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은거문화

검색결과 14건 처리시간 0.028초

우담 채득기의 경천대 경영에 나타난 문화경관 요소의 해석 (Interpretation of Cultural Landscape Elements at the Management of Udam Chae Deug-gi's Gyeongcheondae(擎天臺))

  • 이유진;김수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28권4호
    • /
    • pp.127-143
    • /
    • 2010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선비인 우담 채득기가 경영한 경천대 일원의 산수경영에 나타난 문화경관 요소의 해석을 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경영과 자연경물에 대한 명칭부여는 동시대 지식인들의 자연관 형성에 투영되었을 뿐 아니라 정원문화의 유행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담 채득기는 경북 상주의 낙동강변에서 은거하며 산수를 경영하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는데, 그가 경영한 경천대 28경은 성리학적 절의와 충절의식에 입각하여 자연경물에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미의식을 현실화하는 등 산수경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세부적인 경관의 명칭으로는 크게 '대명의리와 충절', '신선사상' 그리고 풍유와 소요자적 삶에 따른 '산수경영의지', 마지막으로 '학문탐구' 등을 상징하였다. 또한, 경천대 일원의 28경처 중 특별히 10가지의 경관을 선택하여 자신이 실제 소요하거나 유희했던 장소를 중심으로 소상팔경의 경관어휘인 시간과 계절 그리고 기상의 변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통한 소우주의 섭리를 이해하고자 한 당시의 산수경영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담 채득기는 자신이 은거한 경천대 일원의 산수경영을 명 청 교체기라는 조선의 상황을 비유하여, 자연의 경물에 이름을 붙이고, 또 암울한 사회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은, 그가 평소 강조한 의리와 절개라는 조선선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가치 있게 내세운 성리학적 자연관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19세기 한중(韓中) 묵연(墨緣)의 상징, 매감도(梅龕圖) (Maegamdo(梅龕圖), Symbol of Chinese and Korean Scholary Comespondence in the 19th Century)

  • 김현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5권1호
    • /
    • pp.16-33
    • /
    • 2012
  • 매화나무는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군자의 덕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역시 매화와 관련된 주요한 회화 형식이다. 이 논문은 구리매화촌사도(九里梅花村舍圖)류의 구성상 기원과 해당 그림들이 조선에 알려지는 과정을 밝히고 매감도(梅龕圖)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 특징을 논의하고자 하였기에 이들 작품이 속한 매화서옥도의 발생부터 검토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매화서옥도를 임포고사(林逋故事)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매화서옥도와 임포고사 간의 관계가 문인의 은거라는 의미로 연결되지만 작품의 구성 방식에 있어서는 임포고사에 기초한 회화류와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다. 방학도(放鶴圖)나 관매도(觀梅圖) 같은 임포 관련 회화에는 대개 한 두 그루의 매화나무와 학이 그려지고 이에 조응하는 문인이 표현된 반면, 매화서옥도는 문인의 은거가 묘사되면서도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구성이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화서옥도는 매화 애호경향의 발생 이후에 그려진 관련 회화처럼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매화와 관련된 회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내지 사군자 일종의 매화도를 비롯해 탐매도(探梅圖) 같은 맹호연(孟浩然)고사에 기초한 산수화가 고려 이후 전 시기에 걸쳐 골고루 제작되었다. 그러나 매화서옥도만은 19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조선보다 빠른 17세기부터 성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매화서옥도라는 유형의 회화가 특정 시기의 문화현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19세기에 매화서옥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원인은 바로 김정희가(金正喜家) 및 신위(申緯)와 오숭량(吳嵩梁)을 비롯해 그의 회화 제작 주문을 전담하여 받았던 장심(張深) 간의 교유 때문이다. 이 교류 속에는 두 종류의 매화서옥도류가 제작되어 오고갔다. 청에서는 부춘산(富春山)아래 동강(桐江)가의 구리주(九里洲) 풍광을 담은 구리매화촌사도가 그려졌다. 구리주는 오숭량이 은거하려고 했던 곳으로, 수십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오숭량의 매벽(梅癖)과 그의 시를 기념하는 '매감공양(梅龕供養)' 행위가 일어났고 그 모습을 담은 매감도가 제작되었는데, 이 매감도는 구리매화촌사도류에 보인 '만매(萬梅)형식'을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신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매감시불도(梅龕詩佛圖)>이다. 이 그림은 북경에 소개되어 장심이 그린 매감도들의 구성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매감도류는 19세기에 조희룡 등에 의해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라고 별칭되는 매화서옥도의 유행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만매서옥도의 발생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단계에 해당된다.

