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지리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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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연구 서설

  • 서수인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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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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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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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 이 글에서는 다음의 내용을 다루었다. 1. 과학적 지리서로서의 택리지의 구성 2. 택리지에 전개된 지인상관론 3. 택리지가 지리학사에서 자리잡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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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에 관한 연구자료

  • 형기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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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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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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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 20세기전반의 지리학은 고도로 분화되고 그 응용면에 있어서도 상당한 노력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그 연구방법도 다채로운 자료를 시사함은 물론이다. 지리학사에 관심을 갖다보니 한국에 관한 고지도의 자료수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수에 있어서나 그 종류에 있어서 실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이며 그 부분이 사장된채 남아있음을 알게되었다.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한 연구의 일단면이지만 관심있는 학도들을 위해서 각종자료를 찾아보기 쉽게 제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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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 . 역사지리학 50년의 회고와 전망 (An inventory and prospect on the half a century of cultural and historical geography in Korea)

  • 류제헌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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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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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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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한국의 문화-역사지리학계에서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이 분야는 문화지리학, 역사지리학, 지리학사, 사회.경제사, 문화사, 인류학, 조 경학 등의 여러 가지 학문분야를 망라하는 학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에서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이 주요 학술지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1960년대 초이며, 1970년대에는 이 분 야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는 한국의 문화-역사지리학이 양적으로 나 질적으로 일대 비약을 가져온 시기이며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한국의 문화-역사지리학은 더욱 전문 화되어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학문분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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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의 기학적 지리학과 지리연구방법론 (Han-Ki Choi's Chi-hak and Geography)

  • 최원석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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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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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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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최한기는 지리를 지지 및 지도, 지구, 지기(地氣), 풍수의 포괄적인 범주로 인식하였고, 지리에서 지도와 지지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최한기의 학문적인 목적은 기화(氣化)의 체인(體認)을 통해서 천도(天道)를 규명하고 인도(人道)를 밝혀 이상적인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구현하기 위함이었고, 그의 지리학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실학으로서의 구체적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최한기는 지리에 대한 이해의 확충을 통해서 인도(人道)를 밝히는 것을 지리학의 연구 의의로 삼았고, 지리와 사람의 교섭을 중시하여, 지리학의 토대이자 연구목적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적인 본질을 강조하였다. 최한기의 기학 체계는 지리학에 기초하여 성립되었고, 역으로 최한기의 지리학은 기학적 토대에서 이루어졌다. 지지학 지기학 지구학은 기학적 지리학을 달성하기 위한 계통적 체계로 구성되었다. 한국지리학사에서 최한기의 위상은 조선시대의 지리학적 전통과 서구 근대지리학의 성과를 포괄적으로 잇는 가교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창적인 학문체계의 구성은 한국적 지리학의 정체성 수립에 한 지침이 될 수 있는 이정표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최한기의 지리학적 정체성은 지지학 지기학 지구학의 삼자가 기학적인 바탕에서 상호 통합된 체계를 갖춘 것으로서, 그의 지리학적 비젼은 근대서구지리학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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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학과.연구소를 중심으로 본 중국지리학사: 1909~1978 (A Study on the History of Geography in China: 1909~1978)

  • 이강원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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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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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7-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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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논문은 중국지학회 창립(1909년)부터 개혁개방(1978년) 무렵까지 중국 지리학의 역사에 대해 주로 학회조직, 대학의 학과,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중국지학회, 우공학회, 중국지리학회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창설된 지리학 관련 학회였다. 이 학회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지리학회로 통합되었다. 1921년 중국 최초의 지리학과가 주커전(竺可楨)에 의해 난징의 둥난대학(난징대학)에 창설되었다. 이후 중산대학, 저장대학, 칭화대학, 베이징사범대학 등에 주로 '지학(地學)' 또는 '사지(史地)'라는 명칭 하에 지리학 전공이 설치되었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1958년까지 소련식 지리학의 도입을 통한 활성화가 모색되었다. 1950년대 초 학회와 대학 학과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있었으며, 베이징대학 지질지리학계를 비롯한 지리학 관련 학과들과 중국과학원 지리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50년대 중국의 지리학은 농업생산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지리학과 경제지리학 위주의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58년 대약진운동 이후 1978년 개혁개방 무렵까지 중국지리학은 침체상태에 있었다. 개혁개방은 중국 지리학에 새로운 기회이자 위기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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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상지의 이론적 고찰과 분포특성 (The Theoretical Study and Distributional Characteristics of Alluvial Fans in Korean Peninsula)

