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측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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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전래된 고려악 나소리(納曾利)와 한국 가면의 조형적 특징 (Formative Characteristics of Nasori(納曾利) Masks in Komagaku (高麗樂) and Korean Masks)

  • 강춘애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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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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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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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에서는 일본의 궁중악무 부가쿠(舞樂) 중 고마가쿠(高麗樂, 고려악)에 속하는 나소리(納曾利, なそり) 가면의 조형적 특징에 주목하여 한 중 일 문화패턴의 전래 및 변용 과정을 살펴보았다. 과거의 가면 연구는 가면 자체의 캐릭터와 관련된 예능적 측면 연구에 중점을 두어 왔다. 반면이 논문에서는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을 통해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문화교류사적인 측면에 대한 시론적 접근을 하였다. 일본에 전하는 대표적인 도가쿠(唐樂) 난릉왕과 고마가쿠 나소리는 한쌍의 답무(答舞)로 공연된다. 난릉왕 가면과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은 매달린 턱(吊り顎)이다. 일본의 오키나(翁) 가면처럼 눈이 'へ'자 모양을 하고 있는 탈은 한국 탈에서 얼굴과 턱을 따로 만들어 붙인 분리 턱(切顎)을 하고 있다. 난릉왕과 나소리 가면의 또 하나의 공통적 특징은 그로테스크한 귀면(鬼面)에 쌍환형의 외곽 원이 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동심원 눈이다. 쌍환형 동심원 눈은 도가쿠 이전의 더 넓은 지역에서 교류, 전파되면서 다양한 신수(神獸) 가면의 유형이 패턴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부가쿠는 민간신앙과 결부하여 신사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전해진 고마가쿠 나소리 가면과 관련된 기록과 유물은 한국에 남아있지 않다. 한국 탈춤에서도 나소리 가면의 쌍환형 동심원과 턱이 분리된 특징이 남아 있는 것은 동아시아 공연예술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연구과제가 된다. 본 논문은 고마가쿠의 나소리 가면의 조형적 특징을 통해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한국 가면과 비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고마가쿠 나소리의 원류를 밝히고자 한 국내의 선행연구에서 난릉왕 대면무(大面舞)가 신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나소리를 신라악으로 보는 근거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연구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데크놀로지 미학으로서의 사진 (The Photography as Technological Aesthetics)

  • 진동선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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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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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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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오늘날 사진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형태인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 앞에 심각한 정체성 위기와 존재론적 딜레마에 봉착했다. 사진은 그동안 우리에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을 제공하고, 또 우리 스스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자각을 주었으며, 나아가 삶의 리얼리티의 본질을 재인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사진의 기능이 오늘날 무력화되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사진은 더 이상 사실의 기록, 결백의 증거, 그리고 리얼리티의 거울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희의 도구 혹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환영과 기쁨을 창조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출현은 이제 비로소 사진의 존재론적 당위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냉정히 돌아보게 한다. 본 논고는 전자시뮬레이션 시대 새로운 이미지 생산의 첨병으로 등장한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적 측면을 규명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인류의 첫 번째 프로그램 미학으로 말해지는 사진과 첨단테크놀로지 미학으로 말해지는 디지털 이미지와의 관계를 기계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특히 올드미디어(사진)와 뉴미디어(디지털) 사이에 갈등 구조를 자본주의 역사관과 물질적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본 논고는 이를 위해 우선 사진의 정체성 위기와 존재론적 위협이 어디로부터 발현된 것인지를 살피고, 또 지금까지 생산된 매체 미학적 담론들이 어떤 비평적 쟁점 속에 놓였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특히 사진이 강점으로 여긴 존재론적 인덱스와 생성론적 텍스트에 주목하여 사진 재현의 기반인 사실적 기록, 명료한 증거, 그리고 기술적 정교성이 어떤 기계미학의 층위에 있는지를 디지털 이미지를 대척에 두고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최근 일고 있는 사진의 죽음, 사진의 종말에 관한 담론들이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올드 테크놀로지로서 사진이 당면한 위기, 즉 현재 사진이 안고 있는 존재론적 위기(컴퓨터화 된 디지털 이미지 출현) 그리고 인식론적 위기(윤리, 지식, 가치관 등 급격한 문화 변동)는 매체미학의 본질상 당연한 위기임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주장을 위하여 역사적으로 사진술이 어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쳤으며, 또 어떻게 지금의 디지털 이미지에 이르게 되었는지 테크놀로지 미학 안에서 자동생성주의로서 색인 이미지, 디지털 코드로서 수치 이미지의 생성, 기원, 본질 그리고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본 논고는 논지의 정당성을 위해 다양한 매체미학자들의 주의주장 및 이론적 쟁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또 분석틀을 통해서 테크놀로지 미학의 근간인 기계, 기술성을 바탕으로 한 사진의 생성적 측면과 문화 안에서 변형된 프로그램에 의해 창조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변형적 측면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렇게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의 양자의 비교를 통해서 테크놀로지 미학 안에서 올드 미디어(사진)와 뉴 미디어(디지털 이미지)의 자리바꿈은 정당한 것이라는 사실과, 이런 역설적인 구조야말로 기계, 기술을 바탕으로 삼는 테크놀로지 매체의 숙명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논문의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본 논고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로서 확증하고, 또 사진에서 부동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모습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사진의 죽음,' '사진의 종말'은 쟁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매체미학의 역사를 간과하는 오도된 비평이라는 사실을 결론으로 도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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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환기 심재 조긍섭의 두(杜)·소시(蘇詩) 화운시 (Hwaunsi(和韻詩) on the Poems of Tu Fu(杜甫) and Su Shi(蘇軾) Written by Simjae(深齋) Cho Geung-seop(曺兢燮) in the Turning Point of Modern Era)

