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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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의 회화이미지와 실재의 확장 : 라깡, 지젝, 그리고 윌버 (Rothko's Painting-Image and the Expansion of the Real: Lacan, Zizek, and Wilber)

  • 배철영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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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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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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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먼저 로스코의 회화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지젝은 로스코의 그림들을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 사이에서 거리를 유지하려는 화가 내면의 투쟁의 표현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로스코의 마지막 회화는 이 균형이 무너져 실재가 현실을 삼켜버려 그가 자폐적 공간에 점점 빠져드는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지젝의 해석은 앞의 두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젝은 라깡에 의존하여 이 개념들 및 그림과 실재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우선 라깡의 그림 이론, 그리고 '대상 a'와 '실재'의 연관에 대해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라깡은 주체 중심의 시각이론을 비판하고 주체가 오히려 외부의 응시에 의해 구성되는 그림의 일부가 되는 시각이론을 펼친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상징적 질서로써는 접근할 수 없는 부재가 존재하고 그를 메우는 얼룩, 왜상 등이 존재한다. 라깡은 이것을 응시 너머에 있는 대상 a와 연결지운다. 그리고 대상 a는 다시 실재와 연관된다. 곧 대상 a로서 실재는 상징화에도 불구하고 남게 되는 실재의 잔여, 곧 상징적 질서 속의 공백, 결여인 동시에 그 부재를 덮어씌워 가리는 것이다. 우리는 외상, 얼룩, 왜상 등을 통해 실재의 구체적 속성을 가정할 수 있으니 원초적 향락과 죽음충동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라깡적 실재의 난입으로 상징적 현실이 허물어지고 자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 주체에게는 현실 내의 어떤 내용으로써도 대응할 수 없는 무의미나 허무가 밀어닥친다는 지젝의 지적은 적절하다. 그래서 그에게 주체의 진정한 정체성은 '텅빔'이다. 그러나 이어 윌버가 제시하는 의식의 수준들에 대한 구분을 참조함으로써 지젝적 공허가 그 수준들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검토한 다음, 공허 혹은 텅빔의 체험에도 자아가 어느 수준에 고착해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끝으로 로스코의 회화이미지는 실존적 자아의 한계에, 즉 자아와 자아초월 사이의 경계에서 어떤 울림을 발산하고 있으며, 그래서 명상적 순간과도 이어진다. 말하자면 라깡적 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어떤 양태에 대해서도 그 속에 함몰되어 잠겨버리지 않고 오히려 주시하여 포옹하고 넘어서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궁극에는 라깡적 실재조차도 무화되는 곳, 곧 또 다른 텅 빔, '공(空, Emptyness)'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것 역시 실재(R3)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것 역시 상징적 질서로써는 표현할 수 없고 의미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적 질서에 의해 표출되지만 또한 그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실재는 라깡적 실재와는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전언어적인 비규정적 사물도 아니며, 자아를 와해시켜 비극적 퇴행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실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실재는 초언어적이고, 자아의 지대를 넘어서 있는 열린 공간과 연관된다. 이제 로스코의 회화에서 우리가 관조적 명상에 자연스럽게 이행되는 것은 단순히 현실 속에서 새로운 다른 위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라깡적 주체를 초월하고자 하는 다른 추동력, 곧 고통 속의 자아를 넘어서려는 자아초월적 충동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상적 관조가 자아초월적 충동에 의해 유발되는 초월의 매개이자 수단이다. 이 매개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경계를 넘어선 자아초월의 지대로 들어서게 되고 종국에는 궁극의 텅빔, 공에 이른다.

지젝과 기독교 (Zizek and Christianity)

  • 류의근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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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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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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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지젝의 기독교 해석을 이해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대안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젝은 기독교가 그 핵심을 파고 들면 무신론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의 무신론적 기독교는 기독교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그의 기독교 해석은 자본주의 투쟁의 이론적 실천으로 수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 해석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중 참여적 해석을 강조하고 희생적 해석을 소홀히 한다. 진실을 말하면, 참된 기독교는 참여적 해석과 희생적 해석의 동시적 수행을 기반으로 한다. 그의 기독교 해석은 한 편으로는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계시하는 것을 겨냥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이해에 기인한다. 사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희생적인 해석으로부터 시작한다. 희생적 해석이 없다면 참여적 해석도 없다. 지젝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고 특히 예수의 죽음의 속죄 기능과 효력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이 점만 보완된다면 기독교는 여전히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 대안으로서 기독교 자신의 전복적 핵심인 바, 급진적이고 해방적이며 체제 저항적인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의 회복과 활성화는 지젝의 이교 기독교가 아니라 정통 기독교를 통해서 가능하다. 다만, 그 입증 책임은 투쟁하는 유신론자의 몫이다.