밀양 칠탄정 경영과 칠리탄 16경의 경관특성 (A Characteristics of 16 Scenes of Chilitan and Management of Chiltanjung, Milyang)

  • 김수진;정해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7권3호
    • /
    • pp.22-36
    • /
    • 2019
  • 본 연구는 오한 손기양이 경영한 칠리탄 일원의 경관특성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16~17세기 선비가 지향했던 출처관과 이상적인 경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칠탄정십육경도」에 묘사된 그림과 시문 그리고 현장답사를 진행하여 각 경의 구조와 해석을 진행하였다. 오한은 광해군 4년 조정의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자 은거를 결심하고 낙향하게 되는데, 평소 엄자릉의 은일적 삶을 흠모하여 엄자릉이 칠탄을 경영한 것과 같이 원래의 종천을 칠리탄이라 이름하고 그 주변 정자에 짓고, 낚시하는 장소를 마련하는 등 자연에 귀의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은거를 하고 있음에도 임금과 조정을 걱정하는 등 도학적 출처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칠탄정 원림 건물의 각 기둥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수신, 안빈낙도 등의 성리학적 사유와 무위자연을 표상하고자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36년 모습이며, 읍청당을 중심으로 운강루, 벽립재, 칠탄정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림 주변에는 '진암수석', '기암', '오한손선생장구지소', '조기' 등의 각자가 남아있어 당시의 장소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중건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칠탄정 주변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전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연꽃, 복숭아, 대나무 등이 식재되었다고 하며, 현재 은행나무와 배롱나무, 소나무와 밤나무가 발견되는데, 식물의 상징성과 실용성을 고려하여 식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칠탄정 16경의 경관묘사 방법은 '장소+경관(행위)'의 구조로, 칠탄정을 중심으로 근경, 중경, 원경이라는 장소적 특징을 분류하여 해석하였으며, 칠탄정 일원의 각 경관을 은자를 비롯한, 군자, 신선사상, 향토경관, 태평성대 등을 상징화하여 유교적 이상향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대(元代)의 왕역(王繹)·예찬(倪瓚) 합작 <양죽서소상(楊竹西小像)> 연구 (A Study of Portrait of Yang Zhuxi housed in the Palace Museum in Beijing)

  • 장준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7권2호
    • /
    • pp.114-131
    • /
    • 2014
  • <양죽서소상>은 1363년이라는 분명한 연대를 지닌 원대의 희소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 최초의 초상화 이론인 "사상비결(寫像秘訣)"의 저자이자 중요한 초상화가인 왕역(王繹)의 유일한 현존 작이라는 점, 대표적 산수화가인 예찬(倪瓚)과의 합작이라는 점, 그리고 산수인물화 형식 초상화의 이른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본래 원대의 고관대작 양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명대 이일화(李日華)의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피사인물은 송강지역의 은거 문인으로 강남의 문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양겸이다. <양죽서소상>은 소식(蘇軾)과 같은 은자의 도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은거 문인 양겸을 표현하는데 있어 적절한 선택이었다. 또 예찬이 그린 바위와 소나무는 군자, 문인이라는 전통적 상징성과 맞물려 작품의 의미를 강화시켜 주었다. 양식적으로는 백묘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동시기의 여타 초상화들과 차별화된다. 그러나 안면 표현의 경우 채색이 배제되었음에도 오히려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준다. 반면 신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단아하고 절제된 서예적인 선묘를 구사함으로써 작품의 격조를 높이고자 하였다. <양죽서소상>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의적 성격이 강한 여타 초상화들과 달리 감상적 성격이 강하다.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열람, 감상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로간의 교유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심회를 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백거이의 중은사상과 원림조영 (A Study on the Bai Juyi Jungeun-sasang(中隱思想) and The Garden Construction)