  • 김보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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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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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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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는 근대 전환기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시세계를 화운시(和韻詩)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시에는 화운시 특히 두보(杜甫)와 소식(蘇軾) 시에 대한 화운시가 많다. 이것은 그가 격변의 시기에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시창작에 임했던 중세적 시인이었음을 가늠케 한다. 화운시를 놓고 보았을 때 그의 창작 생애는 대략 40세가 전환의 기점이 된다. 40세 이전에는 두 소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당(唐) 송(宋) 및 명(明) 청(淸) 대(代) 시인들, 우리나라의 이황(李滉) 등 화운의 대상이 폭넓게 나타난다. 40세 이후에는 두 소에 대한 화운은 줄어드는 대신 지역과 관련된 우리나라 인물의 시에 화운하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연령으로는 30대에 지은 것이 가장 많다. 심재는 시재(詩才)의 온전함과 의경(意境)의 통달함을 꼽으며 두보를 '시인의 집대성(集大成)'이라 일컬었다. 그런 인식을 반영하듯이 두시 화운시도 주제와 의경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소시(蘇詩)에 대해서는 그가 따로 생각을 밝힌 바 없으나 일정한 애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에 대한 밀착도는 두시가 소시보다 비교적 더 높게 나타난다. 거칠게 말하면 두보에 대해서는 닮고자 하면서 자기 개성을 찾아나가는 방향이라면, 소식에 대해서는 닮으려 하기보다 계기로 활용해서 자기 의사를 드러내려는 측면이 좀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중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가 화운시를 짓되 일방적인 모방에 그치지 않고 대조와 차이의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주제와 의경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창작의 계기는 공유하되 시 안에 자기 뜻을 기탁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소시 화운시는 전반적으로 원시와의 밀착력이 더 희박한 편이다. 이것은 화운이라는 제약이 많은 창작 방법을 활용하면서도 그에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고 자신의 주제와 개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소시 화운시가 40세 이후로는 별로 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어쩌면 화운시 '안'에서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문학적 현실을 자각한 때문은 아닐까. 예컨대 그는 1919년 소식의 옥중시(獄中詩)를 차운해 4수를 짓고 다시 <구중잡제(拘中雜題)[팔수(八首)]>를 지었다. 이것저것 읊은 이 잡제에는 누구의 운에도 제약되지 않은 그의 복잡다단한 심사와 정회가 다종하게 분출되어 있다. 심재의 화운시는 근대 전환기에 한시의 아비투스가 생존했던 현실과 그 인상적인 생존 방식을 증언해 준다. 화운시 창작은 분명 그의 호고(好古)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나, 이면에는 근대적 문자 변동에 저항하는 심리가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유의할 것은 그것이 두 소시에 대한 일방적인 모습(模襲)과 같은 반동적 방향으로 내닿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계 속에서도 자기 개성과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의미 있게 새길 필요가 있다. 요컨대, 심재의 화운시는, 새로움과 기이함, '근대'라는 이름의 시도에 이목을 붙들렸던 근대 한시사에서 '접혀 있던' 한쪽 얼굴, 그 평면이 아닌 입체로서의 얼굴을 펼쳐 보게 하는 의의가 있다.