  • 사이토쿄지;황상일;다나카유키야;오구치다카시;윤순옥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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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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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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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산록에 있는 선형의 완사면이 페디멘트인지 선상지인지에 대한 주제는 한국 지형학사를 통하여 오랜 기간 논의되어 왔다. 결국 페디멘트 연구자들에 의해 그동안 선상지의 존재가 부정되면서 선상지 용어사용 및 선상지 연구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지형형성기구 및 프로세스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을 기초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론 정립이 요구된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선상지가 부정되었던 쟁점들을 논의하고, 검토하여 한반도 선상지 연구에 보다 정회한 이론적 지표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선상지와 비교하기 위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13개의 선상지를 선정하고 지형면의 분포특성을 고찰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리인식(地理認識)과 문인(門人)들의 지지편찬(地誌編纂) 의의 (Yeoheon's Recognition of Geography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ompilation of Geographical Records by His Disciples)

  • 최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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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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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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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여헌 장현광(1554-1637)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 우주론과 자연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이다. 조선조 유학의 지리적인 학맥에서 여헌은 남명 조식과 한강 정구의 학풍을 이어받으면서 풍수와 지지편찬을 계승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여헌은 주자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역학(易學)의 기틀을 견지하였으며, 사변적인 공리공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용적 경세학(經世學)으로서의 지리를 인식하였다. 여헌의 지리인식 방법은 역학(易學)의 체계와 구도 상에서 이루어졌다. 여헌은 자연에 대한 인간 본위(本位)의 인식태도를 드러내며, 따라서 인사의 공능이 지리의 조건보다 우선되는 준칙이었다. 여헌에게 산수와 자연은 비덕(比德)의 공부대상이었고, 자연공부 방법은 대상물의 관찰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자득하고, 무심한 경지를 통해 천지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여헌에게 있어서 낙토(樂土)는 안분자족(安分自足)함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여헌에게 지리인식의 의의는 생활의 실용적인 이익 됨에 목적을 둔 필수적인 지식정보였다. 여헌은 은거지의 생활현장에 자신이 견지한 유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우주사업'의 일환으로 구현하였다. 이러한 의식과 태도는 주거지의 장소경관과 자연경물(自然景物)을 북극성과 주위 28수의 별자리로 상징화하여 명명하고 우주적 중심 공간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에서 비롯된 유학자들의 동천구곡(洞天九曲) 전통은 조선시대에 유행되었지만, 여헌의 장소 구성 체계는 여타의 형태와 방식을 뛰어넘은 우주적 구도의 독창성이 있다. 여헌의 장소 명명 의식에는 선현을 본받고자하는 태도, 자연물의 형용과 성정에 대한 비덕(比德), 그리고 은거(隱居) 의식의 반영이 나타난다. 여헌의 국토관 및 국토이해는 지형개관, 산수이해, 도읍입지, 지역이해, 풍토론, 현실인식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지리적 조건과도 비교되어 파악되었다. 그의 국토인식과 이해방식은, 국토의 유기체적인 인식, 주자학의 자연관이 반영된 기적(氣的)인 국토인식, 산천 인식과 도읍 입지의 풍수적 이해, 지역구분을 통한 비교론적 이해, 인물과 풍속에 대한 풍토론적 이해 방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헌은 역의 포괄적인 사상체계 범주에서 풍수도 수용하였다. 그가 풍수를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명과 한강을 계승하는 학풍에서 연유되는 바가 있었다. 여헌은 풍수지식을 활용하여 주거지의 입지를 정하기도 하였고, 고향 연고지의 여러 곳에 대해 풍수적 견지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풍수관을 보면, 묘지풍수에서 형세론적 이치는 수긍하고 있지만 장례기일을 미루는 발복 목적의 행위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풍수에서 숲의 조성을 통한 비보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풍수관은 문도(門徒)들의 지지편찬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여헌 학풍에서 주목할 만한 지리학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지(地誌)의 편찬이다. 이것은 남명과 한강의 치용(治用) 정신과 경세적(經世的) 실천을 계승한 학풍이기도 했다. 여헌은 지지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면서 문인들에게 편찬을 독려하였다. 고을의 통치자나 지식인으로서 지역의 역사와 옛 일을 잘 알아야하고, 권면하고 징계하는 기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헌의 견해는 이후 문인들의 지지편찬 취지와 내용 구성에 지침이 되었다. 이 연구는 여헌의 지리인식에 관한 사실적인 면모의 정리와 지리적 학풍의 계승 맥락에 관한 고찰에 그친 한계가 있다. 다음에는 여헌 전후 유학자들의 지리인식과 지지편찬 전통이 어떻게 전승되면서 전개 발전되었고 질적으로 변천해 나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학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조선 초 중기 유교지식인의 지리학사를 정립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SNA 방법을 통한 연안해운 승객 중심성 이동변화 분석 (A Study on Changes in the Centrality Movement of Coastal Shipping Passengers Utilizing the SNA Method)

