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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돌봄과 가족돌봄의 종단적 관계: 재가 노인 돌봄을 중심으로 (Longitudinal Relationship between Public Care and Family Care: Focusing on Home Care for Older People in South Korea)

  • 이승호;신유미
    • 한국노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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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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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5-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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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가족의 돌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적돌봄제도가 도입되었지만, 공적돌봄의 확대가 가족돌봄의 감소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 공적돌봄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가족돌봄을 대체 혹은 보완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관계가 예측되고 있고(대체모형, 위계적 보상모형, 과업특정모형, 보충모형, 보완모형), 선행연구에서도 국가와 시기, 연구방법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재가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공적돌봄과 가족돌봄이 어떠한 관계를 보이는지 분석하였다. 분석자료는 고령화연구패널조사의 2-6차 자료를 이용하였고, 분석대상은 공적돌봄을 한번 이상 이용한 경험이 있는 55세 이상의 노인 262명이다. 분석방법은 돌봄이행을 기준으로 구분한 하위집단별로 돌봄내용의 종단적인 변화 정도를 비교하는 방법과, 패널자료의 특성을 이용하여 가족돌봄에 영향을 미치는 미관측 이질성의 영향을 통제하는 고정효과 회귀분석을 적용하였다. 분석결과, 공적돌봄에 의지하는 노인은 이전에 비해 가족돌봄에 덜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두 가지 돌봄 사이의 부적인 관계가 확인되었다. 나아가서 이 연구는 공적돌봄에 진입한 사례와 공적돌봄을 유지 또는 이탈한 사례들을 구분하여, 돌봄유형 간 관계가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두 이행과정 모두에서 부적인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공적돌봄에 진입하는 단계에서는 부적인 관계의 정도가 비교적 미미한 수준이었던 반면, 공적돌봄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는 단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한 부적 관계가 나타났다. 즉, 공적돌봄을 신청하여 수급하는 시점에서는 공적돌봄이 증가하더라도 가족돌봄이 크게 감소하지 않으나, 공적돌봄을 종료하고 가족돌봄에 의지하는 시점에서는 가족돌봄이 크게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공적돌봄에 비해 가족돌봄을 선호하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로 보이며, 한국 사회에서 공적돌봄과 가족돌봄의 관계는 위계적 보상모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본 연구의 이러한 결과는 공적돌봄과 가족돌봄의 관계가 돌봄이행 단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여러 하위집단 중에서 공적돌봄에서 가족돌봄으로 이행한 사례의 가족 구성원이 다른 집단에 비해 가장 큰 돌봄 부담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초기 들뢰즈 철학에 관한 연구 (An inquiry concerning early philosophy of G. Deleuze)

  • 진기행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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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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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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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철학연구를 시작하던 초기에 질 들뢰즈 G. Deleuze가 수많은 앞선 철학자들, 즉 흄 D. Hume, 루크레티우스 Lucretius, 칸트 I. Kant, 스피노자 B. Spinoza, 니체 F. W. Nietzsche, 베르그송 H. Bergson등에 대한 전기적(傳記的)인 연구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은 들뢰즈 사상의 전체를 지탱하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초기에 그가 행한 전기적인 저작들 전체가 스피노자와 니체라고 하는 두 명의 철학자의 <동일성 identity>으로 수렴되는 테마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적어도 당시의 그에게는 이들 두 명의 철학자가 그토록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차이 difference의 철학자로 간주되는 들뢰즈가 어째서 동일성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이들 두 명의 철학자 간에 어떤 동일성이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는 신을 그 체계의 중심에 놓고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서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니체의 철학이 정면으로 대비되는 것은 아닌가. 니체도 처음에는 스피노자에게 대단한 공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스피노자에 대하여 심각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이 비판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와 부재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이 무신론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도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들뢰즈도 또한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스피노자가 '힘'power 개념에 착안한 점에 근거하여, 스피노자를 니체와 비교하여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들뢰즈는 니체를 스피노자와 비교하여 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그때에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스피노자의 '힘' 개념과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완전히 들뢰즈 자신만의 독자적인 착상으로 변형시켜 해석한다. 이처럼 '힘' 개념을 매개로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서 진행된 쌍방향적인 사고의 운동이 들뢰즈에게 두 명의 철학자의 동일성을 말하기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 들뢰즈에 있어서 이 쌍방향적인 사고의 운동을 고찰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두 철학자의 동일성의 기반을 밝힘과 동시에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서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에 의해 언급되는 이 동일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규명해 보려고 한다. 또한 이 동일성의 성립 과정에서 두 철학자 사이에 놓인 신의 존재와 부재의 대립이 들뢰즈에 의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점도 살펴보려고 한다.

