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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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인수형(鱗獸形) 서수상(瑞獸像)의 제작시기와 별간역(別看役) 연구 (A Study on the Special Technician Byeolganyeok(別看役) and the Statues of Auspicious Animals(Seosusang, 瑞獸像) : the Scale-covered animal form(鱗獸形) in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 김민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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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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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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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경복궁(景福宮)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全燒)된 뒤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2년인 1865년 재건이 시작된다. 이때 경복궁 재건에 대한 의궤(儀軌)는 만들어지지 않고 기초 자료인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에 1865년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내용들을 정리하면 경복궁 재건에 사용된 석재들은 강화(江華), 동대문 밖의 영풍정(映楓亭), 삼청동(三淸洞) 등지에서 채취하기도 했으며, 경복궁 터에 남아 있던 간의대(簡儀臺) 등의 옛 석물을 재사용(再使用)하기도 했다. 또 경희궁(慶熙宮)에 있던 여러 건물 및 석조물을 이전(移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로 경복궁에는 재건기 19세기 뿐만 아니라 17~18세기의 석조물이 공존하고 있다. "경복궁영건일기"에는 경회루(慶會樓) 연못에서 출토된 청동용(靑銅龍)이 별간역(別看役) 김재수(金在洙)가 1865년 궁궐의 화재를 막아달라는 의미를 담아 제작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재수 등 별간역들은 석물의 설계 및 감동(監董)을 했던 인물들로 광화문 해치상을 조각했다고 전해지던 이세옥(李世玉) 역시 화원(畵員) 출신의 별간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설계를 바탕으로 실제 조각을 담당한 석장(石匠)들도 찾을 수 있었는데 근정전(勤政殿)은 장성복(張聖福), 광화문(光化門)은 김진명(金振明)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경복궁의 서수상(瑞獸像) 중 비늘이 있는 인수형(鱗獸形) 서수상의 양식 특징을 찾은 결과 돌출된 입과 큰 코, 형식적인 귀, 등 갈기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 특징을 조선시대 능묘(陵墓) 석물들과 비교한 결과 이 작품들은 고종 재건시인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 계승은 별간역, 석장들이 능묘의 석조물을 제작하면서 얻은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측면 지붕부 결구의 구성방식에 관한 재고(再考) - 중국 원대(元代) 이전 목조건축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ipped-and-Gable-Roof Framework of Muryangsujeon of Buseoksa Temple)

  • 차주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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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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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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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에 관한 연구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일제시대에 해체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기법과 추녀, 귀서까래 등의 결합 수법들이 정연한 형태로 결구되지 않고, 조선시대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와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원형이 아닌 것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그 편년에 대해 다양한 의견(13세기, 12세기 건축)들이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었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목조건축 구조틀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에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 기법과 유사한 건축을 대상으로 평면비 및 어칸과 퇴칸의 비례를 상호 비교하여 살펴 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팔작지붕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으로 판단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측면 서까래가 내부 보(량(梁))에 직접 접하는 기법은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 건축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수법으로, 중국의 팔작지붕은 당대(唐代) 이후에 산화(山花, 합각) 양가(梁架)를 구성하여 팔작지붕의 측면을 구성하는 기법이 발달되어, 명청대 이전까지 크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귀서까래의 발달과정 중 평행서까래에서 말굽서까래로 전환되기 이전 방식인 평행복사연(平行輻射椽)이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의 귀서까래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추녀의 중간부분부터 귀서까래가 걸치지 않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방식은 중국에서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성으로 보인다. 이런 기법들을 살펴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볼 수 없으며, 북방 지역의 당 송대(唐 宋代) 및 요대(遼代) 시기에 볼 수 있는 기법으로, 건축물의 편년시기와 평면에서 어칸과 퇴칸의 비례 관계를 고려해볼 때 동아시아 북방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의 구조 기법으로 판단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가 변형된 것이 아니고, 팔작지붕 고유의 방식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향후 부석사 무량 수전의 평면과 어칸 및 퇴칸의 비례,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전 폐사지 중 팔작지붕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에 대해 복원 설계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from Simhyangsa Temple)