  • 이원호;안혜인;신현실;하태일;김소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3권1호
    • /
    • pp.119-128
    • /
    • 2015
  • 본 연구는 조경학 관점에서 백거이의 중은사상과 원림을 살펴보고 백거이의 조영활동이 갖는 의미와 그의 원림에서 나타난 사상과 조영방식이 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다음과 같다. 첫째, 백거이의 '중은설'은 은일이론을 향상시켰으며 '중은'이론의 탄생은 사대부들의 문화예술 뿐만 아니라 원림 예술까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산 속에 은거하여 원림을 조영하던 이전과는 달리 도회지로 나와 원림을 조영하게 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둘째, 백거이의 원림에 나타난 '호중천지'의 공간원칙은 화려하고 웅장했던 이전의 원림과는 달리 한정되고 소형화된 공간에서 바위의 배치, 동산의 조형, 꽃의 배치 등 자연을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원칙이었다. 원림은 외부 경관만이 아니라 내면세계가 반영된 '심원'의 공간이 되었다. 셋째, 백거이의 시에 나타난 정원조영 행위와 사상은 후에 시가 차운되고 인용되면서 그림으로 그리고 자신의 정원으로 표현되었다. 결과적으로 백거이의 문학적 예술관과 사상은 자신의 원림을 경영했다는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후대 문인원림의 유행과 그 양식적 특징의 형성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넷째, 백거이의 유교적 체득의 경지와 섬세한 미의식은 산체와 수체의 융합, 가산 쌓는 법, 태호석의 미의식 발견을 통해 원림 경관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이후 원림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16~18세기 영·호남 누정에 깃든 문화경관의 의미론적 해석 - 지정 문화재를 중심으로 - (Semantic Interpretation of the Nu-Jeong Cultural Landscape During the 16~18th Century at Youngnam and Honam Area -Focusing on the Designated Cultural Properties-)

  • 이현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5권1호
    • /
    • pp.190-217
    • /
    • 2012
  • 본 연구는 국가지정 또는 시도지정 문화재 중 총 22개의 영 호남 소재 누정을 중심으로 16~18세기 명리를 등지고 초야에 은거한 사림(士林)의 누정 문화를 고찰함으로써, 조영자의 자연관과 누정건립 등의 문화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미의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개별 누정에 작용된 의미론적 경관특성을 밝히기 위한 제안으로 '풍수적 입지 누정명 분석 누정문학 분석' 등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누정의 '입지[風水] 명칭[懸板] 문학[板上詩]' 등의 분석 및 해석 결과를 토대로 한국 누정만이 갖는 특수성을 논한다면, 누정의 입지는 풍수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맥상통함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땅의 모양(物形)을 의미론적 풍수형국으로 해석함으로써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터잡기' 한 특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풍수형국론(風水形局論) 관점에서 본 누정의 입지는 배산임수의 요건을 모두 충족했으며, 지향했던 전형적인 좌향은 남동향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땅의 모양에 대한 직관적이거나 자연론적인 표현보다는,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전통적 경관짜임의 특징을 형이상학적인 해학(諧謔)으로까지 승화시키고자 하는 보편성이 발견된다. 더 나아가 누정의 입지를 광역적 경관인식 체계로 본 의미론적 낙토(樂土) 개념이 표출되고 있다. 한편 누정명은 누정이 위치한 서로 다른 개별적 경관을 응축함으로써 상정된 의미론적인 어휘였다. '누정명의 어의 분석'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인 것은 주변경관을 간명한 어휘로 함축한 것인데, 그 특징은 첫째 '자연예찬(自然禮讚)' 즉 승경(勝景) 및 사시경물(四時景物)에 대한 흥취, 둘째, '유가사상(儒家思想)'과 관련된 경서(經書) 문장(文章) 성리학적 가치관 중국의 고사성어, 셋째, '선현칭송(先賢稱頌)'에 관한 상고성(尙古性), 넷째, 유유자적과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청빈하지만 자존적인 삶의 '풍류(風流)', 다섯째,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관련하여 좌절된 자아를 달래기 위한 치유수단으로써의 '선경(仙境) 갈구' 등이 깊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16세기 초반까지는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명칭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16세기 중반을 넘기며 '자연예찬 및 선현칭송'의 제재가 증가하면서 유가사상에만 편중되지 않는 제재 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문학이란 예술장르를 빌어 아름다운 자연에 비긴 작가의 심상을 투영시킴으로써 내면의 문제를 완곡히 토로한 누정문학의 주요한 특성으로는 '자연예찬 풍류 도가사상 및 유가사상 선현칭송' 등의 보편성과 '우국충정 연군지정 과거회상' 등의 키워드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팽배했던 '성리학적 유교관'에도 불구하고 누정문학을 주도한 일의적(一意的) 개념이 '자연예찬 및 풍류'였음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난 이상향의 경관 특성 (The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Utopia Shown in the Travel Records of Jirisan Mountain)

