에 화엄사 동오층석탑을 중수할 때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고, 1634년 삼신불상을 조성할 때도 '판거사(辦擧事)' 또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으며, 1653년 영산회 괘불탱을 조성할 때 역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등 17세기 화엄사 중창 불사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 각성과 왕실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불상의 조성과 관련하여 왕실 인물인 선조의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과 사위 신익성(申翊聖),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연도, 벽암 각성과 왕실의 관계 및 벽암 각성의 역할 등, 17세기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어 미술사뿐만 아니라 향후 화엄사의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 괘불탱 및 괘불궤 수종에 대한 연구 (Study Regarding Species Identification for Hanging Paintings and Hanging Painting Storage Boxes in Joseon Dynasty)

  • 김순관;최재완;정아름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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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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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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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괘불탱은 불교에서 특별한 야외 법회 때 사용하는 대형 족자형 불화이다. 보관 시 괘불궤라는 보관상자에 보관한다. 괘불탱의 바탕재나 안료 등에 대한 연구 사례는 많으나 괘불탱의 괘불축과 괘불궤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괘불탱을 중심으로 수종분석을 실시하였다. 대상은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예산 수덕사, 부안 개암사, 영천 수도사, 상주 북장사, 곡성 도림사, 양산 통도사, 예산 대련사 등 총 10건을 선정하였으며 시료 81점에 대해서 수종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괘불축 및 괘불궤에 사용된 수종은 소나무류 51점, 피나무속 8점, 노간주나무속 6점, 잣나무류 5점, 솔송나무속 4점, 미송속 3점, 망개나무속 2점, 문배나무속 1점, 대나무아과 1점으로 확인되었다. 솔송나무속과 미송속은 외래수종이며 보수 및 수리 과정에서 사용된 것으로 사료된다. 전체적으로 소나무류를 이용하여 괘불탱과 괘불궤를 제작하였고 잣나무류도 사용되었다. 불교문화에서 상징성을 갖는 피나무속도 괘불궤를 제작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사료되며, 망개나무속과 노간주나무속과 같이 목조각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수종도 식별되었다. 본 연구 결과를 토대로 향후 괘불탱 및 괘불궤에 진정성 있는 보존 연구에 활용될 것이라 기대한다.

치성광여래 무신도의 과학적 분석 및 보존처리 연구 (A Study on the Conservation and Management of the Painting of Shamanistic Spirits in Chiseonggwang Buddha)

  • 이현정;서정호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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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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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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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의 목적은 박락과 오염이 심하여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치성광여래 무신도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기초로 보존처리를 진행한 논문이다. 연구 방법으로는 상태 조사와 과학적 장비를 이용하여 무신도의 재질과 제작 방법을 파악하였다. 사용 장비로는 색차계와 실체현미경 그리고 휴대용 현미경, P-XRF, FT-IR, SEM-EDS를 이용하여 배접지와 바탕재의 종류와 채색 안료 성분분석을 하였다. 분석결과 배접지는 펄프지, 바탕재는 합성섬유인 폴리에스테르로 확인되었다. 또한 사용 안료는 적색 안료인 연단[Red Lead, Pb3O4], 백색 안료인 호분[Oyster Shell White, CaCO3]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합성안료로 확인되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무신도에서 주로 확인되는 녹색안료인 에메랄드그린[Emerald Green, Cu(C2H3O2)2·3Cu(AsO2)2]이 검출되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하여 확인된 재질 및 안료를 사용하여 치성광여래 무신도의 보존처리를 진행하여 보존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불화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와 수용배경에 대한 고찰 -16나한도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factors of Minhwa(民畵) and accepted background that are appeared at Buddhist paintings from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 focused on Sixteen Lohans painting -)