  • 정지연;明珍素也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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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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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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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논문은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심향사의 극락전 내에 안치되어 있는 협저아미타불상의 구조 및 제작기법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X-ray 투과촬영 데이터와 2차례에 걸친 현장조사결과를 종합하여 검토하였으며, 파손된 부분에서 박락된 시료를 분석하여 바탕층의 구조와 재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사 결과, 심향사상은 심목을 상 내부에 짜 넣지 않은 완전히 텅 빈 상태의 협저불상이며, 외부 옷주름의 요철(凹凸)과 동일한 옷주름이 내부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원형(原型)이 되는 소조상(塑造像)을 조성하는 단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협저층을 올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원형의 흙과 심목(心木)을 제거하기 위해 정수리에서 뒷목까지 사선으로 절개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절개선이 확인되지 않는다. 머리를 절개한 부분에는 꿰맨 흔적이 없고 접착제(칠(漆) 혹은 호칠(糊漆))를 사용하여 접착한 것이 관찰되었다. 눈의 검은자위 부분에 구슬을 감입하였고, 양쪽 귀와 손, 치마(裙)의 띠와 매듭은 나무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후기 제작으로 알려진 선국사 협저불좌상이나 동경 오쿠라집고관 협저보살좌상, 그리고 조선초기 작품인 죽림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불회사 협저비로자나불좌상, 실상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및 협저보살입상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탕층 분석결과에 의해 회칠층(灰漆層)과 주칠층(朱漆層)은 제작 당시의 층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회칠층에 사용되어진 골분은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제작뿐만 아니라 불상의 회칠층에도 이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으며, 불상에 금박을 붙이기 위한 바탕층에는 주칠을 올렸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근대에 들어서만도 두 차례 이상의 개금불사가 행해졌던 것이 관찰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개금불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의 층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동궐(東闕)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에 관한 고찰 (A Study of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Chugyeongwon in Donggweol)

  • 오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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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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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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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동궐(東闕)에 실존했던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 양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추경원의 조영 위치와 범위, 조영 배경과 의도, 소속 체제와 공간적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추경원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 주변 또는 시민당(時敏堂)과 진수당(進修堂) 사이의 공간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관련 사료에 따르면 추경원은 도총부(都摠府) 서쪽, 협상문(協祥門) 안쪽, 숭문당(崇文堂) 인근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서도 각각의 조건에 부합하는 추경원의 조영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실측도 형식의 "창경궁배치도(昌慶宮配置圖)"에 따르면 오늘날 추경원은 창경궁 문정전(文政殿)과 숭문당 남쪽의 녹지공간에 해당한다. 둘째, "동궐도(東闕圖)"에서 추경원은 담장으로 한정된 대지에 수목들이 생육하던 녹지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부에 일체의 인공적 시설은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추경원은 주변 대지보다 표고(標高)가 높은 지형에 입지했다. 특히 추경원의 구성 형식과 입지 특성은 한양에 소재했던 궁궐 외원(外苑)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궁궐 외원의 운영 양상을 고려하면 추경원 역시 지세(地勢)의 보존과 배양(培養)을 위해 조영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조선 후기에 걸쳐 추경원은 동궁(東宮)과 함께 창덕궁 또는 창경궁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추경원은 동궁 영역에 포함된 왕실정원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담장과 협문(夾門)으로 구성되었던 추경원의 서쪽 경계부는 이후 담장과 행각(行閣)이 결합된 형식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경원은 각종 개발행위로 인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소실(消失)되어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제주도 지역 성곽 유산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방향 (The Status of Studies on Historical Wall Relics in the Jeju Area and the Strategic Direction for Their Preservation and Maintenance)

  • 변성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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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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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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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동아시아 해로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주변국의 외침을 빈번하게 받아왔다. 특히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이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제주를 정복하기 위한 왜구의 침략이 고려 말 이후 계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제주도 곳곳에는 외침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이 설치되었고, 특히 소수의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곳곳에 축조되었다. 이는 내륙과 떨어져 있어 유사시 신속한 지원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곽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만큼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성곽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성곽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다른 지역의 성곽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1970년대 들어서야 조사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주도 성곽의 중요성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고 성곽을 연구하는 전공자가 제주지역에 없었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성곽에 대한 연구도 점차 진전되었으나 아직도 그 수준은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과 보존 정비 현황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 성곽 유적 2개소와 조선시대 성곽 유적 13개소의 성곽 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을 분석하여 제시할 수 있었다. 성곽 유적의 보존 정비 현황에서는 잔존하는 성벽과 부속시설 현황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정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곽 유적의 정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언급하여 향후 복원 정비에 참고할 수 있는 개선방안을 간단하게 제시하였다.

