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일상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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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족(士族) 일상생활의 유교적 의례화 양상 (Some Patterns of Confucian Literati's Daily Lives in the Joseon Dynasty Analyzed from a Perspective of Ritualization)

  • 박종천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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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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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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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시대 사족(士族)들은 시간, 공간, 인간의 삼간(三間)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유교적으로 의례화하는 실천을 통해 삶을 성화(聖化)했다. 일상생활의 성화는 1) 시간적 차원에서는 『소학(小學)』의 규범을 율신제행(律身制行)의 의례화된 실천으로 철저하게 구현했다. 특히 이러한 실천은 특히 성리학적 수양과 공부를 시간에 따라 구별해서 실천하는 일과(日課)의 시간적 의례화로 전개되었다. 2) 공간적 차원에서는 서원(書院)이나 서숙(書塾) 등에서 강회(講會)의 상징적 강학(講學) 공간을 구성했고, 그에 따라 강회의 의절(儀節)을 의례화했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경독(敬讀)의 확대와 잠명(箴銘)의 독송(讀誦)을 통해 강학활동의 공간적 의례화로 발전했다. 3) 인간적 차원에서는 주기적인 제사나 집중적인 독서의 의례화된 실천이 강화한 경건한 의식[경(敬)]이 무의식적으로 심화해서 각각 가족 공동체의 상징적 중심인 선친(先親)과 유림 공동체의 상징적 중심인 선사(先師)에 대한 꿈으로 투사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의례화 양상은 유교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조선시대 사족의 일상생활을 성화했다.

불과민속 - 몽골 유목민의 불 민속

  • 장장식
    • 방재와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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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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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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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사람이 다르면 인정이 다르고, 인정이 다르면 민속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불을 어떻게 인식하고, 불을 어떤 방식으로 대했는가 하는, 민족 저마다의 민속행위를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불은 본디부터 인간에게 종속되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이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변화무쌍한 변물이었다. 그렇기에 불을 '그 어떤 것' 으로 여기고 여기에 신성을 덧붙여 숭봉하는 태도는 모든 문화에 두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아마도 불을 얻는 데 소요되었던 노력과 그 노력의 깊이에 따른 지혜의 축적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숭엄한 사건을 서술하는 신화(myth)로 기억되고, 한편으로는 굳건한 신앙의 대상으로 일상의 삶에 영향을 끼치면서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원초적인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엄중한 신격으로 숭신되기도 하고, 특별한 의례로 해마다 반복되며 규범과 도덕률로 일상을 구속하고 있다. 일상에 가까이 있되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장엄인 것이다. 몽골 유목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 양상과 의례의 세부 모습이 다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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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의례 매뉴얼과 민속종교 (Ritual Manual and Folk Relig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최종성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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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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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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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관혼상제를 다룬 의례 매뉴얼의 출간과 필사가 일제강점기에 범람을 이루었다. 그러한 의례 매뉴얼은 대개 의례준칙, 사례서, 축문집, 종교예식서, 일용예식서 등 5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런 5종의 의례 매뉴얼은 목표와 내용이 서로 달랐지만, 당대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민속과 종교의 형성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당시 의례 매뉴얼은 엘리트 지식인의 지적인 성과물이기보다는 전근대의 예서와 문집에서 폭넓게 발췌하고 시대적 변화에 맞춰 첨삭을 가하는 수준에서 편집 발간된 것이며, 근대 인쇄술의 원조로 특정 계층에 제한되지 않고 폭넓게 유통되었다. 의례 매뉴얼은 깊이보다는 넓이를 강조하고 체화보다는 참조를 중시하는 민속지식을 대량으로 보급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례 매뉴얼에 대한 질적인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것이 얼마나 일반인들에게 참조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양적 이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의례 매뉴얼의 이해를 통해 당대는 물론 이후 20세기 민속의례 및 민속종교의 방향과 특질을 읽어내는 통로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한반도 선사시대 굽다리토기 연구

