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충렬왕(忠烈王)

검색결과 5건 처리시간 0.022초

1284년 충렬왕(忠烈王), 원성공주(元成公主) 발원 금자대장(金字大藏) 『백천인다라니경(百千印陁羅尼經)(합부(合部))』의 서지적 연구 (A Bibliographical Study of Golden Manuscript Baegcheonin-dalanigyeong, Manufactured from Chunglyeol-King & Wonseong-Princess in 1284)

  • 남권희;석혜영
    • 서지학연구
    • /
    • 제74호
    • /
    • pp.261-310
    • /
    • 2018
  • 이 연구는 고려시대 충렬왕대(忠烈王代)에 조성된 금자대장(金字大藏) 중 최근 확인된 『백천인다라니경(百千印陁羅尼經)(합(合)4경(經))』에 대한 소개와 서지적 분석을 시도하고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금은자대장(金銀字大藏)들의 함차를 비교, 검토하여 그 계통을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자료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年)(1284)에 국왕(國王)과 궁주(宮主)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발원에 의하여 제작된 금니(金泥)로 쓴 사경(寫經)이다. 둘째, 이 금자사경(金字寫經)은 '경(景)'자의 함차(函次)가 표시된 대장경(大藏經)의 일부이며 수정축(水晶軸)을 가진 권자본(卷子本)의 형태로 전체는 9장의 연결이며 감지(紺紙) 바탕에 금니(金泥)의 테두리와 계선(界線)을 긋고 한 행에 17자를 기준으로 간혹 16-18자의 출입이 있다. 셋째, 수록된 경전은 4종이 합본되어 있는 형식으로 『백천인다라니경(百千印陁羅尼經)』, 『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救面然餓鬼陁羅尼神呪經)』과 『불설감로다라니주(佛說甘露陁羅尼呪)』 7행, 『장엄왕다라니주경(莊嚴王陁羅尼呪經)』, 『향왕보살다라니주경(香王菩薩陁羅尼呪經)』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 넷째, 표지(表紙)의 이면(裏面)에 충렬왕(忠烈王)의 2번째 개명한 휘(諱)인 '춘(賰)'자가 붉은 색 수결로 있고 나란한 위치에 '원성전(元成殿)' 즉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기록과 '봉인(封印)'이란 파스파문자가 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궁주(宮主)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으며 국왕의 수결(手決)과 궁주(宮主)의 인장(印章)은 처음 확인되는 것이다. 다섯째, 표지화(表紙畵)와 신장상(神將像)은 13세기 후반의 다른 금은자사경(金銀字寫經)과 유사하고 특히 신장상(神將像)을 그린 화원(畫員)의 이름인 '정(鄭)〔익우(益迂)(추정)〕'란 기록이 그림의 우측 하단에 있다. 특히 신장상의 표현은 다른 사경과 비슷하지만 지물(持物)을 잡은 자세가 각각 다르다. 여섯째, 권말의 발원문(發願文)과 필사기(筆寫記)는 다른 금자대장(金字大藏)과 문장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표기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또 이 사경을 직접 쓴 인물은 최정(崔楨)으로 사료 등에서 그 인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음직(蔭職)의 하위 직급을 받은 글씨를 잘 쓰는 젊은 사람인 까닭에 사경작업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곱째, '경(景)'자의 함차와 4종(감로수다라니(甘露水陁羅尼) 포함) 경전의 수록 내용은 방산석경(房山石經)과 『신집장경음의수함록(新集藏經音義隨函錄)』 제9책의 '경(景)'함에 포함되어 있어서 거란장(契丹藏)의 순서와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4종 경전이 조성금장(趙成金藏),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에서는 '고(羔)'함에 포함되고 경전의 배열순서도 본 사경과는 역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세부적인 표기나 이체자(異體字) 등에서도 특징적인 요소를 지닌 귀중한 자료이다.