<동궐도(東闕圖)>의 러버쉬팅변환을 통한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입체적 식생 경관 추정 (Estimation of the Three-dimensional Vegetation Landscape of the Donhwamun Gate Area in Changdeokgung Palace through the 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 of )

  • 이재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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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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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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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분석을 통해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식생 경관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에 묘사된 수목은 17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수목 표현 입문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토대로 유형의 구분이 가능하였다. 분류 결과에 따라 <동궐도>의 돈화문 지역에 표현된 수목은 10종 50주로 확인되었다. 둘째, <동궐도>의 입면 제작 축척을 이용하여 그림에 묘사된 수목의 실제 크기를 산정할 수 있었다. 산출된 수목의 수고는 최소 4.37m에서 최대 22.37m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동궐도> 제작 이전부터 창덕궁에 생육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노거수와의 비교를 통해 그림에 묘사된 수목들이 과도하지 않게 현실감 있는 크기로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셋째, <동궐도>의 러버쉬팅변환(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을 통해 현재 수치지형도에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 제작이 가능하였다. 특히, 변환 지역의 세분화와 통제점 추가를 통해 제작된 평면도의 정밀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작성된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를 통해서 수목의 위치와 밀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궐도>에서 취득된 수목의 형상 정보와 식재 평면도를 이용하여 3차원 식생 모델의 제작이 가능하였다. 3차원 모델은 실제 사람의 눈높이에서 조망축, 스카이라인, 주변으로의 개방과 차폐 정도 등 현황과의 입체적 경관 비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조망 특성을 검토하는데 유용하였다. 본 연구는 기존에 논의되어 온 <동궐도>의 사실적 표현을 입증하고 이에 근거하여 기록화에 묘사된 동궐의 식생 경관의 원형을 규명하기 위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선조대(宣祖代) 공신초상(功臣肖像)의 복식 고찰 (A Study on the Costumes of Meritorious Vassals' Portraits in the reign of King Seonjo)

  • 이은주;김미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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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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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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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연구는 현전하고 있는 선조대 공신 초상화를 임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 양상을 초상화와 관련 유물, 문헌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공신초상은 공신 책록 당시에 그려진 공신화상도 있었으나 후대에 그리거나 이모된 것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해당 시기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이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연구 대상에 포함시켰다. 공신초상은 사모와 단령, 품대, 흑화로 구성되는 의례용 단령인 흑단령 차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흑단령 관복을 분석하기 위해 사모의 높이와 모정의 형태, 양각(兩角 사모뿔)의 형태와 문양, 단령의 문양과 무의 양식, 단령의 옆선 처리방식과 흉배 품대, 단령의 받침옷인 답호(??)와 철릭[帖裏]의 색상, 흑화 등을 살펴보았다. 임란 이전 광국 평난공신 초상화는 한응인(韓應寅) 초상화(1점)가 분석 대상이었는데 사모는 조선시대 사모 중 가장 높은 높이였으며 사모뿔에서는 당상관 이상만 사용할 수 있는 운보문(雲寶紋)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흑단령은 '밖주름무'가 달린 만자운문(卍字雲紋)의 아청색 단령에 운안흉배(2품)가 달렸다. 허리에는 학정대(종2품)를 띠고 있었는데 학정대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기록되어 있는 자헌대부(정2품) 품계와 일치하지 않았다. 당상관용 홍색 답호와 녹색 철릭의 단령 받침옷, 그리고 흑화 등을 확인하였다. 임란 이후 호성 선무 청난공신 초상화는 이항복(李恒福) 초상화를 포함하여 18점을 분석하였다. 사모의 높이는 이전 시기보다 낮아졌고 운보문의 사모뿔은 상대적으로 넓어 보이는 형태였다. 흑단령은 '뒤뻗침무'가 달린 만자운문의 아청색 단령이었으며 흉배와 품대는 공신 책봉 당시의 품계와 거의 일치하였으나 2점(신잡 김새신)의 예외가 있었다. 따라서 공신초상은 책봉 당시의 품계로 그리는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흑단령의 받침옷 중 녹색 답호(11점), 남색 답호(4점), 다홍색 답호(3점)가 확인되었으며 철릭은 남색(10점), 녹색(6점), 홍색(1점), 유청색(1점)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삼공신의 흑단령 받침옷으로는 임란 전과 동일한 당상관용 홍색 답호와 녹색 철릭으로 표현되는 것이 옳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파산서당'의 영건과정과 조경식물 변화상 탐색 (The Search for Study on the Construction Process and Changes in the Landscape Plants of the Pasanseodang)