  • 신은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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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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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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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일반적으로 산수표현을 많이 하는 불화 장르로는 십육나한도를 비롯하여 팔상도, 감로도, 관음보살도 등과 조선후기에 특히 많이 조성된 독성도나 산신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불화는 대체로 산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배경을 갖추고 있는데, 18세기 이후 수묵적 전통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화려한 채색과 산수를 비롯한 다양한 경물의 표현으로 복잡해지는 경향이 강해지며, 19세기에는 흔히 말하는 민화적 요소가 등장하여 시대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된 16나한도는 이러한 경향 중에서도 배경묘사에 있어서 전통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보다는 채색이나 제재면에서 시대적인 예술경향을 반영하는 민화적인 배경이 가장 다양하고 뚜렷하게 부각되어 배경표현의 주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다른 불화와 차별된다. 즉 조선후기 16나한도에는 당시 유행하던 민화풍과 궁중화풍 등에서 보이던 청록산수식의 배경묘사가 두드러지며 십장생(十長生) 운룡(雲龍) 맹호(猛虎) 괴석(怪石) 화조(花鳥) 책가(冊架) 등과 같은 새로운 배경표현이 등장하여 폭넓은 수용 태도를 보여준다. 대체로 제재면에서는 수명장수, 부귀, 기복과 관련된 길상 상징물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서민불교로의 전환이라는 불교계의 동향, 특히 도교와 민간신앙과의 습합이라는 불교계의 자구적 모색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16나한도나 당시 불화에 표현된 다양한 도교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된 16나한도에 정형화된 양식의 민화풍이 등장한다는 것은 현존 민화의 제작연대를 추론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하며, 불화승들이 민간의 수요와 요청에 의해 민화의 작가로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후기 불화에서의 민화적 요소의 고찰은 그 제재나 형태상의 유사점에서 출발했지만, 극단적인 희화화라든가 파격미 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궁중의 장식그림과 유사한 양식의 표현이 많다는 점은 종교화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 불화라서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 전기 석가설법도의 사천왕 도상과 배치형식 고찰 (Study on Picture Image and Change of the Four Devas of Sakyamuni Buddha painting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김경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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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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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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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그린 불화에서는 조선 전반기에 다문천(多聞天)이 드는 지물에 변화가 생긴다. 고려시대까지 부처의 오른편에서 탑(塔)을 든 다문천왕은 조선 전반기에 들어와 비파(琵琶)를 드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원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1330~1336년)" 변상도에서 확인된다. 불화에서 다문천이 드는 탑이 몽구스(보서(寶鼠))로 변하는 지물의 변화는 티베트 사찰인 철방사(哲蚌寺), 오둔사(吳屯寺), 백거사(白居寺)에서 처음 벽화로 나타난다. 조선에서도 원각사지십층석탑 1층 탑신 〈석가설법도〉에서 지물의 변화를 보이는 새로운 배치의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 전반기 불화에서 탑과 비파를 든 사천왕의 위치는 좌우가 혼용되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티베트계 사천왕의 영향으로 대체로 파악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티베트계 사찰벽화에서 나타나는 사천왕 도상이 이전의 중국 내륙에서 나타나는 사천왕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티베트계 사찰에서 나타나는 사천왕 도상을 중심으로 그 현황을 파악하고,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사천왕 도상이 티베트계에서 연원을 가지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 전반기에 사천왕상의 지물과 위치가 새로운 도상이 확산되는 현상과 더불어 일정기간의 도상 혼용 현상에 대해 그 원인과 이유를 당시 유통되었을 판본을 중심으로 찾고자 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묘법연화경경변상도(명 1432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사천왕 도상과 "제불세존여래보살존자명칭가곡(1417년)"의 사천왕 도상은 다른 형식을 보여 준다. 이것은 주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는 경전임에도 서로 다른 판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조선 전반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사천왕의 지물이 다른 두 가지 판본의 경변상도에 의해 도상의 정형이 확보되지 않은 과도기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티베트불교미술이 중국 내륙에 전파되면서 전통적인 중국 사천왕도상과 티베트계 도상의 혼용이 명대 지속되는 가운데 이러한 전환기 미술이 조선 전기에 유입된 특징이라 하겠다. 따라서, 조선 전반기 사천왕의 다양한 도상 현황은 일괄적인 도상이 정착된 시기가 아닌 다양성을 보여주는 조선 전반기 불교미술의 특징을 공유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