불완비 정보하에서 자유계약선수의 연봉 계약에 관한 연구 (Salary Contracts of Free Agent Players Under Incomplete Information)

  • 양충렬;왕규호
    • 노동경제논집
    • /
    • 제38권4호
    • /
    • pp.83-107
    • /
    • 2015
  • FA제도는 일정 기간 동안 한 구단에서 뛴 선수에게 타 구단과의 자유로운 연봉 협상을 통해 팀을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FA을 통한 천문학적인 연봉계약은 때로 금액에 비해 성과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FA 먹튀 논쟁이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본 연구는 양충열 왕규호(2013)의 모형에 불완비 정보를 추가하여 신호모형을 이용해 FA 먹튀의 존재 가능성을 분석하였다. 분리균형(separating equilibrium)에서는 타 구단이 선수의 생산성을 완벽하게 추론할 수 있어, 먹튀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먹튀는 합동균형(pooling equilibrium)에서만 발생한다. 본 연구는 먹튀가 발생하지 않는 분리균형은 존재하지 않음을 보였다. 또한 적절한 조건 하에서, 특히 강한 보상제도하에서 유일한 합동균형이 존재함을 보였다.

  • PDF

조선초기 귀화인(歸化人)의 사향(賜鄕)과 특징 (A Study on the Sahyang and Characteristics of Naturalized Citizens in Early Chosun)

  • 임선빈
    • 동양고전연구
    • /
    • 제37호
    • /
    • pp.63-91
    • /
    • 2009
  • 본 논문은 귀화인(歸化人)(향화인(向化人)) 가운데 조선초기 실록기사에서 사향(賜鄕)[왕으로부터 관향(貫鄕)을 하사받음]이 확인되는 인물들의 사향 과정과 활동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초기 실록을 통해 검토 가능한 사향(賜鄕) 사례는 한인이 4명[오진(吳眞), 이민도(李敏道), 당성(唐誠), 매우(梅佑)]으로 다수이지만, 서역에서 온 회골인(回?人)[위그르인, 설장수(?長壽)]과 외오아국(畏吾兒國) 출신[이현(李玄)]도 있으며, 향화(向化) 왜인(倭人)도 2명[평순(平順), 피상의(皮尙宜)]이나 된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조선 정종 원년까지 걸쳐있으며, 귀화한 인물은 관향을 하사받은 인물의 증조, 조, 부, 본인 등 다양하다. 이들의 사향 시기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조이며, 하사받은 관향은 계림(鷄林) 임주(林州) 해주(海州) 상주(尙州) 밀양(密陽) 충주(忠州) 창원(昌原) 동래(東萊) 태안(泰安) 등으로 전국에 걸쳐 있다. 사향지(賜鄕地)는 처향(妻鄕)일 가능성이 높다. 관향(貫鄕)을 하사받은 인물은 역관(譯官)이 다수로 대명외교(對明外交)와 대일외교(對日外交)에 많은 공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외에 의술(醫術)과 점술(占術), 율문(律文)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다. 과거급제를 한 설장수는 지공거(知貢擧)도 담당했으며, 이민도와 당성은 조선 개국에 기여하여 개국공신과 개국원종공신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실적이 있었기에 왕으로부터 관향을 하사받는 사향(賜鄕)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향의 영광을 입은 관향이지만, 현재 임주 이씨, 창원 평씨, 동래 피씨 등은 그 후손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귀화(歸化) 한인(漢人)의 후손은 모두 현존하지만, 향화(向化) 왜인(倭人)의 후손은 단절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대외인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경은(寫經院)과 염승익(廉丞益) 발원(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 (A Study on the set the seven roalls of the Saddarma Pundarika Sutra Prayed by Yeom Seong-Ik and Script Center)

  • 권희경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 /
    • 제3권1호
    • /
    • pp.1-21
    • /
    • 2003
  • 사경은 남계원(南溪院) 석탑의 출토품으로 1915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개성시(開城市)의 덕암동(德岩洞)의 원 위치로부터 경복궁으로 옮길 때 발견된 감지은니사경(紺紙銀泥寫經)의 염승익발원(廉丞益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는 권자본(卷子本)으로 세로 31.1cm이며, 표지화와 변상화(變相畵)가 안팍을 이루고 있는데 폭은 27.2cm이다. 이 사경은 또한 1행 14자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표지화 변상화의 양식과 더불어 고려국왕별원 금 은자사경의 양식과 같다. 이 사경을 발원한 인물은 충렬왕대의 권신이던 염승익이다. 염승익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기인을 동원하여 지은 자신의 집을 대장경사경소(大藏經寫經所)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사경은 염승익이 자신과 그 일가권속의 복락을 빌기 위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부 1부를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하고, 충렬왕(忠烈王) 9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수리할 때 탑에 함께 봉안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경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처럼 금자대장소로 내놓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금자대장소란 장소적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금경사와 더불어서 금자원과의 차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경이 충렬왕대 고려국왕발원 금 은자사경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개인발원사경이라 할지라도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금자원(金字院)(혹은 은자원(銀字院))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이러한 점을 통해 남겨진 기록들과 발문을 중심으로 사경원 금 은자원의 성격을 밝히는데 힘썼다.

