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전라좌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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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라좌수영 동헌 고찰 (A Study on Jeollajwasuyeong Donghe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신웅주;천열홍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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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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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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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is study explored the Jeollajwasuyeong Donghe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s findings are as follows. Buildings in Jeollajwasuyeong were completed since the mid-18th century. They formed areas based on functions and were largely classified into two areas. The buildings within Yeongseong included Gaeksa (guesthouse), Dongheon(government office), Hyangcheong(advisory organ), Jungyeong(military camp), Guncheong (county office), Gongbang(workroom), and Changgo(warehouse). There were also buildings for low-ranking government officials. The central part of Jeollajwasuyeong was the areas of Gaeksa and Dongheon. Gaeksa was iconic area where local governors served King and had 75 Jinnamgwan Guesthouses and 3 inner gates. Those were measured off by separate walls. The Dongheon area was located in the northeast of Gaeksa. There were three gates such as Wanyeongru, Gongsamun, and Jeongbyeonmun at the entry area, which were also divided by walls like Gaeksa. Unjuheon (Dongheon) was at the center of the area where Gyeolseungdang, Mugwonjae, Naea, Chaekbang, and Gongsu were built. Outside the area, Baekwadang(used as Bijangcheong), Jinhyulgo, and Byeonggo were composed of part of the Dongheon area. Most of the buildings in Dongheon seemed to be repaired since 1664. It was difficult to locate the area of previous Dongheon. In particular, Jinnamgwan was first built in 1599 and destroyed by fire in 1716. In 1718, the building was reconstructed and shared historic denominator with Unjuheon before 1858 and reconstructed Unjuheon in 1869. It was found that Unjuheon was reconstructed more than at least three times, which was the central building in Dongheon. The buildings including Gyeolseungdang, Mugwonjae, and Baekwadang in the area were not existed within Jeollajwasuyeong and were reconstructed more than once and maintained until the early 1900s.

임진왜란 거북선 개판(蓋板)의 구조 (Structures of the Cover of Geobukseon for Imjin War)

  • 홍순구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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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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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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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임진왜란 해상전투에 사용된 이순신의 거북선 복원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에 사용된 거북선의 외부, 내부구조와 형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료(史料)가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복원된 거북선은 정조 19년(1795)에 왕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통제영 거북선의 목판화 그림과 설명문, 사료의 내용을 토대로 복원되었으나 두 거북선은 임진왜란 후 203년 뒤인 정조대의 거북선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는 같지 않고, 현재 복원된 임진왜란 이순신의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의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구조적, 형태적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거북선 그림인 1593년 이덕홍 귀갑선도는 그동안 거북선의 연구에서 중요시 되지 않았으나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그림 해석을 통한 구조분석과 판옥선, 전라좌수영, 통제영 거북선과의 관계를 분석하면 개판 윗면의 중앙부분은 평면구조이고, 전후좌우로 창검이 꽂혀있는 구조로 임진왜란 당시 기록의 내용에 접근된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를 도출할 수 있다.

이순신의 『충민공계초(忠愍公啓草)』에 대한 서지적 고찰 (Bibliographic Study on 『ChungMinKongKeicho (忠愍公啓草)』 by YI Sun-sin)

  • 노승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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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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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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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중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가 그 당시와 후대의 등록(謄錄) 형식에 따라 3자에 의해 등서되어 현재 장초(狀草), 계초(啓草), 계본(啓本) 등으로 전한다. 특히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재직할 때 작성된 "임진장초(壬辰狀草)"는 대표적인 장계로 많이 알려졌다. 최근에 분실되었다가 소재가 확인된 "충민공계초"는 "임진장초"와 함께 후대의 이순신 장계류에 전범이 될 만큼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유물이다. 그러나 이 책이 이순신 관련한 새로운 책인지 아니면 기존에 분실되었던 장계별책인지 불분명한 상태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에 대한 서지적인 고찰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고증하였다. "충민(忠愍)"은 이순신이 사후에 사용했던 명칭이었고, 1662년에 장계가 등서되어 "충민공계초"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있는데, 그간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장계별책에도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 있었다는 점이 서로 일치하는 점이다. 특히 1928년 일본인들이 촬영한 사진 11장의 형태와 내용이 "충민공계초"에 들어있는 12편과 완전 일치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이 책을 "별도로 초사(抄寫)한 계초(啓草) 1책"이라고 한 점, 이 책의 12편으로 장계를 보충한 점, 홍기문과 이은상이 장계초본에 기존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있다고 한 점, 조성도가 12편을 따로 별책본으로 분류한 점 등은 12편이 들어있는 장계별책을 "충민공계초"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 "충무공계초"는 편수가 총 62편이므로 12편이 더 들어있는 분실된 장계별책으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충무공유사"의 "충무공계본"은 모두 16편이다. 본문에는 이두문이 그대로 실려 있고, 뒤의 3편은 "충민공계초"원문과 동일하다. 지금까지 이두문이 그대로 실린 것은 1935년에 간행된 조선사편수회의 "임진장초"가 유일했는데, "충무공계본"의 간행된 시기가 오히려 이를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충민공계초"가 장계별책이라는 것에 대한 반론은 이은상이 "장계등본 별책의 일기 1장"이라고 한 말에 근거한다. 1953년 설의식이 "이순신수록 난중일기초"에 "무술일기" 초고 사진 1장을 도판으로 처음 소개하였다. 이은상도 "무술일기"에 장계초본 별책 속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첨가했고, 다시 "장계 등본 별책 끝에 최후 10일 동안의 일기 한 장"과 "별책부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의견은 설의식이 정확한 출처를 모르고 소개한 "무술일기" 초고 사진 1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은상은 "충무공유사"를 장계관련 책으로 잘못 파악하고 "장계등본 별책의 일기 1장"이란 말을 하였다. 이는 실제 원본상황과 다른 잘못된 견해이므로, 굳이 이를 정정한다면 "충무공유사의 일기 1장"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일기 1장이 딸린 장계별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반박의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요컨대 "임진장초" 이외의 모든 장계들을 장계별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통상 지칭되었던 장계별책에 유독 12편이 더 실려 있다고 한다. 이 점이 다른 장계류와 차별화된 점이다. 그러므로 여러 장계이본 중에서 유일하게 12편이 더 수록된 "충민공계초"가 기존에 알려진 장계별책이라는 견해에 더 무게가 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