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Anti-Japanes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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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항일운동에 나타난 '해녀항쟁가' 배경 연구 (A Background Study of 'Haenyeo Uprising Song' in the Jeju Haenyeo Anti-Japanese Movement)

  • 문효진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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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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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4-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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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제주해녀들의 항일운동을 돌아보는 현재적 조건의 반성과 검토에서 시작되었다. 제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제 식민지정책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제의 수탈을 가장 먼저 경험했다. 1932년 발발한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생존권 투쟁이 항일운동으로 확대된 국내 최대의 여성연대운동이다. 당시 제주의 청년 지성인들은 교육을 앞세운 계몽 운동을 펼쳤는데 그 중 강관순 독립지사는 해녀들의 억울한 삶을 노래 가사로 만들어 해녀들의 항일의식 고취와 주체성 회복에 힘썼다. '해녀의 노래'(해녀항쟁가)는 당시 일본 유행가 '동경행진곡'을 차용한 것으로 일본의 멜로디를 사용한 점과 전통 민요가 아닌 점, 배후에 사회주의자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기록에서 배제되어 왔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의 왜색가요 금지운동으로 노래 사용이 제한되었고 보도 자료들의 연대기도 일부 일치하지 않다. '제주해녀'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제주 여성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큰 계기를 만들었다. 제주해녀를 연구하는 것은 제주 전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인권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제주 전반의 항일운동 연구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항일운동 시기에 불려진 '해녀의 노래'는 출항 해녀들에 의해 제주 전역과 동아시아에 전해져 그들의 공감의식을 오래도록 유지해왔다. 구전노래는 가장 원초적인 예술형태이다. 한 세기를 이끌어온 노래를 연구하며 일본 유행가를 발췌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두 노래의 비교분석을 통해 항일운동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추가 기록을 통해 그들의 희생과 공헌의 가치를 기억하고자 한다.

북간도지역(北間島地域) 민족학교(民族學校)에 관(關)한 지리학적(地理學的) 연구(硏究) (A Geographical Study of Korean Ethnic Schools in Bukkando)

  • 김석주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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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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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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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는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지리학적 차원에서의 연구로서 북간도 지역에서 민족교육운동의 핵심이었던 민족학교의 입지가 한인들의 독립운동 의지와 일본과 중국 정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인촌이 집중된 곳에는 대부분 민족학교가 설립되어 양자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었다. 양자 모두 용정을 중심으로 한 평야지역으로부터 공간적으로 확산되어가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둘째 교통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3.13운동 이전에는 주요 간선도로와 인접한 지역에 학교의 비중이 높았으나 3.13운동 이후에는 약간의 감소를 보였다. 셋째, 민족학교는 일본과 중국 양측의 압박으로 인해 힘든 발전 과정을 겪었다.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는 민족학교가 많은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양자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었다. 민족학교와 중국인 설립학교와의 관계는 3.13운동 이전에 양자의 집중지는 비슷하였지만 3.13운동 이후에 중국인 설립학교는 조선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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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현실인식과 대응 (The awareness and response to reality of Yoon Hee Soon, a female fighter for independence)

  • 신성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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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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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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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강원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에 따른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 그리고 아들 유돈상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집안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화서학파였던 고흥 유씨 일가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보다는 아름다운 과거로의 복귀와 복원을 염원했고, 의병을 일으킨 것 또한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친정과 시가 모두 화서학파였던 윤희순 역시 그들과 동일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된 동인 역시 충 효 열과 같은 중세적 가치였다. 특히 집안의 안사람이자 여성으로서의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응했다. 그녀는 보다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안사람으로 대변되는 여성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 하에 그녀는 '교육'을 통한 '계몽'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했고, 이 과정에서 의병가와 포고문 등은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한의계 독립운동가들 (The Independence Activists in the field of Korean Medicine Leading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the 1920's)

  • 김명섭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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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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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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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Due to Japanese imperialism's invasion of Korea and the policy of exterminating national culture, many independence activists from Korean medicine participated in the Manchurian Independence Army activities and the fight for freedom. Kang Woo-kyu, who threw a bomb at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on September 2, 1919, can be cited as a leader who learned East Asian medicine. Kim Kwanje, who organized a secret organization by opening an East Asian medicine clinic in Gimhae, Gyeongsangnam-do, was involved in the struggle of the medical corps while working as a medical student. He is accused of providing a shelter by treating members of the Uiryeoldan. In 1919, the Manchurian Independence Army unit, which launched the March 1st Movement armed struggle, was established, and those who served as military doctors in various organizations can be found. Park Se-jung, who participated as an independent soldier at the age of 47, treated wounded soldiers and patients as a military doctor. A branch office was also created by raising military funds and participating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Jang Hyong was able to raise independent military funds, campaign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s independence petition, and lecture across the country mostly disguised as an East Asian medicine doctor, which led to several imprisonments for "fraud charges under the guise of similar medical practices".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 (A Study on Trusteeship Reports of Dong-a Ilbo)