  • 소현수;임의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3호
    • /
    • pp.139-153
    • /
    • 2014
  • 본 연구는 지리산 유람록 23편을 대상으로 하여 문인들이 인식한 이상향의 경관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문장 속에 묘사된 '무릉도원(武陵桃源)', '별천지(別天地)', '동천(洞天)', '청학동', 그리고 '은거지'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지리산 이상향의 유형으로 이해하고, 이들의 경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문인들이 꿈꾼 지리산의 '무릉도원'은 신비감을 주는 깊은 산속, 협곡 안에 마련된 넓고 평평한 터, 감나무와 밤나무 등 향토식생, 닭과 소 등 생리(生利)를 만족시키는 토속경관이 반영된 이상향이다. '별유천지(別有天地)'의 '별천지'는 선경(仙境)과 승경 개념이 결합된 이상향이다. 또한 문인들은 은일에 적합한 위요된 지형 구조를 가진 곳에 이름을 붙이거나 일정한 영역의 승경지를 한정하는 개념으로 '동천'을 사용하였다. 지리산에 설정된 '청학동'은 불일암 일대 협곡과 불일폭포로 이루어진 수석(水石)경관, 소나무와 대나무 등 식생경관을 토대로 하여 최치원의 설화와 바위글씨로 전승되었다. 문인들은 지리산에서 배산임수형 지세, 교역 가능한 하천, 대숲으로 위요된 평평한 토지, 유실수 위주의 식생, 아름다운 산수를 갖춘 마을을 지상에 실현된 이상향으로 인지하였다. 이것은 대자연 안에서 적당하게 노동하며 사는 인간 세상의 모습과 같다. 살펴본 바와 같이 본 연구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유산(遊山) 문화와 이상향의 관련성, 그리고 선계(仙界)로 인식한 지리산의 여건을 파악하고, 중국에서 전래된 개념부터 토착화된 현실적 이상향까지 다양한 전통적 이상향을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선불교전통(禪佛敎傳統)에서 본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 (Han Yong-un's View Point of Buddhism from the Perspective of Zen Buddhism)

  • 정연수
    • 한국철학논집
    • /
    • 제38호
    • /
    • pp.163-187
    • /
    • 2013
  • 본고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전통(傳統) 속에서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관(佛敎觀)을 고찰하였다. 한용운은 원효(元曉)의 지관쌍운론(止觀雙運論)과 지눌(知訥)의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의 전통 속에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선정(禪定)의 본질을 강조한다. 한용운은 당시 선객(禪客)들이 중생들을 외면하고 산림에 은거하면서 처소와 몸가짐만을 적적(寂寂)하게 하려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행자의 일상 속에서 적적성성한 선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사상적 특징이 있다. 한편, 한용운은 김시습 이래로 조동종(曹洞宗)의 전통이 담긴 "십현담(十玄談)"을 주해하면서 조동오위(曹洞五位)에 의거하지 않고 구세정신에 입각하여 임제선풍(臨濟禪風)으로 일관하는 특성이 있다. 굳이 한용운의 "십현담주해"를 조동오위에 비춰보자면, 중생들의 편위(偏位) 속에서 진인(眞人)의 정위(正位)를 밝힌다는 편중정(偏中正)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현담주해"에서는 조일불교동맹조약(朝日佛敎同盟條約)으로 조선불교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일본조동종 승려들의 만행을 질타하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용운의 불교관을 종합해 보자면, 선불교(禪佛敎)의 전통 속에서 애국애민(愛國愛民)의 정신을 담아내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산수(山水) 와유(臥遊)와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續漁父詞)> (Wayu during the late Chosun Period and Gyeongsan Lee Han Jin's )

