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왕릉 영릉(英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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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을 통해 본 영릉(英陵)의 원형공간과 시공방법에 관한 고찰 (A Study on Yeongneung's Original Layout and Construction Method through the Works of Ancient Literature)

  • 이창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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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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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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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논문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 중 우리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세종대왕의 영릉에 대하여 고문헌을 통하여 원형공간과 복원, 시공방법 등을 고찰해 본 문헌적 연구이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그의 비 소헌왕후 심 씨의 능으로 조선의 42기 왕릉 중 그 조영 방법이 독특하며, 천장의 역사를 갖고 있어 인물사 못지않게 중요한 공간이다. 영릉의 고문헌은 정조(1786)때 작성된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과 (춘관통고(春官通考)) 그리고 고종때 작성된 (영릉영릉보토소등록(英陵寧陵補土所謄錄), 1900년)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1) 능역조영의 용어정의, 2) 능원의 공간구성, 3) 능역시설물의 특성, 4) 공사규모 및 내역, 5) 능원의 식생 등의 내용을 검토할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문화시설은 그 원형을 잘 보존해야 하며 보존관리도 원래의 공법을 활용하는 등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원형 고증적 측면에서 이루어 졌다. 상기의 내용에서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에 대하여 조영적 특성을 고찰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릉의 원형공간 이해와 향후 복원 등의 제안이 가능한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 세종대 삼물회(三物灰)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A study on the significance and structural improvement of the stone chamber tomb by the application of a compound lime - Mortar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in the Joseon Dynasty)

  • 신지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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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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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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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세종대에 삼물회를 조선왕릉에 도입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1446년(세종 28년) 영릉의 구조적 변화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조선초 왕릉은 고려의 석실릉을 답습하여 조성하였다. 조선왕릉으로 처음 지어진 신덕왕후의 정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릉·현릉을 건립한 경험을 갖고 있는 김사행이 주도적으로 건립하였다. 이후 박자청이 이어받아 조선 초 석실릉을 건립하였으므로, 고려의 석실구조를 기반으로 조선왕릉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성종대의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의 구조를 살펴보면 고려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에 기록된 태종과 원경왕후의 석실제도와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석실에 삼물회를 도입하여 구조적인 보강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의 국상으로 영릉(英陵)을 건립할 때, 석실 내에 물이 스며들거나 고이지 않는 밀실한 구조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1446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조성된 영릉(英陵)과 1452년에 조성된 문종의 현릉(顯陵)은 석실구조 바깥에 삼물회격을 추가로 시공한 석실과 회격의 복합구조체이다. 이것은 1468년(예종 즉위년)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석실을 폐지하고 회격만으로 현궁을 만드는데 구조적 기반이 되었다. 즉, 영릉과 현릉의 구조에서 내부의 석실구조를 제거하고, 바깥의 회격만을 시공함으로써 회격 현궁이 조성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릉은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복합 구조체인 회격석실릉에서, 석실을 제거하고 회격만을 조성하는 회격릉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1446년(세종 28)에 삼물회로 만든 회격구조를 석실에 결합한 회격석실릉은 조선만의 특별한 석실구조이며, 조선왕릉의 지하구조가 회격릉으로 변천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음을 논증한다.

조선후기 왕릉재실의 변천과 여주 영릉(英陵) 재실의 건축특성 연구 (A Study on Changes in the Royal Tomb Keeper's House and the Architectural Features of the Tomb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in Yeoju in the Late Joseon Period)

  • 우희중;김동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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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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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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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Although the royal tomb keeper's house in the late Joseon period did not undergo dramatic changes, overall, the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the tomb of King Hyojong, and other royal tombs afterward showed the classification of its rooms according to their purpose and the expansion of its size. During King Yeongjo's reign, the tomb keeper's house tended to consist of Jaesil, Anhyangcheong, Jeonsacheong and Haenggak. The size and arragement pattern of the tomb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were partially maintained in royal mausoleums constructed afterward. Especially Anhyangcheong was first established on the tomb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and its architectural form was maintained until that of Ye Mausoleum, the tomb of King Cheoljong. The tomb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in Yeoju was constructed in 1659 and then moved in 1673 and 1674. In order to bury King Hyojong's wife with King Hyojong, the site of Yeong Mausoleum was moved twice with using almost all materials used for the initial tomb. In addition, as norms related to rites performed at royal tombs were created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tomb keeper's house of Yeong Mausoleum was selected as an exemplary tomb keeper's house representing the royal tomb keeper's house of the Joseon era, and it mostly coincides with its remaining arrangement pattern. Through records distributed in relatively similar periods, it is considered that most of the features fo royal tomb keeper's house in the Joseon period have been inherited until today and that Yeong Mausoleum has a very higher architectural status as an especially valuable tomb keeper's house among royal tomb keepr's houses in the Joseo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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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신로(神路)·어로(御路) 형식에 관한 연구 - 비정형(非定型) 신로·어로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Type of Sinro·Eoro in Joseon Royal Tombs - Focused on the Type of Irregular Sinro·Eoro -)