  • 김동민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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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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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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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동아일보는 해방 직후 시기에 친일파 지주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왜곡보도로써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선동하여 여론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는 미 국무성의 방침과 달리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미군정 당국의 견해를 대변하는 동시에 즉시독립을 갈망하는 민중의 정서를 이용하여 친일파 집단의 정체성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왜곡하면서 반탁=반공=반소의 분위기를 조장했다. 이것은 과오에 의한 오보가 아닌 의도적인 허위.왜곡보도였다. 그 결과 반탁=반소=반공=애국, 친탁=친소=용공=매국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반대로 3상회의의 결정을 수용하여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 매국노로 매도되었다. 이로써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실종되었다. 그것을 바랐던 민중들도 반탁선동에 매몰되어 현안의 과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 분위기에서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친일파들이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어 새 역사의 출발을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지식인들을 철저하게 숙청함으로써 새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놓은 프랑스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동아일보는 태도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나는 정론지(政論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객관성과 중립성, 불편부당을 표방하며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독자를 확보하려 했던 대중지(大衆紙)가 출현하기 직전, 정파적 견해를 대변하면서 정치적 목적의 선전과 선동을 일삼던 정치신문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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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내 중국 관련 역사문화자원 연구: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A Study of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Related to China in the Region : Focusing on Jeonbuk area)

  • 정지나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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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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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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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전북지역의 중국관련 역사문화자원을 중심으로 그것의 문화콘텐츠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 항일운동시대까지 형성된 역사문화자원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분석의 관점은 교류, 귀화 그리고 신앙의 시각에서 이루어졌으며 분석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먼저 교류적 관점에서 최치원과 서긍 그리고 송영구의 활동은 지역에 많은 유적이나 지리적 스토리를 남기고, 아름다운 인적교류의 유산 등 지역역사문화콘텐츠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귀화의 관점에서 볼 때 두경령, 천만리, 그리고 정율성은 귀화하여 지역에 한중역사문화를 뿌리내리고, 특히 항일운동, 국가형성에 기여하는 등 귀화를 통한 한중의 역사문화 스토리 및 유산형성에 역시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관우신앙을 들 수 있으며, 그것은 용감한 장수로서, 그리고 전쟁승리의 상징으로서 관과 민이 믿는 신앙이 되었고 그와 관련된 상징물, 회화 등은 숭배의 대상으로서, 예술적 가치로서 귀중한 지역중국문화자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지역 내 중국관련 역사문화자원과 관련된 스토리 정리 및 지역축제로의 발전, 도서문화브랜드화, 국제적인 음악제 추진, 중국인 탐방 코스 등의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이를 통한 한중문화교류 확대, 중국인 관광객 유치 등에 대한 지자체 및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사시에 나타난 '민족' 형상화에 관한 비교 연구 - 고은의 『백두산』과 리욱의 『고향 사람들』, 『풍운기』를 중심으로 (A comparative study on configuration of the nation in epics)

  • 장은영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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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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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7-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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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study focused on difference of the nation's concept between Ko un's Baekdusan and Lee uk's Gohyangsaramdul, Pungungi. These works are epics restructure nation's history. A epic's story provides framework of recognition to social members. An individual and community accept their story and then stories construct pesonal identity and community's identity. So we can say a epic configurates national identity by story nation history and nation territory. The nation's concept is understood steadfast and very pure as like a blood relationship in Korea. This is aspects of Korean nationalism. But the Nation is modern, social and historical concept. That is different from ethnic identity. This way throws open the door to analyze nation identity. Ko un's Baekdusan narrates permanence and sacralization of the nation for emphasizing the unification of North Korea and South Korea. Baekdusan expresses the social desire of Korea in the 1980s. In comparison, Lee uk's Gohyangsaramdul representate ambivalent attitude. One is a position as a settler and the other is a new master of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So Gohyangsaramdul narrates and remembers their motherland Chosun. But Pungungi exclude recognition of Chosun as motherland. This work's narration focuses on association with struggle of classes and anti-Japanes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ecause these events are able to unity Korean and Chines. Three works deal with same history and same background, but those show defferent recognition about the Nation. Because each society has different social desire and expect different future. The present desire and future prospect construct nation identity.