  • 주빈;최하영;신상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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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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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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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1874년 박규현이 기술한 '파산서당기'를 중심으로 분석한 파산서당의 영건과정과 조경식물의 변화상을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구 달성의 하빈면 묘리 파회에 자리한 살림집 삼가헌과 별당(파산서당)은 사육신 박팽년(1417~1456)의 11대손 박성수로부터 14대손 박규현에 이르기 까지 약 90년간(1783~1874)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풍수적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으로 회자되는 길처이다. 둘째, 파회마을은 박성수가 1769년(영조 45)에 벗들과 교우하기 위해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삼가헌(三可軒))를 당호로 삼은 것으로부터 유래하는데, 둘째아들 박광석이 분가(1783)한 후 사랑채(1826)와 안채(1869)를 지었고,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1874년에 연을 심어 가꾼 연못과 정자(하엽정)를 추가했으며, 파산서당 명칭은 삼가헌 뒷동산 지명과 연계된다. 셋째, 네모꼴 연못은 길이 21m, 너비 15m 규모로 연꽃을 심었는데, 못 가운데 원형 섬을 두어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파산서당에 부가된 정자(하엽정)의 명칭, 동쪽 방 이연헌(怡燕軒), 서쪽 방 몽양재(蒙養齋) 등은 군자적 삶의 염원, 그리고 자손들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는 뜻을 담았다. 넷째, 성리학적 규범(소나무, 연꽃, 대나무), 안빈낙도의 생활철학(버드나무), 은일사상과 태평성대의 염원(대나무), 그리고 구휼목적과 실용성(밤나무, 상수리나무, 가래나무, 옻나무 등)에 비중을 둔 식재수종의 반영을 추적할 수 있는데, 이는 서당이라고 하는 장소성과 상징성, 절제미학 등을 고려한 조경법이라 하겠다. 다섯째, 조영초기 식재수종은 회화나무와 연꽃을 제외하고 대부분 고사하여 다른 수종으로 대체되었는데, 서당 기능의 상실과 풍수적 가치(홍동백서 상징수종), 벽사기능(엄나무와 탱자나무), 심미성 및 실용적 가치(해당화, 매화, 배나무, 복숭아나무, 굴참나무), 가문의 번영과 변화지 않는 청백의 삶(자귀나무, 배롱나무, 주목), 심미관 등 후손들의 확장된 작정관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항공 과징금 제도의 비교법적 검토 (A Comparative Review on Civil Money Penalties in Aviation Law)

