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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원경왕후 상장례(喪葬禮) 의식과 그 특징 (The Funeral Rites for Queen Wongyeong during Early Joseon and the Characteristics Thereof)

  • 양정현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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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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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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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조선 초기 흉례(凶禮)의 정비 과정이라는 연속선상에서 원경왕후 국상을 하나의 기점으로 파악하고 그 특징을 상제(喪制)의 변화 및 의식 절차의 분석을 통해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세종 2년 발생한 태종 비(妃) 원경왕후의 국상은 조선에서 국왕이 상주(喪主)가 되어 진행하는 삼년상(三年喪)의 의식 절차가 정비되어, 그 의주가 실록에 기재된 최초의 사례였다. 국상 복제 논의에서는 기존에 행해오던 역월제를 탈피하여 졸곡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기존의 도감 운영 체계를 정리하여 빈전 국장 산릉 3도감만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불교 관련 의례는 대폭 축소 규제되게 되었다. 삼년상 기간 동안 국왕의 친행을 고려한 의식 절차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의식의 기본 패턴은 배례(拜禮) 곡(哭)-행례(行禮)-배례(拜禮) 곡(哭)로 이루어졌는데 우제(虞祭)를 기점으로 전(奠)과 제(祭)로 구분되었다. 이는 태종대 길례 의식의 정비가 이루어진 바탕에서 고제(古制)에 기반한 '전(奠)'과 제(祭)'의 이해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을 기준으로 개별 의식 절차의 분석을 행하였다. 이를 통해 원경왕후 국상에서 국왕이 친행하는 실질적인 삼년상 실행을 위한 상장 제도 및 의식 절차의 제정과, 그 바탕이 된 고제의 이해 수용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쓰리(祭)와 신찬(神饌): 이세신궁과 천황의 제사를 중심으로 (Matsuri and Shinsen : Centering on the Rites of Ise Shrine and Emperor)

  • 박규태
    • 종교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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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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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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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12만 개소에 달하는 일본 신사(神社)의 총본산이라 할 만한 미에현 이세시(伊勢市) 소재 이세신궁(伊勢神宮)은 황조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모시는 내궁(內宮=황대신궁(皇大神宮)) 과 식물신 도요우케(豊受大神)를 모시는 외궁(外宮=풍수대신궁(豊受大神宮))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천황가의 조상신이라 말해지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사지내는 신사라는 점에서 역사상 천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일본 신도에서 신에게 바치는 음식물 즉 신찬을 다루는 본 연구는 연간 약 1,500회나 거행되는 상기 이세신궁의 마쓰리 중 매일 조석으로 행해지는 일별조석대어찬제(日別朝夕大御饌祭)를 비롯하여 가장 대표적인 대제(大祭)인 신상제(神嘗祭, 간나메사이), 20년마다 한차례씩 행해지는 식년천궁제(式年遷宮祭),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고대 이래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이 집전하는 각종 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 및 대상제(大嘗祭, 다이죠사이)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때 본고의목적은 기본적으로 신찬의 유형과 주요 특징 및 그 신화적 배경과 역사적 변천과정 등을개략적으로 살펴본 후, 구체적으로 상기 마쓰리에 등장하는 신찬의 품목과 절차 등을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신찬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가령 신도 신찬의 사회적 의미는 농경사회적 특징, 고대 식생활과의 관계, 일본요리와의연관성, 현대사회에 있어 신찬의 의미 및 그것과 관련된 신불(神佛)관념의 문제등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신찬은 특히 신성, 생명, 재생의 관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종교적 의미를 말할 수 있다. 한편 고대일본에서 정치는신에 대한 제사를 뜻하는 '마쓰리고토'라고 불렸으며, 천황의 최대 역할은 바로 신을 모시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정치란 신에게 신찬과 공물을 바치고 그 가호를 기원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찬이 본래 정치와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끝으로 본고는 고대 한일간 문화교류의 뚜렷한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찬의 문화적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