  • 박성훈;주동영;오재균;남태현;여기태
    • 해운물류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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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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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7-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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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국내 연안해운의 승객이동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SNA 분석을 실시하였다. 기존연구에서 적용하지 않았던 가중치가 반영된 연결 중심성을 사용하여 중심성 순위도출의 타당성을 높였다. 연결 중심성 분석결과, 남해권역의 네트워크 구성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매개 중심성 결과도 남해권역에 속하는 항만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서 남해의 통로역할을 하는 제주도, 육지와 섬의 관문역할을 하는 목포, 지리적으로 육지와 가깝거나, 소규모 항만으로 원활히 연결되는 항만들이 높은 매개 중심성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아이겐벡터 중심성 분석결과로는 남해권 항만뿐 만 아니라 서해권 항만들도 상위순위에 많이 포함되었다. 결과를 활용하여 주무부처는 국내 연안해운의 주요 항만들을 파악하고, 지원 우선순위 결정, 항만 연결관계에 대한 현황파악 및 중점 개발지역 관리 등의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향후 연구에서는 일반승객과 도서민 승객을 분리하고, 운임, 거리 시간 등의 데이터를 활용한 경제적 측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에 대한 지명 재고(再考) (Reconsideration on the Place Name of the Scenic Site No.1 「Myeongju Cheonghak-dong Sogumgang」)

  • 노재현;김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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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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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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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국내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의 지명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대한 오류 검토의 일환으로, 관련 고지도, 지리지, 유산기 등의 고문헌 그리고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확인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리지 분석 결과 '소금강'이란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20세기 초반 발간된 "증수임영지"에서 재현되고 있으나 고지도에서는 청학동 청학산 청학사 등의 지명 이외에 소금강이란 지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청학산'이란 지명이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지만, 지명으로서의 최초 기록은 율곡의 "유청학산기"로 이 기록에는 소금강'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청학산'이란 지명만 확인될 뿐이다. '이후 이순인의 "고담일고", 허균의 송별기, 허목의 "청학동구룡연기", 윤순거의 "파동일기" 그리고 이원조의 서간(書簡) 등을 볼 때 약 3세기 이상 이곳은 '청학산' 또는 '청학동'이란 지명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소금강'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최초 기록은 18세기 중반 작(作)인 강재항의 시이다. 또한 금강사 앞 이능암(二能巖)에 새겨진 '소금강(小金剛)'이란 바위글씨의 주체는 크기, 서법, 전체적인 배치구도와 마모 정도 그리고 지리지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1870년 또는 1930년에서야 동일한 주체인 이능계원(二能契員)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보임에 따라 이곳 지명 유래의 탄탄한 근거였던 '소금강(小金剛)' 바위글씨를 율곡의 글씨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할 때, 율곡의 "유청학산기" 이후 이곳은 줄곧 '청학산 청학동'으로 불려왔으며 '소금강'이란 지명은 18세기 중반 이후 "입재선생유고" 중 "오언고시조"와 "여지도서"를 시작으로 "동유일기" 등 유람기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금강이란 이칭(異稱)이 일반화되면서 혼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기존 명승 제1호 지명에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율곡의 유람과 관련된 명소로서의 장소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에서는 '청학동 소금강'보다는 '청학산 청학동'이란 지명이 보다 합당한 지명인 것으로 판단한다. 아울러 본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1664년 윤선거 일행이 현 식당암에 각자한 '청학산(靑鶴山)', '경담(鏡潭)'의 지명 바위글씨는 고전적 유람 텍스트로서의 "유청학산기"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증표이자 기호학파 선비들의 율곡에 대한 숭모와 추념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표식으로 보존이 요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