  • 이창재
    • 항공우주정책ㆍ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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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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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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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항공운송에서 법령상 의무를 위반한 사업자에 대해 행정부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정제재를 조치할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금전적인 행정제재인 과징금이다. 행정제재로서 과징금 부과제도는 1980년대 공정거래 분야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항공관련 법령에서의 도입은 1984년 개정 <항공법>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항공 관련 과징금은 <항공사업법>이나 <항공안전법>에 규정되어 있다. 법률에 따르면 항공 사업자가 행정상 의무를 위반하여 영업의 정지를 명하거나, 부여한 자격증명이나 승인의 효력을 정지하는 것이 사업의 이용자 등에게 심한 불편을 주거나 공익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그러한 정지조치에 갈음하여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이점에서 항공관련 과징금은 우리나라 과징금 제도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공정거래 분야의 과징금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공정거래 분야에서는 시장경제 질서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정상 의무위반 행위에 대해 과징금이 부과되고, 위반행위에 따른 이익의 환수와 소비자의 부당한 지출을 보상하는 역할에 주목한다. 하지만 항공분야에서 사업자의 의무위반행위는 단순히 국민의 재산적 손실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공교통이용자의 생명이나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점에서 항공 과징금은 공정거래 분야의 과징금과 비교할 때 부당이득의 환수 보다는 행정행위의 실효성 확보 수단으로서 행정적 제재 혹은 징벌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일반적으로 과징금은 행정 전문가에 의한 조사절차를 거치므로 효율성이 확보될 수 있고, 사법적 절차에 비해 신속한 집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행정적 제재수단으로 선호도가 높다. 더욱이 민사소송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국민의 법 감정을 인지하여 사업자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과징금 부과제도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고 이에 대한 여론도 상당히 호의적이다. 하지만 과징금은 어디까지나 행정행위의 실효성 확보수단일 뿐이다. 우리나라 항공관련 법률에 따른 과징금은 행정적 제재수단이면서 그 실효적인 측면에서는 형벌의 일종인 벌금과 유사하고, 더욱이 지나치게 고액의 과징금으로 인해 국가의 형벌권 집행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과징금 부과제도의 부적절한 입법과 그 운영은 자칫 법치국가로서의 가치를 훼손할 우려를 낳기도 한다. 위와 같은 인식 하에서 본 논문은 우리나라 항공관련 법령에 규정된 과징금 부과제도와 운영현황에 관한 현주소를 파악할 목적에서 기술되었다. 특히 외국의 항공관련 과징금 법령과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우리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탐구하는데 주력하였다. 아무쪼록 본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항공 산업의 발전과 공공의 이익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항공관련 과징금 부과제도가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를 희망한다.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Change in Concepts and Status of Park and Green Space in Urban Planning Documents of Gyeongseong)

  • 조세호;김영민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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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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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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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경성도시계획 문헌에 기록된 공원녹지 현황표를 분석하여 근대 공원녹지계획의 의의와 한계를 파악하였다. 1925년부터 1940년의 문서 7개를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1930년과 1940년의 문헌은 공식적인 경성 공원녹지 계획안을 담고 있다. 경성의 근대 도시계획 흐름에서 공원녹지는 1920년대까지는 중요한 계획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제정을 계기로 1930년대부터 공원계획은 법정 시가지계획의 일부가 되었고, 1940년에 경성시가지계획공원안을 통해 경성의 종합적인 공원녹지계획이 완성된다. 도시계획 초기에 공원은 위생시설로 인식되다가 이후 방공, 여가, 문화적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계획된다. 주요 문헌의 계획 내용을 비교하면 규모와 기능에 따른 공원의 유형 구분, 공간적 배치를 고려한 계획 기준, 시설녹지를 통한 녹지체계의 구상 등의 중요한 계획 내용의 발전이 있었다. 공원녹지계획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공원녹지의 수나 면적의 실질적인 증가는 거의 없었으며, 계획안과 현황 사이에는 심각한 괴리가 나타난다. 1920년대에는 경성운동장이 유일하게 조성된 시설이었으며, 1930년대에도 삼청공원, 앵정공원 두 개소만 신설된다. 1930년의 계획에서 38개소가, 1940년에는 140개소의 계획 공원이 제안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산림의 공원화, 대한제국 황실 토지의 공원화, 공원 용도의 중복지정, 소규모 아동공원 중심의 실행 등 현실적 조건에서 공원녹지의 양과 질을 향상하려는 대안이 계속해서 탐색되었다. 부족한 예산과 전쟁 준비의 상황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의 공원녹지계획안은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했지만, 해방 이후 서울의 공원녹지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틀로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