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1905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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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n Orthodox Church During the Russian Revolutions: Based on Responses of the Parish Bishop Concerning Church Reform (러시아 혁명기 러시아 정교회: 「교회개혁 문제에 대한 교구주교들의 의견서들」을 중심으로)

  • 신동혁
    • Russian Language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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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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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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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Это статья, с точки зрения того, что церковный вопрос был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м и социальным вопросом, посвящена анализу восприятия, позиции и роли православного духовенства в вопросах церковной реформы в ходе революции 1905 года и революции 1917 года. Для этого автор проанализировал «Отзывы епархиальных архиереев по вопросу о церковной реформе», написанные в 1905-1906 годах во главе с епархиальными епископами. «Отзывы» содержали много конкретных предложений по реформированию церкви, таких как реформа системы церковного управления, восстановление прихода и участие духовенства в общественной жизни. Требование реформы было сверху. Тем не менее, царь Николай II отклонил просьбу духовенства. Так как, в то время церковный вопрос был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м и социальным вопросом. Церковь, которая долгое время политически и экономически была зависима от государства, никогда не могла решать самостоятельно. В революции 1917 г. требование церковной реформы было активными снизу. В отличие от того, что приход не сыграл главную роль в написании «Отзывов» во время революции 1905 года, весной и летом 1917 года роль и влияние прихода(причта и мирян), как 'приходская революция', были очень заметны. Его роль и влияние были через различные церковные форумы, в которых они принимали активное участие. Если епархиальные епископы были главными действующими лицами реформаторского движения в Рус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во время революции 1905 года, то во время революции 1917 года причт и миряне прихода были главными действующими лицами реформаторского движения. Таким образом, на волне двух революций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не могла молчать и хотела «свободы в церкви».

역사속 과학인물 - 비날론 개발 '이승기(1905~1996)'

  • Park, Seong-Rae
    • The Science &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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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29 no.4 s.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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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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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지난 2월8일 북한서 91세로 작고한 이승기박사는 '비날론'이란 석탄화학섬유를 연구하여 자체생산을 실현시킨 북한 섬유혁명의 주역이다. 전남 담양서 출생한 이박사는 서울대 공대학장을 지냈으며 1950년 가족을 이끌고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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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ese Students in Tokyo, 1906-1909 (동경의 베트남 학생들, 1906-1909)

  • Jeong, Yeonsik
    • The Southeast Asian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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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24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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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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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1905년에 시작된 베트남 동유운동의 목적은 베트남의 젊은이들을 일본에서 공부시켜 독립과 근대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8년 일본 정부의 강제 출국 조치로 인해 동유운동이 중단됨으로써 목표했던 바를 이루는 데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200여 명의 베트남 학생들이 수년간 유학을 한 결과가 어떠한 형태로든 베트남 근대사에 족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간의 연구는 동유운동을 주도했던 판보이쩌우(Phan Bội $Ch{\hat{a}}u$)에 집중함으로써 학생들의 면면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연구는 당시 일본으로 유학했던 학생들에게 초점을 두어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또한 당시 사회주의 사상 전파의 중심이었으며 아시아 각국의 혁명가들이 집결해있던 동경에서 학생들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떻게 연계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학생들 대부분은 동아동문서원이라는 중국인 유학생 예비학교의 특별반에서 일본어와 기초적인 초등교육 과목을 이수하는 데 그쳤고 단 세 명의 학생만이 군사예비학교인 진무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즉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은 전무했던 것이다. 강제 출국되기까지 그 기간이 짧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임에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유운동 자체가 철저히 준비되고 계획되지 않았던 점도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학생 선발에 대한 규정 없이 기본적으로 누구든지 수용함으로써 학생들의 절대다수가 10대 초중반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독립과 혁명을 위한 인재 양성이라는 취지와 관계없이 다수의 학부모들이 동유운동을 단순히 자녀교육의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입학시킬 학교 섭외조차 되지 않았고, 그 결과 전적으로 일본 내 조력자들의 호의에 의지해 동아동문서원에 설치된 베트남 학생들만을 위한 특별반에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베트남 학생들은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상태에서 외부세계를 경험할 수 없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혁명적 사상을 이해하거나 수용하기에는 부족한 나이였다. 요컨대 동유운동의 실패는 그 기간이 짧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짧은 기간 내에서도 교육의 질적 수준이 낮았다는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에 유학했던 베트남 학생들의 전체 명단은 현재 실종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산발적인 정보를 종합하여 약 20여 명에 관한 성명과 간단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정보와 더불어 추후 더 많은 기록이 발굴된다면 베트남 현대사에서 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Ground of the revolutionary change in early 20C American Mathematics (20세기 초 미국수학계의 혁명적변화의 바탕)

  • Lee, Sang-Gu;Hwang, Suk-Geun;Cheon, Gi-Sang
    • Journal for History of Mathema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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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20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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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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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From 1876 to 1883, British mathematician James Joseph Sylvester worked as the founding head of Mathematics Department at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which has been known as America's first school of mathematical research. Sylvester established the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 the first sustained mathematics research journal in the United States. It is natural that we think this is the most exciting and important period in American mathematics. But we found out that 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held at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 in Chicago, August 21-26, 1893 was the real turning point in American's dedication to mathematical research. The University of Chicago was founded in 1890 by the American Baptist Education Society and John D. Rockefeller. The founding head of mathematics department Eliakim Hastings Moore was the one who produced many excellent American mathematics Ph.D's in early stage. Many of Moore's students contributed to build up real American mathematics research power in early 20 century The University also has a well-deserved reputation as the "teacher of teachers". Beginning with Sylvester, we analyze what E.H. Moore had done as a teacher and a head of the new department that produced many mathematical talents such as L.E. Dickson(1896), H. Slaught(1898), O. Veblen(1903), R.L. Moore(1905), G.D. Birkhoff(1907), T.H. Hilderbrants(1910), E.W. Chittenden(1912) who made the history of American mathematics. In this article, we study how Moore's vision, new system and new way of teaching influenced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at early stage of the top class mathematical research. and the meaning that early University of Chicago case g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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