  • 조은별
    • 동양고전연구
    • /
    • 제70호
    • /
    • pp.185-210
    • /
    • 2018
  • 본고는 이한진 편 "청구영언(靑丘永言)"의 편찬자인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1732~1815)의 <속어부사(續漁父詞)>가 이한진의 문예 활동과 풍류적 지향, 그리고 조선 후기 사족들의 산수(山水) 와유(臥遊) 취미를 배경으로 창작되었으리라 보고 <속어부사>를 살폈다. 이한진은 외가인 안동(安東) 김문(金門)의 혈연을 바탕으로 연암 일파와 교유하였는데, 이들의 풍류 현장에 대한 기록에서 이한진의 음악적 기질과 풍류적 지향을 알 수 있었다. 이한진은 노년에 경기도 영평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편찬한 가집인 이한진 편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품들의 주제적 지향과 이한진이 창작한 시조 작품들에서도 역시 이한진의 풍류적 모습이 확인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번화한 도시 공간을 떠나 자연 속에 머물 수 없는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산수 자연을 추체험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와유(臥遊)였다. 이들에게 산수 유람의 실제 경험 유무는 그리 긴치 않은 문제였으며, 이들은 효과적인 와유를 위해 제 문예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한진과 그 주변 인물들의 문예 활동은 이 같은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한진이 경기도 영평에서의 산거(山居)에도 불구하고 <속어부사>를 창작한 것 역시 현재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 형상을 좀 더 효과적으로 추체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한진의 <속어부사>는 어부 형상을 소재로 한 여타의 국문시가에 비해 좀 더 초속적인 자연 형상이 그려졌다. 실재의 자연 형상을 볼 수 없다는 현실적 정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핍진하게 묘사하여 효과적인 와유를 가능케 하고자 했던 욕망 사이의 긴장은 집구시의 성격을 강하게 띤 <어부사>라는 형식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항 칠인정원림(七印亭園林)의 조영특성과 '괴목(槐木)' 식재(植栽)의 문화변용(文化變容)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Design and Acculturation of Planting of 'Guǐ(槐)' in Chirinjeong Wonlim of Pohang)

  • 노재현;한상엽;김정문;정푸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5권3호
    • /
    • pp.22-31
    • /
    • 2017
  • 포항 칠인정원림의 건립취지, 조형의도 그리고 변천과정 등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조 누정 조영의 시대적 감각과 조영의장을 조명하고, 원림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식재의 문화변용 현상을 살펴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2주의 괴목(槐木) 식재로 인해 쌍괴정(雙槐亭)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은 칠인정(七印亭)은 고려말 관료 출신의 장표(張彪)가 태종9년(1409) 초곡리 사일마을에 건립한 은거형 정자이며, 칠인정원림은 쌍계구곡(雙溪九曲)의 제3곡인 초곡(草谷)의 핵심이기도 하다. 칠인정원림은 사일마을 비보숲 초입의 진입부(進入部)와 칠인정 및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로 이루어진 정자부(亭子部) 그리고 방지방도(方池方島)의 지당과 배롱나무로 이루어진 지당부(池塘部)로 구분된다. 칠인정 기문 내용이나 아들과 사위 7인의 인수(印綬)를 쌍괴수(雙槐樹)에 내건 것에서 기인된 당호(堂號)로 볼 때, 초건 시 식재한 괴목과 그 이후 보식(補植)한 수종 또한 삼공(三公)의 지위와 학자수(學者樹)를 상징하는 회화나무(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뿐만 아니라 영조21년(1745) 보식한 수종이 현재 칠인정에 존치하는 느티나무(괴)라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칠인정 담장 밖의 회화나무가 당시 식재한 그 수목임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느티나무와 함께 칠인정원림에 심겨진 3주의 회화나무는 인동장씨 후손들이 회화나무(홰)와 느티나무(괴)의 차이점을 인식하였음을 알리는 최소한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회화나무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한편으로 회화나무로, 다른 한편으로 느티나무로 인식되었고 점차 구입용이성, 성장속도, 장수목으로의 성장가능성에서 회화나무와 비교우위에 있는 느티나무를 회화나무 대용(代用)으로 혼용한 자발적 문화변용 현상을 칠인정원림의 괴목 식재사례를 통해 목도(目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