프로이트의 모세-가설과신화해석학의 원리: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이론을 통한 정치신학적 해석 (Freud's Moses-study and the Principle of Mythological Hermeneutic: Its Political Theological Interpretation Through Jan Assmann's Theory of Cultural Memory)

  • 김진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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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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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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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프로이트의 모세 및 유일신교의 성립 배경에 대한 연구는 정치신학의 논의 확산과 최근 이집트학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논문은 프로이트의 마지막 저서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의 출판 배경과 의도를 살펴보면서, 그의 모세-이집트인설과 유일신교 비판이 독일 나치주의의 반유대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정치신학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집트학자 얀 아스만에 의하면, 모세의 유대교는 유일신교이나 아케나텐의 아톤교는 우주신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프로이트가 '역사적 인물' 모세를 중시하는 반면, 문화적 기억이론에서는 '기억의 인물' 모세를 대상으로 한다. 프로이트가 유대인 증오의 근원이 유일신교를 수립한 모세 그 자신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아스만 역시 유일신교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이른바 '모세구별'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모세구별의 폐지를 통해서만 억압과 폭력의 해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스만은 프로이트가 "모세구별의 가장 노골적인 반대자"로서 반유대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분명한 입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반유대주의적 증오가 나치주의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전이되는 가운데, 프로이트는 기독교의 실질적인 창시자 유대인 바울을 '유대교의 파괴자'인 동시에 '유대교의 계승자'라고 평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우베스는 바울을 정치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스만이 그것을 계승하였다. 프로이트가 기술하는 '역사적 모세'는 '예언자 모세'가 아니라 '법제정자와 정치적 개조로서 모세'이고, 그가 단행한 '구별'에서 유대인 혐오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환원에 의한 해체'(니체)로서 프로이트의 유일신교 비판은 정치신학적 권능을 가지고 있다. 타우베스가 바울을 정치신학자로 해석한 것처럼, 아스만은 프로이트의 유일신교 비판에서 정치신학적 요소를 발굴한 것이다.