고려 왕실의 연례 문화와 청자 주기(酒器)의 상징적 의미: 왕권과 주기(酒器) (Sovereignty and Wine Vessels: The Feast Culture of the Goryeo Court and the Symbolic Meaning of Celadon Wine Vessels)

  • 김윤정
    • 미술자료
    • /
    • 제104권
    • /
    • pp.40-69
    • /
    • 2023
  • 본고는 조형적으로 일반 그릇과 차별화되는 청자 주기의 형태에 주목하여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조형적 상징성과 시기별 조합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서 확인되는 국왕의 재위별, 연례의 유형별 설행 횟수와 설행 목적을 통해서 청자 주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왕실 연례는 군신(君臣)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유대감을 구축하는 왕권 강화의 수단이자 왕의 업적과 성덕을 찬양하여 국왕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는 통치 행위이기도 하였다. 왕실 연례의 설행 횟수는 실제 왕권 강화를 시도했던 예종대(1105~1122), 의종대(1146~1170), 충렬왕대(1274~1308), 공민왕대(1351~1374)에 늘어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왕실 연례의 설행이 급증하고 연례 문화가 바뀌는 예종대와 충렬왕대를 기점으로 청자 주기의 기종 및 조형이 변화하는 상황에 주목하였다. 연례에서 국왕과 신하는 다양한 음주 행위를 통해서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거나 태평한 시절을 찬미하였기 때문에 술을 담고 따르는 주기의 조형은 시각적 상징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연례에서 음주 방법은 국왕이 신하에게 또는 신하가 국왕에게 직접 술을 따르기 때문에 주자와 잔의 조형은 참석자들에게 시각적으로 큰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12세기에 신선, 난(鸞), 귀룡, 어룡, 호로병 등의 도교적 소재나 황촉규와 같은 유교적 소재가 청자 주자와 잔으로 조형화되는 현상은 국왕에 대한 송축(頌祝)과 충성,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연례의 목적이 시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연례에서 부르는 헌선도(獻仙桃)나 환궁악(還宮樂)의 내용이 청자 주기의 조형과 일치하는 점이 주목되었다. 연례에서 사용하는 당악(唐樂)의 가사는 국왕의 불로(不老), 난로(難老), 장생(長生)을 기원하고 왕업의 번창과 태평성대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가사 내용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인물형 주자>나 시카고미술관 소장 <청자 승난인물형 주자> 등의 조형에 반영되었다. 주기의 조형에 연례 문화의 일면이 시각화된 사례는 고려청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주기의 조합은 연례의 분위기나 술의 종류에 따라서 시기별로 변화를 보인다. 고려가 몽골제국으로 편입된 이후에 새로운 술이 유입되고 연례 문화가 변화하면서 주기의 용도와 조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충렬왕대부터 원 황실의 영향으로 왕과 공주가 함께 연례를 개최하거나 몽고식 연회인 보르차연[孛兒扎宴]이 열리고 몽고 여인들이 쓰는 고고관(姑姑冠)을 쓰고 연회를 여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충렬왕대에 연례 문화가 변하기도 하지만 설행 횟수가 132회로 급증하는 것은 원 황실 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왕권 강화의 측면도 있다. 급증한 연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포도주, 동락(湩酪), 소주 등의 새로운 술과 함께 고족배(高足杯), 옥호춘병, 이(匜), 용두잔 등 신기종의 청자 주기가 등장하였다. 새롭게 나타난 청자 주기는 모두 원 황실이나 몽골제국의 일원인 칸국에서 사용된 금속기 등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이다. 고려 후기에 청자 주기의 변화는 기존 연구보다 시야를 확대하여 유라시아 일대에 위치했던 칸국들의 잔치 모습이나 주기와 비교하여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전에 없었던 고족배, 이, 용두잔, 옥호춘병 등 새로운 형태의 주기가 유입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맞춰서 청자 주기의 조합과 용도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청자 주기는 공간적, 지리적으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고려와 몽골제국의 칸국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본고는 청자 주기와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련성을 조명하였지만 이는 고려청자의 용례를 연구하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관점에서 청자의 사용처와 사용례를 밝히는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 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