한국 유치악 성인의 상악 중절치 위치 및 견치간 거리에 관한 연구 (Position of maxillary central incisor and intercanine width in Korean adults)

  • 양동헌;이지윤;반재삼;오계정;박상원
    • 대한치과보철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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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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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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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연구 목적: 이 연구는 정상배열을 가지고 있는 한국 유치악 성인에서 얼굴형과 성별에 따라 절치유두를 기준으로 한 상악전치의 위치와 견치폭경 계측치를 제시한다. 연구 대상 및 방법: 전남대학교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다니는 학생 중 crowding 및 spacing이 없으며, Angles Class I의 정상 교합관계를 가지고 있는 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선정된 학생들의 두부 측면 방사선 사진을 찍고, posterior facial height (PFH)과 anterior facial height (AFH)을 측정하여 PFH / AFH%를 구하여 cephalic type을 나누었다. 그 후 42명의 상악 모형을 준비하여 버니어캘리퍼스로 상악 중절치 절단연에서 절치 유두 중앙까지의 수평거리(A)와 상악 견치간 거리(B)를 계측, 평균값을 구하였으며, SPSS version 15를 사용하여 통계분석 및 유의성을 검토하였다. 결과: Dolichocephalic type을지닌10명에서A의 평균값은 $8.43{\pm}0.61$, B의 평균값은 $36.73{\pm}2.17$으로 나타났다. Mesocephalic type과 brachycephalic type의경우각각A의평균값은 $8.51{\pm}1.27$, $8.76{\pm}1.03$, B의 평균값은 $35.91{\pm}1.86$, $37.34 {\pm}2.23$로 나타났다. 성별에 따른 계측 결과 남성에서A의 평균값은 $8.86{\pm}1.04$, B의 평균값은 $37.60{\pm}0.24$으로 나타났으며, 여성에서A의 평균값은 $8.41{\pm}0.93$, B의 평균값은 $36.18{\pm}2.01$로 나타났다. A값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큰 값을 보였으나 그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P>.05). B값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큰 값을 보였으며, 통계적으로 유의성을 나타내었다 (P<.05). 결론:한국에서 정상 치열 및 교합을 가진 평균 연령 30세, 42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을 때, 절치유두에서 상악 중절치 절단연까지의 수평 거리는 cephalic type이나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었고, 견치 교두정간 거리는 cephalic type에 따른 차이가 없었지만, 성별에 따라 유의한 차이를 보였으며 남성이 여성보다 큰 값을 나타냈다.

일제강점기 강화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 연구 (A Study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Rock-Carved Seated Avalokiteśvara Statue at Ganghwa Bomunsa Temple)

  • 이주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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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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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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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강화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에 조성된 거대한 규모의 마애불상으로 한국 근대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년명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근대 불교 조각에 대한 연구 부진으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본고에서는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근대기 불상으로서 갖는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기 위해 마애불 주변에 있는 명문을 판독하여 조성 연대와 제작자 및 후원자를 확인하였으며, 바위의 형태와 지형이 불상의 조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작자와 참배객의 시점(視點)을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제작자 후손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불상 조성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파악해 보았다.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제작에는 금강산 승려 이화응(李華應)이 화주(化主)겸 화사(畫師)를 맡았고, 불상 조성이 시작되는 1928년에는 100여 명이 넘는 시주자가 공동으로 후원하였으며, 1937년 참배공간을 확장할 때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단독 후원하였다. 이 마애불 조성을 계기로 강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관음 도량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불상의 제작 기간은 약 3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초(草)는 화주를 맡았던 이화응이 그리고 조각은 운송학(雲松學) 등 다섯 명의 강화 지역 석수가 참여하였는데, 화승이 그린 초를 바탕으로 조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애불 곳곳에서 선묘적 기법이 발견된다. 화사로서 이화응의 면모가 밝혀짐에 따라 석옹철유(石翁喆有)-화응형진(華應亨眞)-일옹혜각(一翁慧覺)으로 이어지는 화맥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은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전형적인 관음보살로 방형의 큰 얼굴에 목이 짧고 전체적으로 투박하여 경직된 인상을 준다. 제작자는 높이 10m에 40°가량 기울어져 있는 바위에 마애불을 왜곡 없이 보이기 위해 최대한 동작을 절제하고 대칭성을 강조하여 세부 표현을 생략하였고, 머리와 신체 비례는 1:1에 가깝게 조정하여 시각적 왜곡 문제를 해결하였다. 특히, 본고에서는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처럼 별도의 불단을 만들지 않는 '불상과 불단의 일체화'된 형식을 근대기 불교 조각의 특징으로 상정하였다. 그 외에 광배에 새겨진 6글자의 범자(梵字)를 그동안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으로 해석했으나,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과 사방진언(四方眞言)이 조합된 것임을 새롭게 밝혔다. 아울러 처마 바위에 박혀 있는 3개의 쇠고리는 제작 과정에서 다림추를 달아 초를 그릴 때 기준점으로 활용하였고, 이후에는 고리에 풍탁을 달아 보살상을 장엄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을 확인하였다.