해방전후 함대훈 소설에 나타난 '러시아' 표상 연구 (Russia Represented the Novel of Dae Hun Ham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 강용훈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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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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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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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식민지 시기 함대훈은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소설 창작에 반복적으로 활용했다. 그 중에서 투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은 함대훈의 첫 장편소설 "폭풍전야"에도, 1943년 발표된 "북풍의 정열"에도 반복적으로 차용되고 있다. 함대훈 문학에 차용된 러시아 문학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문화, 다른 질서에 대한 인물들의 동경을 이끌어냈으며, 인물들의 동경은 1930년대 중반 발표된 "폭풍전야"에서는 민족운동에 뛰어든 신청년(新靑年)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어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긴장 관계를 만들어냈다. 반면 1943년 발표된 "북풍의 정열"은 "폭풍전야"와 마찬가지로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는 "폭풍전야"와는 변별되는 지정학적 상상력이 구현되어 있다. "북풍의 정열"에서는 '만주'를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은 소거된 반면, '만주'와 과거 지식인 청년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던 '러시아'를 연결시키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열정이 만주에 대한 동경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함대훈 문학에 나타난 '북국(北國)' 표상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1930년대 후반 함대훈의 소설에서는 '러시아'가 '북국'으로도 표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함대훈 문학에서 '북국'은 점차 '러시아'가 아니라 '만주'를 지칭하는 공간 표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북국' 표상을 통해 러시아와 만주를 연결시키는 방식은 '만주'가 시베리아 지방과 멀지 않은 지역임을 부각시키는 언술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시베리아 지역으로까지 대동아공영권을 확대하고 싶은 제국 일본의 욕망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함대훈은 '북국' 표상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제국 일본의 지정학적 논리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 함대훈에게 '러시아'는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지만, 그 동경은 '만주'에 대한 함대훈의 인식에서 드러나듯 언제든 세속적 욕망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해방 직후 발표된 함대훈 장편소설 "청춘보"에서도 확인된다. 해방 직후는 소련이 냉전질서의 한 축으로 부각되고 러시아어가 한국인의 일상적 담화공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였다. 함대훈은 "청춘보"를 통해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소련의 문화를 동경하던 연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후, 그의 시선으로 해방 전후의 북조선 사회를 재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작품은 러시아의 문화 및 '소련'과 관련된 다층적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재현의 양상을 만들어낸 것은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심퍼사이저(sympathizer) 의식, 즉 '동반자 의식'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동반자 의식은 식민지 후반의 조선에서 금지의 대상이었던 '소비에트' 문화의 이국성을 그가 동경하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러시아어가 일상에서 사용될 수 있는 언어이자 영어와 교환될 수 있는 위상을 확보하게 된 해방 직후 '러시아' 및 '소비에트'를 재현하던 주인공의 시선은 변모하게 된다. '붉은 군대'라는 상징 아래 '러시아'와 '소비에트'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던 시선은 점차 변모하였고, 월남(越南) 이후에는 '러시아'를 '공산주의'라는 도깨비에 의해 점령된 소굴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 '소비에트'는 분리되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기 가장 핵심적인 러시아 문학 연구자이자 번역자로 규정된 함대훈의 해방 이후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그가 발표한 소설 "청춘보"의 러시아어 번역/통역가 곽성식의 면모는 해방직후 한국의 러시아 문학 연구가 걸어야 할 침체의 길들을 서사의 형태로 예견하고 있다.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 및 러시아의 이국적 문화에 대한 동경에 의해 수행되던 낭만적 번역, 해방 전후 함대훈 소설의 러시아 표상은 그러한 낭만적 번역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 혹은 언어의 수형자 (A. Artaud or the Prisoner of Language)

  • 박형섭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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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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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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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앙토냉 아르토의 삶은 잔혹한 실존의 드라마이다. 그는 고통이 투사된 정신적 삶을 살았다. 이 논문은 언어의 수형자로서 아르토의 글쓰기에 나타난 사유의 궤적을 살펴본 것이다. 아르토는 평생 말과 사물, 존재와 사유의 관계 사이에서 번민한 시인이다. 그는 존재의 신비를 일상의 언어로 옮길 때마다 정신적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의 시적 사유는 주체성의 상실에 따른 해체의 여정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을 언어로 포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르토는 젊은 시절 정신병을 앓았다. 우리는 그 병을 시적 창작의 어려움과 결부시켜 살폈다. 여기서는 아르토와 리비에르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시인은 "영혼의 중심의 붕괴, 일종의 근본적이고 달아나는 사유의 침식"을 언급하며 언어적 표현의 무능력을 토로한다. 그 이후 아르토의 불안한 정신적 징후는 지속된다. 그는 정신착란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도 의식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것은 아르토의 글쓰기에 그대로 나타난다. 또 그의 종교적 성향은 불안정한 정신을 반영한다. 멕시코 타라후마라 지방 여행 중엔 원시신앙인 페요틀의 의식(儀式)에 집착하고 주술에 경도되기도 했다. 그의 비기독교적 신관은 신비주의적 성향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르토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르토의 정신착란은 엄밀한 의미에서 광기가 아니다. 비록 광기라고 해도 그것은 은유적이다. 그것은 아르토가 자신의 한계를 거부하는 데서 나오며, 육체가 절대적 감각과의 동일시 속에서 자신을 한데 모으려는 열망에서 비롯한다. 그의 지적 능력은 오히려 극도로 고양된 상태에서 더욱 잘 드러났다. 아르토의 광기는 심오한 사색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정신착란을 겪은 시인들의 삶은 그렇지 않은 시인들보다 더욱 시적이다. 아르토의 정상을 벗어난 감정은 우리 자신의 한계, 무력함, 체념 등을 측정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의 절규는 비분절의 고함이지만, 다른 병자의 그것과 성격이 다르다. 왜 우리가 아르토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천착하는가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1930년대 중국 문서당안 행정개혁론의 이해 (The Records and Archives Administrative Reform in China in 1930s)