  • 강병학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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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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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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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고는 매우 복잡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는 선사시대 토기 중 굽다리토기에 대한 연구이다. 특수한 기형의 이 토기는 분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의례용으로 인식되어져 왔으며, 그 명칭 또한 무분별하게 사용되어져 왔다. 따라서 충분히 객관적이고도 적절한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토기는 저부와 신부의 상대크기에 따라 대부형(Ⅰ형)과 대각형(Ⅱ)으로의 세부기종 설정이 가능하고 세부기종별 속성분석을 통하여 6형식의 형식분류가 이루어졌다. 무문토기시대 전기 주거지유적에서 공렬 및 각형토기와 공반하는 1·2·3·4형식의 토기(북한→강원영동→경기중부·충청서해안지역)는 점토대토기문화가 도래하면서 생활, 분묘, 생산, 폐기 그리고 의례관련유구에서 출토되는 5·6형식 토기(경기중부·충청서해안→호남·영남지역)로의 변화를 보이면서 전개된다. 즉 점토대토기문화가 도래하는 시점에서 굽다리토기의 형식도 변화·확대되고 있다. 또한 출토맥락, 형식조합, 제작기술 등의 관점에서 공렬 및 각형토기와 공반하는 1·2·3·4형식은 일상 생활용기로의 상정이 가능한 반면 점토대토기와 조합을 이루는 5·6형식 토기는 의례관련유구와 분묘유구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어 기원이나 소원과 관련된 의례용기, 그리고 부장용으로의 기능분화가 관찰된다. 〔주제어〕: 굽다리토기, 공렬토기, 각형토기, 점토대토기문화, 기술유형, 시공적 전개, 기능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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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17세기 수륙재(水陸齋)에 대한 유신(儒臣)의 기록과 시각 매체 (The Joseon Confucian Ruling Class's Records and Visual Media of Suryukjae (Water and Land Ceremony) during the Fif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 정명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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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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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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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 개국 후 유교적 가치관으로 성장한 통치 계급에게 불교 의례는 이른바 '위험한 축제'로 인식되었다. 의례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도왔고, 제의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했다. 의례 공간에는 도량을 신비로운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다양한 공양구와 기물이 장엄되고 범음구와 범패가 어우러졌다. 그 중에서도 불교 회화는 기층민에게 강한 효력을 지닌 시각 매체로 적극 활용되었다. 생사의 인과응보를 담은 <시왕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의식이 마련된 도량에 불화를 헌괘하고 이를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관청(觀聽)'에 대한 수요로 불화의 기능은 더욱 확대되었다. 천도 의례 장면을 담은 <감로도>에는 왕실과 종친의 모습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중국의 수륙화에서 이 도상은 수륙재에 봉청(奉請)하는 존귀한 대상 중 한 그룹이었으나 16세기 <감로도>에는 왕실의 후원을 상징하며 국행 수륙재의 역사성과 전통을 입증하는 존재로 도해된다. 왕실 후원은 불교 의례에 대한 사회적 공인과 같았고, 이러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싶은 흔적이 <감로도>에 남아있다. 의례에 대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경계는 표면적으로는 군중이 참여하는 의례 공간에 승속(僧俗), 남녀, 신분의 귀천(貴賤)이 함께 어우러지기에 예의가 무너지고 풍기가 문란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또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금기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축제의 요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각 매체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되었기에 그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측과 위험성을 우려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실록(實錄)의 기록에서 위험성을 강조하며 불화를 불태우고 불화를 그린 자를 잡아오도록 하는 일련의 조치나, 도성이 텅 비도록 군중들이 모여든 기록은 역설적이게도 불교 의례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축제의 장으로 인식됐음을 반증한다. 불교 의례는 생의 순환 단계에서 유교가 대체할 수 없는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쉽게 사라질 수 없었고, 공동체를 통합하는 축제의 요소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후기 <감로도>에는 17세기부터 본격화되는 사당패나 연희패가 도해되고 의례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반영되었다.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던 불교 의식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마련되어 일상의 고단함을 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 국가의 정책적 탄압에 '위험한 축제'로 인식되던 불교 의례가 정례적인 세시풍속이자 공동체의 축제로 수용되는 과정을 불교 회화에 재현된 시선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향문화(香文化)와 향로(香爐) (Goryeo Dynasty Incense Culture and Incense Burners)