무왕(武王, 1738-1765) 시기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확장 추이: 제국으로 가는 길, '잠식지계(蠶食之計)'와 '이만공만(以蠻攻蠻)'의 변주 (Territorial Expansion the King Võ (Võ Vương, 1738-1765) in the Mekong Delta: Variation of Tám Thực Chi Kế (strategy of silkworm nibbling) and Dĩ Man Công Man (to strike barbarians by barbarians) in the Way to Build a New World Order)

  • 최병욱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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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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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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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베트남이 메콩 델타로 영토를 팽창하는 역사 속에서 완거정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현재 베트남 영토 내에 있는 메콩 델타 거의 전부를 획득하는 데서 그의 공헌이다. 또 하나는 베트남 역사를 읽는 독자들의 눈을 현재의 베트남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그의 역할이다. 독자들에게 완거정의 메콩 델타 획득은 베트남 남진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그러나 완거정의 업적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이 연구는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팽창 추이에서 완거정 보다 무왕에 주목한다. 무왕의 목표는 완거정의 공헌에 의해 성취된 영토 획득보다 더 야심적이었다. 그리고 이 야심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국제 질서를 건설한다는 그의 꿈에 의해 추동된 것이며, 그가 건설한 수도 푸쑤언은 이 새 국제 질서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그는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자는 세 가지의 요소를 검토하고 있다. 첫째는 무왕 왕권의 성격이다. 두 번째는 메콩 델타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셋째는 새로이 무왕의 판도로 편입된 땅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북부 홍하 델타에 근거한 레 황실의 신하를 자처하던 선대 지배자들의 태도와 결별하면서 무왕은 즉위한 지 6년 뒤인 1744년 자신이 왕임을 선포했다. 행정 조직이 개편되었고 의복과 풍속도 북부의 것을 버리고 남국의 것을 제정하였다. 무왕은 캄보디아, 참파, 수사, 화사, 만상, 남장 등 조공국도 충분히 확보했다. 레 왕조와 비교해 이 조공국의 숫자는 더 많았으며 19세기 대남 제국의 조공국 수와 맞먹었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무왕이 실제로 원했던 자리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음을 지적한다. 비록 무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을 천왕이라고 칭함으로써 통상적인 왕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캄보디아 왕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참족을 공격한 게 무왕에게는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무왕은 이 참족이 자신의 신복이라 여겼다. 왕은 그들이 자신의 판도 내에 있는 참 즉 순성진 참인의 일부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무왕은 1750년에 캄보디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동시에 그는 태국왕에게 외교 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캄보디아가 자신의 배타적 조공국임을 천명했다.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메콩 델타에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무왕은 푸쑤언을 새로 건설해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권력중심지로 삼았다. 인플레이션, 기근, 경제 왜곡 등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면모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무왕의 메콩 델타 진출 이유라고 이야기되어 온 이런 경제적인 측면보다 제국 건설자로서 무왕이 보이던 적극적 정책에 더 관심을 가지며 이런 정책에 기초한 영토 팽창의 욕구가 메콩 델타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754년부터 3년 동안 현재 베트남의 영토에 해당하는 메콩 델타 대부분이 무왕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완거정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무왕이 차지하고자 한 영역의 범주는 여기에 더해 메콩 오른편에 해당하며 현재의 사이공보다 위쪽에 있는 껌뽕짬, 프레이비엥, 스바이리엥을 포괄했다. 많아진 조공국의 수에 걸맞게 제국의 영토는 넉넉히 확대되어야 했다. 무왕의 전략은 '잠식지계'와 '이만공만'의 변주곡이었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무왕은 하부캄보디아에 해당하는 델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이는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게 일반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무왕의 최종적 목표는 위에서 언급한 메콩 델타 세 개의 주까지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다 먹어치운다'는 건 '잠식'의 또 다른 의미이자 적용이었다. 무왕은 현 롱안 지역으로부터 쩌우독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참인을 이용해 캄보디아를 쳤다. 이것은 '이만공만'의 표준적 적용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막씨가 관할하던 중국인 망명자들을 이용해 하띠엔과 그 주변 지역을 캄보디아 왕으로부터 취했다. '이만공만'의 또다른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9세기에 출현할 응우옌 왕조의 제국 질서 뿌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주장한다. 제국 질서는 홍하 델타에 근거한 대월 제국 왕조들의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푸쑤언에 앉은 무왕의 신 세계질서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만공만'과 '잠식지계'는 무왕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유용했다. 그의 손자인 쟈롱은 타이, 크메르, 라오, 중국인, 산지민, 유럽인 같은 '만'을 이용해 또다른 '만'인 '떠이썬 도적떼(西賊)'를 이겼다. 떠이썬에는 수많은 중국인 및 중국 해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참인, 산지민이 있었다. 무왕의 증손자인 민망 황제는 화려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캄보디아와 참 영역을 몽땅 먹어치우면서 영토 확장에도 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