  • 이원규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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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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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6-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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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Historical interest in China in 1930s has been mostly focused on political characteristic of the National Government(國民政府)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KMT(中國國民黨) as a result of national unification. It is certain that China had a chance to construct a modern country by the establishment of the very unified revolutionary government. But, it was the time of expanding national crises that threatened the existence of the country such as the Manchurian Incident and the Chinese-Japanese War as well as the chaos of the domestic situation, too. So it has a good reason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 and pattern of the response of the political powers of those days. But, as shown in the recent studies, the manifestation method of political power by the revolutionary regime catches our attention through the understanding of internal operating system. Though this writing started from the fact that the Nationalist Government executed the administrative reform which aimed at "administrative efficiency" in the middle of 1930s, but it put stress on the seriousness of the problem and its solution rather than political background or results. "Committee on Administrative Efficiency(行政效率委員會)", the center of administrative reform movement which was established in 1934, examined the plan to execute the reform through legislation by the Executive Council(行政院) on the basis of the results of relevant studies. They claimed that the construction of a modern country should be performed by not political revolution anymore but by gradual improvement and daily reform, and that the operation of the government should become modern, scientific and efficient. There were many fields of administrative reform subjects, but especially, the field of records and archives adminstration(文書檔案行政) was studied intensively from the initial stage because that subject had already been discussed intensively. They recognized that records and archives were the basic tool of work performance and general activity but an inefficient field in spite of many input staff members, and most of all, archival reform bring about less conflicts than the fields of finance, organization and personnel. When it comes to the field of records adminstration, the key subjects that records should be written simply, the process of record treatment should be clear and the delay of that should be prevented were already presented in a records administrative meeting in 1922. That is, the unified law about record management was not established, so each government organization followed a conventional custom or performed independent improvement. It was through the other records administrative workshop of the Nationalist Government in 1933 when the new trend was appeared as the unified system improvement. They decided to unify the format of official records, to use marker and section, to unify the registration of receipt records and dispatch records and to strengthen the examination of records treatment. But, the method of records treatment was not unified yet, so the key point of records administrative reform was to establish a unified and standard record management system for preventing repetition by simplifying the treatment procedure and for intensive treatment by exclusive organizations. From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to 1930s, there was not big change in the field of archives administration, and archives management methods were prescribed differently even in the same section as well as same department. Therefore, the point at issue was to centralize scattered management systems that were performed in each section, to establish unified standard about filing and retention period allowance and to improve searching system through classification and proper number allowance. Especially, the problem was that each number system and classification system bring about different result due to dual operation of record registration and archives registration, and that strict management through mutual contrast, searching and application are impossible. Besides, various problems such as filing tools, arrangement method, preservation facilities & equipment, lending service and use method were raised also. In the process this study for the system improvement of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they recognized that records and archives are the identical thing and reached to create a successive management method of records and archives called "Records and Archives Chain Management Method(文書檔案連鎖法)" as a potential alternative. Several principles that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should be performed unitedly in each organization by the general record recipient section and the general archives section under the principle of task centralization, a consistent classification system should be used by classification method decided in advance according to organizational constitution and work functions and an identical number system should be used in the process of record management stage and archive management stage by using a card-type register were established. Though, this "Records and Archives Chain Management Method" was developed to the stage of test application in several organizations, but it was not adopted as a regular system and discontinued. That was because the administrative reform of the Nationalist Government was discontinued by the outbreak of the Chinese-Japanese War. Even though the administrative reform in the middle of 1930s didn't produce practical results but merely an experimentation, it was verified that the reform against tradition and custom conducted by the Nationalist Government that aimed for the construction of a modern country was not only a field of politics, but on the other hand, the weak basis of the government operation became the obstacle to the realization of the political power of the revolutionary regime. Though the subject of records and archives administrative reform was postponed to the future,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consciousness of modern records and archives administration and overall studies began through this examination of administrative reform.