  • 박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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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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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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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향을 피우는 행위는 불교 의례나 관습에서 유래되었으나 점차 일상의 습속(習俗)이 되어 향문화를 형성하였다. 고려는 종교나 국가적인 의례 외에도 일상 속에서 향을 폭넓게 향유하였는데, 특히 고려의 문인들은 연거분향을 통해 삶의 고아한 정취를 즐겼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아시아 향문화의 일환으로 분향방식 역시 동시기 중국과 같은 방식을 공유하였는데, 이는 고려 문인들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분향방식은 향로의 크기나 형태 등에 영향을 주었는데, 일상화된 분향 문화에 적합한 간소화된 소형의 향로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소형 향로로 배(杯) 형태의 향완이 대표적이다. 향완은 종교적 용도의 금속제 거향로로 인식되어 왔지만, 송대에는 소형 향완이 도자로 활발히 제작되면서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송과 같은 향문화, 분향방식을 공유했던 고려에서도 도자 향완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다. 이는 개경에서 발견된 다수의 송대 백자향완, 그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고려의 청자향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13세기에 제작된 청자 향완은 고려 내부의 적극적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 백자향완과 유사한 형태의 청자향완 외에도 금속기를 모방하거나 고려청자의 기법과 문양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고려만의 청자향완들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향로는 기본적으로 각종 의례·의식의 필수품이었지만, 개인 향문화의 확산으로 아취를 위한 기호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금속제 향로나 고급 청자 향로들이 주로 국가나 종교의 의례·의식에 사용되었다면, 비교적 생산이 용이한 간소화된 도자 향로는 개인적인 수요에 부응하며 향문화의 확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왕조실록 문헌을 통한 강원도 영동지방의 자연재해 발생 및 재난문화 사례 조사 (A case study of the disaster in Yeongdong province of Gangwon-do and Disaster Culture Survey through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 배윤아;임수정;김병식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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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19년도 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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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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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전 세계적 기상이변으로 홍수 가뭄 폭설 혹서 혹한 등의 재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해는 과거에도 존재하였으며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하였다. 온고이지신가 이위사의(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는 논어의 위정편(爲政編)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옛 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재난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새겨둘 구절이다. 역사 속에서 자연재해는 군주(君主)의 부덕(不德)이나 실정(失政)의 소치(所致)로 여겨지고 나아가서는 왕조나 국운의 쇠퇴와도 관련이 이어지기까지 했다. 이미 과거 자연기록에 있었던 일들이며 이러한 사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자연재해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경술년 현종 11년(1670년 5월 2일) "가없는 우리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에게 내린단 말인가." 1671년 말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기록도 있다. 기양의례'란 가뭄, 홍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개인의 질병과 불행 등 일상적인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소멸하고자 거행하는 대표적인 재난문화의 종류이며 비정기적 의례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기양의례는 재난대응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의 우리나라로 보면 재난안전대책 본부와 비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양의례"를 통해 임금을 포함한 조정이 적극적 해결의지를 천명하고 각 고을의 관리와 지방군을 동원하여 수습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 부세를 견감하고 구제곡을 지급하는 등의 진휼정책이 뒤따랐다. 백성들도 오가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환난상휼을 실천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비록 기술적인 부분은 미약했지만 재난대응의 체계만큼은 상당히 앞서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의 강원도 영동지방 자연재난사례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사하고 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재난문화를 조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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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단장 의례에 대한 탐색적 연구: 사적 자아에서 공적 자아로의 일상적 전환 (An Exploratory Study on Daily Grooming Ritual: Transition from Private Self to Public Self)

  • 허희진;추호정
    • 한국의류산업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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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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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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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Morning grooming is a ritual daily held for transition from private to public life of an individual. Based on the previous literature's definition of the ritual characteristics,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meaning of grooming rituals that are repeatedly performed every morning. Although many studies have conducted ritualistic analysis of the behaviors that are closely related to daily life, few studies analyze grooming from a ritualistic perspective. Establishing the ritual - that is, a person's distinct behavioral pattern-as the core concept, this study reveals the relationship between ritual performers and the ritual's composition t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grooming ritual. The study conducts qualitative research with ten participants to identify the ritual characteristics of every-morning grooming and the factors that influence this ritual. Considering everyday grooming as a behavioral pattern that possesses mostly ritualistic elements, the study examines both the external characteristics that are shown through the methods of grooming and the internal characteristics that reflect the inherent symbolic meaning. This study contributes to extending the scope of the field. By understanding the factors that influence grooming rituals, companies can communicate their marketing messages regarding the step-by-step approach to grooming, thereby supporting consumers to effectively use various grooming products.

조선전기 군례(軍禮)의 정비와 사례(射禮)의 의례화 (A study on the Ritualized of Royal Archery of early Chosun Dynasty)