탈근대 주체의 불안과 강박적 반복: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 읽기 (Postmodern Subject's Anxiety and Obsessive Repetition in Paul Auster's Leviathan)

  • 하상복
    • 미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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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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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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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Paul Auster's Leviathan according to Slavoj Žižek's theory. Analyzing the characters in Leviathan, this paper chiefly discusses the postmodern subject's anxiety and obsessive repetition that the lack of the big Other led to. Section II explains the disintegration of the big Other and the subject's anxiety and obsessive repetition by the interpretation of the characters: Peter Aaron, Maria Turner, and Benjamin Sachs. Aaron wants to write on Sachs's life to overcome his uneasy subject's condition, and to establish the consistent and whole world. But his writing fails to meet his desire, owing to uncertainty of his understanding, and the incompleteness of his writing. In case of Maria, her uneasy subject's condition led to her obsessively repetitive picture-shooting herself and others, which proved to be a meaningless struggle for filling the void of the big Other and herself. Although Sachs already knows the lack and inconsistency of the big Other, he also repetitively tries to establish the consistent and whole Other. In Section III, this paper examines Sachs's terror as he struggles for the preservation of the big Other. His extreme striving also fails to reestablish the big Other as it loses its symbolic effectiveness in the postmodern era because he does not grasp the big Other as an empty Symbolic order, and rejects the premise of the big Other itself.

법/초자아에서 사랑으로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에 나타나는 법, 폭력,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 (From Law/Superego to Love: Law, Violence, and the Possibility of Love in Herman Melville's Billy Budd, Sailor)

  • 정진만
    •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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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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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7-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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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essay aims to explore Herman Melville's recognition and resolution of the vicious link between law and violence in his posthumous Billy Budd, Sailor (1924). In order to investigate the issues, this essay refers to Freud, Benjamin, Derrida, Lacan, and Žižek, all perceptive to the uncanny affinity of law and violence. Especially, Žižek's arguments of "superego" as an embodiment of cruel and destructive violence supplementing the official law and of "love" as an ethical possibility beyond the limit of the problematic law are introduced in this study to make Melville's reflection of the inseparableness between law and violence much clearer. John Claggart and Captain Vere embody the legal (superegoic) violence. Claggart even procurs secret enjoyment, in the name of maintaining positive law. Billy Budd discloses another violence defending his justness according to natural law. However, Melville suggests the possibility of suspending the problematic tie of law/violence through "love," as portrayed at the last part of the story. The two final words from Billy and Vere, as a sort of delayed dialogue between them after the event of their secret interview before Billy's hanging, suggest that they finally distance from the obscene nightly law of superego-respectively from outward punitiveness toward Vere and from inward punishment for Vere's excessive enforcement of Billy's hanging-and identify each other's lack as their own. Their love implicated in the last words is for the real other-in Lacan's sense-who discloses the constitutive lack or incompleteness of beings and aporia of the law. This essay's examination of Melville's representations about the superegoic violence as the (im-)possible condition of law and the possibility of withdrawing from it would help us recognize Billy Budd, Sailor as the author's own last word for the possible vision of love cutting the vicious knot of law/violence.

라캉주의 영화비평에서 봉합이론의 재고찰 (Revisiting the Concept of Suture in Lacanian Film Criticism)

  • 김지영
    •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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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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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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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paper aims at reconsidering 'suture,' a key concept in early Lacanian film criticism, with a view to narrowing a supposed gap between early Lacanian and later Lacanian film criticism. Early Lacanian film theorists, among whom Jean-Pierre Oudart, Jean-Louis Baudry, Laura Mulvey and Daniel Dayan, to name a few, are prominent, focus on cinematic signifying system as well as its ideological effects on shaping subjectivity of the audience. Initiated by Jacques-Alain Miller's article on suture as the logic of signifier and grafted into film as the logic of the cinematic by Oudart's writing, the concept of suture was established as a key word in early Lacanian film criticism. In their taxonomy, suture refers to the processes by which the audience are stitched into the story-world of a film. The audience are drawn into the film and take up positions as subjects-within-the-film such that they make sense of and respond to what the film represents as they are encouraged to do so by the film itself. On the other hand, later Lacanian film critics, who are much influenced by Lacan's later emphasis on the Real, focus on concepts such as gaze, petit objet a, fantasy, rather than suture. They are more concerned with the failure of suture and the disruption of the Symbolic than the ideological effects of suture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Symbolic. They require a break from the previous approach of Lacanian film theory which centers around the Imaginary and the Symbolic. However, early Lacanian and later Lacanian film theory do not manifest as much disparity as they are supposed to do, for both are against the ideological manipulation of suture. Slavoj Žižek, a leading scholar of later Lacanian psychoanalysis, revives the concept of suture as a patch of the Symbolic which covers the gap, if not always successful.

'정신은 뼈다'와 무한 판단의 문제 ('The Spirit is the bone' and the problem of the infinite judgement)

  • 이종철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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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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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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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의 '관찰하는 이성'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정신은 뼈다'라고 말하고, 이것이 '무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본 연구는 이 판단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특별히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는 "정신현상학" '이성' 장에서 등장하는 '정신은 뼈다'는 판단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하고 비교 검토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정신현상학"에서 이 판단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둘째는 '무한 판단'의 의미와 관련한 칸트와 헤겔의 해석 차이를 살피고자 한다. 헤겔은 분명히 칸트가 말할 때의 '무한 판단'의 형식(S는 비(非)P)을 넘어 내용상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크다. 헤겔이 이처럼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내용상으로 확장하려한 이유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헤겔이 말하는 무한 판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은 단지 "정신현상학"에 한정하지 않고 "엔치클로패디"와 "대논리학"의 '현존재의 판단'에 나오는 '무한 판단'의 의미도 고려하고자 한다. 셋째, '정신은 뼈다'는 판단과 무한 판단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 중 특별히 이 문제를 정신분석학과 연관 지은 지젝의 해석에 주목한다. 우리는 주로 그의 해석을 검토하면서 그것이 칸트와 헤겔의 무한 판단의 의미를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