영구평화를 위한 초국가주의 역사로의 전환기 아카이브즈와 아키비스트의 역할: 유럽연합 아카이브즈 설립과정과 유럽차원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독일 아키비스트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The Role of Archives and Archivists in the Period of Transformation into Supranationalism from Nationalism for the Purpose of Permanent Peace: Focused on the Establishment of European Community Archives and the Activities of the German Archivists for the Redressing the Common European Past)

  • 노명환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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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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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7-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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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에서는 기록관리 그리고 그 담당자 아키비스트는 어떠한 사회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는 질문이 핵심의 화두다. 기록관리를 통해 공동체의 사회 역사적 증거가 제공되고 공동의 기억 및 의식 그리고 정체성이 확립되기 때문에 사회변동과 역사변혁을 위해 아키비스트의 역할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필자는 유럽통합 과정에서 그리고 독일의 유럽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나치 과거사 청산에서 아카이브즈 및 아키비스트가 수행하는 사회 역사적 역할을 실증적으로 탐색한다. 유럽인들은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를 전쟁의 원인으로 규명하였고 영구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초민족주의(Supranationalism) 또는 초국가주의 이념을 정립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유럽통합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유럽, 즉 초국가주의 유럽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부끄러운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하고 정리하여 새로운 유럽인 공동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아카이브즈 역할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인 1945년부터 실질적인 유럽통합이 추진되었고 1989-90년 시점에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유럽통합은 큰 변동을 겪었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는 냉전의 시기로서 유럽통합은 서유럽에 국한되는 서유럽통합이었고 1989-90년 이후부터는 탈냉전시기로서 유럽전체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동유럽의 국가들이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일 아카이브즈와 아키비스트들이 과거청산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평화와 연대로 정의되는 유럽 공동의 미래상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유럽통합 과정에서 아카이브즈와 아키비스트들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공동의 기억과 이에 기반한 공동의 의식 정립이 상호 불가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의 기억과 공동의 의식 정립은 공동체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필수적이며 이러한 과정은 명확한 증거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명확한 증거의 제공은 무엇보다도 기록의 보존과 관리에 의해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키비스트들의 존재 의의와 아카이브즈 운영의 목표가 충분히 인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응노(1904~1989)의 회화론과 1950년대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인식 (Lee Ungno (1904-1989)'s Theory of Painting and Art Informel Perception in the 1950s)

  • 이장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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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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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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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고암 이응노(1904~1989)의 회화 전개에서 1960년대의 파리 시절은 미술가로서 가장 전위적인 방식으로 매체의 실험 및 혁신을 이룬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파리로 건너가기 직전에 개최된 이응노의 ${\ll}$도불${\gg}$전(1958. 3)은 이응노가 앵포르멜 미술을 처음 수용할 때의 회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왔다. 이를 주목한 이응노 관련 연구는 1958년의 작품들을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관점과 이응노가 문인화로 처음 화업을 시작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문인화의 사의(寫意) 정신의 발현으로 보는 관점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본고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통칭할 수 있는 '추상회화'에 대한 이응노의 인식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응노의 회화론을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기에 이응노가 회화를 처음 학습했던 해강 김규진 문하와 일본 유학 시절의 회화론을 먼저 살펴보았다. 이응노는 매너리즘에 빠진 문인화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깊이 관조하는 것을 회화 제작의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사생론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추상(抽象)'을 서양 미술사조의 '추상회화'라는 고유 개념이 아니라 일본 유학 시절 이후 강화된 사생론에 따라 '(자연에서) 형상을 추출하다'라는 사전적 의미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응노 본인도 추상회화의 근간에는 자연의 형태가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즉 추상적인 회화와 '추상회화'는 다른 개념이기에 이를 구분하여 당시 이응노의 회화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응노의 1950년대 추상회화를 문인화의 사의(寫意) 정신이 발현된 것으로 해석하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전통 문인화론을 현대의 이응노에게 직접 연결하는 것은 오히려 이응노 회화의 개성을 가리게 하고 전통서화와 현대회화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이응노는 회화 제작에서 사의를 강조하긴 했지만 이는 대명제로서의 언사(言辭)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정작 195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은 <자화상>(1956)처럼 이응노가 스스로 '북화(북종화)'라고 규정했던 회화 양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문인화의 대명제로서의 '사의'와 '사의적 화법'을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당시 그의 회화는 사의의 발현, 전통 문인화의 계승이라는 측면으로 보기보다 사의적 화법을 구사한 이응노식 추상회화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