  • 이왕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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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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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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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조선시대의 군례(軍禮)가 중국 고대의 의례를 답습한 것만이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를 이어 내려오던 전례도 함께 수용되었음을 밝혔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례(射禮)를 들어서 군례의 역사적인 정착과 의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군례는 국가의례인 오례의가 정착되는 성종대에 정비되었다. 군례가 국가 전례서에 공식적으로 오례의 하나로 포함되면서 군사의례가 완비되었다. 그러나 군례의 정비는 중국 고대의 예제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전통적인 부분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중국의 예제는 "주례"의 오례 구조를 계승하였던 당대의 "개원례"를 도입하였으며, 삼국시대의 예제를 계승한 고려의 오례 구도를 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례의 기원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와 주나라 및 당 송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오랜 기간을 통해 정비되고 개선된 의례 형식이 가미되어 정착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례에 활쏘기가 들어간 것은 조선왕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조선초부터 활쏘기는 왕실은 물론 관료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교적 관점에서 활쏘기가 군자의 덕을 살필 수 있는 의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부분도 있으며, 태조를 이은 국왕들이 왕실내 전통적인 행사로 활쏘기를 이어간 것도 한 요인이었다. 활쏘기가 습사(習射)와 관사(觀射)로 정비되면서 점차 의례적인 절차로 규정되었으며 결국 세종대 오례의에 포함되고 성종대 의례로 정비되었다. 습사와 관사는 사례의(射禮儀)로 정비된 이후에도 의례적인 시행만이 아니라 국왕들의 잦은 활쏘기에 맞추어 활발하게 거행되었다. 다만 성종대 성균관 대사례가 정비된 이후 왕실의 활쏘기는 축소되었다. 특히 중종대 이후에는 국가적인 사례의 거행이 드물게 되었으며, 국왕이 활쏘기를 장려하는 것도 조선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이점은 중종대를 전후하여 문치를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계 진출 이후 벌어진 일이라고 보인다. 중종 재위기간 내 국왕이 주재하는 활쏘기가 2회만 거행되었다는 점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초부터 왕실의 장기이며 상무기질을 북돋기에 가장 용이한 방안이었던 사례(射禮)가 쇠퇴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군례를 소홀히 다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초 군례의 정착과 사례의 정비는 상무적 기상이 강조되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 변화양상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중종대 이후 잦은 왜변을 거치면서 상무적인 군례의 시행이나 활쏘기는 권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을 거친 뒤 새로 도입된 명나라의 군제에 맞추어 군례가 변화되고 새롭게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예가 강조되었다. 결국 조선전기의 군례는 그 정착 과정이 국가의례적 속성을 보이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분히 의례적(依例的)인 수준으로 변모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점이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될 조선의 딜레마였음은 물론이다.

광복이후 첫돌 복식의 변천 (Changes in the Ceremonial Dresses for Children's First Birthday Since 1945)

  • Ji, Yoon-Young;Hong, Na-Young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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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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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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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본 연구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첫돌 복식 변화를 시대적으로 고찰, 그 변화 양상과 영 향 요인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연구 방법은 문헌 고찰과 사진 자료를 통한 내용 분석을 주로 하였다. 더불어 자료의 보충을 위해 첫돌 의례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가족, 기성 아동 한복 유통 상인, 상업적 사진사 등-의 면접 조사도 병행하였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1940년대 중반∼50년대 초에는 해방 이후 혼란과 전란으로 인한 물자의 부족으로 첫돌 의례의 명분은 남아있으나 복식 문화는 공백기를 맞는다. 1950년대 중반이후 60년대 전반기는 미국의 경제 원조와 섬유 공업 활성화로 의료의 공급이 원활하여 전기에 비해 의례적 의미를 지닌 첫돌 복식의 착용이 가능해 졌다. 전통 한복을 기본으로 한 위에 서양식 복식 품목들이 섞여서 나타나고 있다 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두드러진 양상은 기성복 산업 의 발달로 전문적 인 기성복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는 기성복화 된 첫돌 복식의 일습 개념을 등장시키게 하였다. 또한 한복이 예복화 되는 경 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로 70년대 후반의 칼라 필름의 보급은 금박과 자수와 같은 다양한 재료와 재단 방법을 사용한 장식화 된 첫돌 복식의 사용을 가속화 시 켰다. 특히 70년대 중반에 소수의 일반에게 입혀졌던 궁중복식의 하나인 당의가 소매없는 당의로 바뀌어 여아의 돌옷으로 입혀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전반기는 칼라 TV의 보급, 비디오 촬영의 보편화로 한복이던 양복이던 일습화 된 첫돌 복식이 대중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후반기에는 국내의 국제적인 행사의 유치와 전통 복식 소개를 위한 전시들을 계기로 왕실 복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여아에게 소매없는 당의를 입히고 남아에게 용포를 입히는 유행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서양식 예복을 입히는 유행이 시작되었다. 90년대에 들어와 아기 전문사진점의 등장은 1 회적인 첫돌 의례에 한복과 서양식 예복, 일상복 등을 다양하게 착용시키는 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변화 양상에도 불구하고 첫돌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옷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그 복식의 구성 이 전통적인 일습 개념을 꾸준히 지향해 온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최근 과열된 아동 산업은 보다 다양한 복식을 입혀서 촬영한 사진으로 특별하게 꾸민 상업적인 기념물들을 남겨주게 하고 있다. 비록 특별한 옷을 준비하여 아동에게 입히는 행위는 유사한 표현 양태이나 지나치게 많은 옷을 갈아 입히는 표현 방식은 지양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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