종교와 항일독립운동, 그리고 쟁점 - 무극도 사례를 중심으로 - (Issues Involving the Relationship between Religion and the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A Case Study of Mugeukdo)

  • 고병철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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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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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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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항일독립운동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 과정에서 소수의 신종교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호명되지만,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하는 논리는 미약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이 연구의 목적은 정산과 무극도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명하고, 이를 통해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쟁점들을 성찰하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 종래 항일독립운동과 연결된 정산과 무극도의 활동에 대해 대순진리회의 내부 자료(제II장)와 외부 자료(제III장)를 분석해 향후 과제를 제기하면서 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를 연결할 때에 성찰해야 할 부분들을 제시하였다(제IV장). 구체적으로, 제II장에서는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가족을 배경으로 한 정산의 항일의식과 3·1운동 참여 지시, 그리고 무극도의 산업활동으로 구분해 검토하였다. 제III장에서는 제2장의 내용에 대해 외부 자료들을 활용해 검토한 후 정산과 신자들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교단 내부와 외부 자료를 적극 발굴하는 일, 아울러 천자등극운동과 후천개벽 등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조명하는 일을 연구 과제로 제시하였다.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전자는 무극도 내부와 외부 자료의 교차 검토를 가능하게 자료 내용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 후자는 종교적 항일독립운동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어, 제IV장에서는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할 때 성찰할 부분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종교 관련 활동의 포함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항일독립운동의 범주 설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 환원주의적 접근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신종교 형태'를 취한 이유, 그리고 종교를 가장했다고 평가한 단체들이 해방 이후에 종교적 정체성이나 성격을 유지·지향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의 연관성을 정교하게 밝히기 위해 '부수적 차원'과 '목적적 차원'을 구분해서 '그 활동이 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는지의 여부'와 '그 활동의 최종 목적이 항일독립인지 종교적 세계관의 구현인지의 여부'를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사회적 기억 장치들을 고려한다면, 종교계나 학계는 이 주제와 관련된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발굴하고 축적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관심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를 종교적 세계관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수반해야 한다. 정산과 무극도의 여러 활동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정교하게 조명하는 일도 이러한 관심과 노력을 통해 가능해질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과 영화의 활용에 관한 연구 (The study about the ruling policy of Government-General of Chosun and its use of film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 조희문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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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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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7-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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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일본은 1910년, 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에서 입법, 사법, 행정력을 독점한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조선총독부 또한 그때까지 존속했다. 조선충독부는 일본의 한국통치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기관이었으며 한국인의 반일, 항일 행위를 무마하고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일본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공동운명체라는 개념을 의식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는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억압적인 통제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민중봉기에 의해 전면적인 전환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 취임한 3대 총독 사이토(濟藤實)는 보다 우호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회유하고자 했다. 정책의 변화는 여러 가지 후속 조치들로 구체화 되었는데 민영 언론매체의 설립 허용, 시찰단 구성, 박람회 개최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일간신문의 경우 이전에는 매일신보 경성일보, Seoul Press 등 총독부 기관지만 발행되었으나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한국어 신문이 허용되었으며 잡지들도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본파 한국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일본과 한국시찰단을 구성하여 상호방문하는 사업을 펴기도 했고, 박람회를 개최해 일본의 우수한 문물을 한국인들에게 과시하려는 시도도 나왔다. 이같은 조치의 기저는 '주지(周短)와 선전(宣衝)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영화였다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반을 설치하고 홍보 선전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영화의 선전기능과 효과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만주), 미국과 차례로 전쟁을 시작한 1937년 이후에는 민간의 영화제작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한편 선전영화 제작을 위한 영화사를 별도로 설립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는 조선총독부의 조종을 받는 한개 영화사만이 존재해 선전영화만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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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文化) 전이(轉移)(culture transition)의 시각(視覺)에서 본 젠(禪) 패션 연구(硏究) (A Study on Zen Fashion in the Point of View of Culture Transition)

  • 박혜원
    • 패션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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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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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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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for considering about Zen fashion in the point of view of culture transition. Through this research, the Far-East including Korea will be confirmed as a center of fashion culture in 21st century. The contents are the meaning of culture transition in Post Modern period, the meaning of Zen and changing of fashion trend as the background of Zen Fash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Zen fashion design. The results are as follows: Anti-western movement or dismantlement of culture has been represented the limitation of western centered culture. So the interesting about East means the changing to east from west in ideas. To make new creation in fashion field, the comprehension about the western fashion which has been preceeded and new trials using the our tradition will be needed. Zen is a kind of Buddhism and the essence of it is to find myself and express individual experiences. The change of one's sens of value, new age movement and concerning of environment and ecology make more comfortable, simple and healthy elements in clothing. The fusion style is under a vogue in life style and Zen is the core of this trend. The characteristics of Zen fashion are flat dismantlement which has been know as a Japanese style, oriental minimalism and nature beauty of ecology. This characteristics are found not only the shape, color but the will of the behind. The pursing temperance and naturalism are represented the fashion culture transition from the West to Far-East. Therefore multi points of fashion research is very important and the identify about Korean fashion is required in lately for new fashion paradi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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