  • 김규연;정기호;최종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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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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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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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조선왕릉의 입지 및 공간구성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연구로 조선왕릉 내 신로 어로 형식의 구명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왕릉 신로 어로의 형식은 진입로-홍살문-정자각의 관계에 의하여 정형(定型)과 비정형 (非定型)으로, 비정형은 다시 굴절형(屈折型)과 분절형(分節型)으로 구분된다. 또한 선로 어로의 길이와 비정형 신로 어로의 유무에 따라 신로 어로의 조성 유형을 전기, 과도기, 후기로 구분하였으며, 전기에 정형의 경우 건원릉의 신로 어로가 최소 길이 기준으로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비정형 신로 어로가 나타나는 정릉(貞陵, 신덕왕후) 현릉(顯陵) 목릉(穆陵) 장릉(莊陵, 단종) 영릉(寧陵, 효종)의 경우, 지형 및 수계가 형식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로 파악되었다. 즉, 조선왕릉의 신로 어로는 건원릉 신로 어로의 길이를 기본적 준거로 해당 조선왕릉의 지형 및 수계에 부합하는 형태를 가진다.

17~18세기 조선왕릉의 봉릉 구조개선에 따른 사방석(四方石)의 등장과 소멸 (A study on the use of a Sabangseok and changes in the structure at the tumulus of the royal tomb during in the J oseon dynasty the 17th and 18th centuries)

  • 신지혜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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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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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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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This is a study on the structural changes of the tumulus and causes setting up a Sabangseok at the front of the tumulus at the royal tomb in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17th~18th centuries. The Sabangseok was first used in the tumulus of Mongnueng(穆陵) in 1630. It is a multipurpose stone for boundary, foundation of the tumulus and blocking the sliding down of the tumulus. It was set up, when constructing a Yeongneung(寧陵) in 1673. But the vast spill of tumulus soil made it improve structure of the Sabangseok. Consequently, when the Yeongneung was re-constructed, the structure of the tumulus was fundamentally improved. The soil layer on the lime of the subterranean chamber became eliminated. Also the lime of the tumulus and the lime of the subterranean chamber became a united structure. The Sabangseok was still used until 1757 on account of precedents, although it would become unnecessary after structural improvement of the tumulus in 1673. In 1757, Yeongjo(The 21th monarch of the Joseon Dynasty) commanded repeal on the use of the Sabangseok, when constructing the Hongneung(tomb of Queen Jeongseong). The decision and discussions about abolition on the use of the Sabangseok was recorded in Gukjosangryebopyeon.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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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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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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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재료와 제작 방법 변화에 관한 연구 - 신도비와 표석, 상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 of Materials and Fabrication Techniques of Stone Figures in Royal Tombs of the Joseon Period - Focusing on Shindobi, Pyo-Seok, and Sang-Seok -)

  • 차문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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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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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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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비석은 상례문화의 보고이자 서예사의 정수로서 시대사·사회사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지만 그 연구는 아직 미미하다. 특히 비각의 제작 방식에 관한 것은 아직 미증유의 분야로 남아 있어 연구가 절실한 편이다. 비석의 제작은 석재의 탁마 과정과 조각, 그리고 글씨를 새기는 북칠 과정으로 대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신과 관련한 의물(神儀物)인 상석, 혼유석, 비석에는 정교한 마정(磨正) 작업을 가한다. 이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인한 유교적 상·제례의 정착과 전파로 혼유석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둘째, 영조 때 오석(烏石)의 비약적인 확산과 사저취용(私儲取用)은 사회·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품(上品)의 강화석이 고갈되자 사대부에서 사용하던 오석을 천릉한 장릉에 사용한 이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퍼지게 된다. 특히 오석의 사용과 마정 작업은 화학적·물리적 손상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셋째, 비석의 각자 기술은 북칠(北漆)에 있다. 효종 영릉 천릉 시에 송시열의 지문을 북칠한 이후부터 북칠 과정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성행했고 제도화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북칠은 오석의 검은 색으로 인해 흑묵보다 붉은 당주를 이용하면서 더욱 정교화된다. 넷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각자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영조 연간까지 각자는 획의 두께에 따라 각의 깊이를 결정해 음영을 표현하고 양감을 나타냈다. 물론 이 같은 기법은 모든 표석이나 신도비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내수사에 소속된 뛰어난 경공장들의 전습에 의해 유지되었다. 따라서 비석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숙석, 연정, 마정, 정간, 초도서입, 중초, 입각, 교정, 장황의 단계를 거쳐 하나의 완성품이 이뤄진다. 이러한 것은 묘주에 대한 존경심과 공업을 알리는 목적이지만, 이를 통해 공예 기능의 분업과 협업에 바탕을 둔 작업이 표석의 전체 제작 과정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