경복궁 인수형(鱗獸形) 서수상(瑞獸像)의 제작시기와 별간역(別看役) 연구 (A Study on the Special Technician Byeolganyeok(別看役) and the Statues of Auspicious Animals(Seosusang, 瑞獸像) : the Scale-covered animal form(鱗獸形) in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 김민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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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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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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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경복궁(景福宮)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全燒)된 뒤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2년인 1865년 재건이 시작된다. 이때 경복궁 재건에 대한 의궤(儀軌)는 만들어지지 않고 기초 자료인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에 1865년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내용들을 정리하면 경복궁 재건에 사용된 석재들은 강화(江華), 동대문 밖의 영풍정(映楓亭), 삼청동(三淸洞) 등지에서 채취하기도 했으며, 경복궁 터에 남아 있던 간의대(簡儀臺) 등의 옛 석물을 재사용(再使用)하기도 했다. 또 경희궁(慶熙宮)에 있던 여러 건물 및 석조물을 이전(移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로 경복궁에는 재건기 19세기 뿐만 아니라 17~18세기의 석조물이 공존하고 있다. "경복궁영건일기"에는 경회루(慶會樓) 연못에서 출토된 청동용(靑銅龍)이 별간역(別看役) 김재수(金在洙)가 1865년 궁궐의 화재를 막아달라는 의미를 담아 제작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재수 등 별간역들은 석물의 설계 및 감동(監董)을 했던 인물들로 광화문 해치상을 조각했다고 전해지던 이세옥(李世玉) 역시 화원(畵員) 출신의 별간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설계를 바탕으로 실제 조각을 담당한 석장(石匠)들도 찾을 수 있었는데 근정전(勤政殿)은 장성복(張聖福), 광화문(光化門)은 김진명(金振明)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경복궁의 서수상(瑞獸像) 중 비늘이 있는 인수형(鱗獸形) 서수상의 양식 특징을 찾은 결과 돌출된 입과 큰 코, 형식적인 귀, 등 갈기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 특징을 조선시대 능묘(陵墓) 석물들과 비교한 결과 이 작품들은 고종 재건시인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 계승은 별간역, 석장들이 능묘의 석조물을 제작하면서 얻은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측면 지붕부 결구의 구성방식에 관한 재고(再考) - 중국 원대(元代) 이전 목조건축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ipped-and-Gable-Roof Framework of Muryangsujeon of Buseoksa Temple)

  • 차주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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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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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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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에 관한 연구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일제시대에 해체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기법과 추녀, 귀서까래 등의 결합 수법들이 정연한 형태로 결구되지 않고, 조선시대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와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원형이 아닌 것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그 편년에 대해 다양한 의견(13세기, 12세기 건축)들이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었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목조건축 구조틀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에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 기법과 유사한 건축을 대상으로 평면비 및 어칸과 퇴칸의 비례를 상호 비교하여 살펴 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팔작지붕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으로 판단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측면 서까래가 내부 보(량(梁))에 직접 접하는 기법은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 건축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수법으로, 중국의 팔작지붕은 당대(唐代) 이후에 산화(山花, 합각) 양가(梁架)를 구성하여 팔작지붕의 측면을 구성하는 기법이 발달되어, 명청대 이전까지 크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귀서까래의 발달과정 중 평행서까래에서 말굽서까래로 전환되기 이전 방식인 평행복사연(平行輻射椽)이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의 귀서까래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추녀의 중간부분부터 귀서까래가 걸치지 않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방식은 중국에서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성으로 보인다. 이런 기법들을 살펴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볼 수 없으며, 북방 지역의 당 송대(唐 宋代) 및 요대(遼代) 시기에 볼 수 있는 기법으로, 건축물의 편년시기와 평면에서 어칸과 퇴칸의 비례 관계를 고려해볼 때 동아시아 북방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의 구조 기법으로 판단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가 변형된 것이 아니고, 팔작지붕 고유의 방식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향후 부석사 무량 수전의 평면과 어칸 및 퇴칸의 비례,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전 폐사지 중 팔작지붕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에 대해 복원 설계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