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위진시기(魏晋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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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의정사(醫政史)에 관한 연구 -관우위진남북조적의정사연구(?于魏晉南北朝的醫政史硏究)

  • 김기욱;박선주;양준;박현국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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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2호통권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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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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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의약학적존재화발전인소유내재인소(?約學的存在和發展因素有內在因素), 내재인소리유학문본신적특수이론계통(內在因素里有學問本身的特殊理論系統), 함유혼풍부적과학의의(涵有婚豊富的科學意義), 임상치료효과(臨床治療效果), 병인적신뢰등(病人的信賴等). 외재인소리유정치(外在因素里有政治), 정책(政策), 경제(經濟), 문화방면등등(文化方面等等). 저반인소중의학정책적영향시최직접화결정성적(著般因素中?學政策的影向是最直接和決定性的). 병차의학정책적직접인소리유의약방면유관적제도(幷且?學政策的直接因素里有?約方面有?的制度), 정책(政策), 법평등(法平等), 간접인소리유국가전장제도(間接因素里有國家典章制度), 국가방침화정책등(國歌方針和政策等). 재고대봉건사회상정책적개념시국가(在古代封建社會上政策的槪念是國家), 정당재특정역사시기상위료실현노선화임무(政?在特定歷史時期上爲了悉現路善和任務), 규정적행동준칙(規定的行動准則), 비여선황제적소(比如宣皇帝的沼), 령(領), 칙(勅), 유급정부적각중정령등(愉及政府的各?政領等). 본논문시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상기고적(本論文是大韓韓?學原典學會指上寄稿的)[관우진한시기의정사연구(?于秦漢時基?政史硏究)]상여천명(上如闡明), 통과화중국량준교수공동연구적연속적연구결과(通過和中國梁畯敎授共同硏究的連續的硏究結果). 지우위진남북조시기적의정사(至于魏晉南北朝試期的?政史), 논자관우위진남북조정치개요(?者?于魏晉南北朝政治槪要), 의약정책(?約政策), 의정조직적초보구조(?政組織的初步柩?), 의약정책화의약발전관계(?約政策和?約發展關系), 관우의정평가와형성원인등분성오개방면후(?于?政?伽和形成原因等分成五介方面后), 진행연구병정리보고기결과(進行硏究幷整理報告基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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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이묘 명문전 낯설게 바라보기: 중국 위진시기 명문전과의 비교를 통해 (New Perspectives on the Inscribed Bricks from the Tomb of Jang Mui: A Comparison with Chinese Inscribed Bricks from the Weijin Dynasties)

  • 김병준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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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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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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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장무이묘 명문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낯설다. 첫째, 명문전이 백여 점에 육박할 정도로 많다. 둘째, 똑같은 명문이 다수 확인된다. 셋째, 소성 방식 등 제작 방식이 다양하다. 넷째, 명문이 찍힌 전돌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다섯째, 명문이나 문양이 찍힌 면과 아무 문양이 없는 면의 위치 및 명문의 상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여섯째, 명문의 대부분이 반서로 찍혀 있다. 일곱째, 명문전 표면에 흰색 석회가 칠해져 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중국 위진시기의 명문전과 비교하면 장무이묘의 명문전은 더 이상 낯선 물건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명문을 문자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자가 전돌에 압인된 하나의 기물로 이해하여 그것이 무덤 속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었는지를 주목하고, 이를 관람자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장무이묘의 명문전이 갖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원굉(袁宏)과 갈홍(葛洪)의 유도(儒道)관계론 연구 (A study on the perspective of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ism and Taoism of Yuan-hong & Ge-hong)

  • 李溱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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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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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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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중국철학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이다. 두 학파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현실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상이한 이론체계를 세운다. 다만 중국철학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러한 상이한 이론을 하나의 체계 속에 엮으려는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위진(魏晋)시기 현학(玄學)에서는 자연(自然)과 각수(名敎)의 관계를 토론하며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설정에 골몰한다. 동진(東晋)시기의 지식인들은 바로 전대(前代)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서, 직접적 방식으로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설정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펼친다. 본 논문은 동진(東晋)시기 유도(儒道)관계론의 대표적 학자로 원굉(袁宏)과 갈홍(葛洪)의 이론을 살펴본다. 원굉(袁宏)은 명교(名敎)의 효용성과 가치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다만 명교(名敎)의 근본과 근거 찾기에 골몰하여 전대(前代) 자연(自然)과 명교(名敎)의 관계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본유용(道本儒用)'의 관점을 제시한다. 갈홍(葛洪)은 신선도교(神仙道敎)의 입장에서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및 두 학파 이론의 직접적 비교를 통해 '도본유말(道本儒末)'의 이론을 정립한다. 이들의 이론은 근본과 작용, 근본과 말단의 관계 설정으로 유가와 도가 두 학파의 관계를 설정하는 동시에, 자연(自然)과 명교(名敎)의 관계 문제를 보다 심층적 방식으로 이론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향후 중국철학에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이라는 문제의식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연(李延)의 중풍론(中風論)과 장개빈(張介賓)의 비풍론(悲風論)의 비교 연구;관우이연중풍론화장개빈비풍론적비교연구

  • 조학준;김용진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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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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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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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통과대이연화장개빈관우중풍관점적비교연구, 이급기대중풍적분류(以及基對中風的分類), 증상(證狀), 치료(治療), 예후적관점진행분석득출여하결론(豫後的觀點進行分析得出如下結論): 이연파중풍적원인분류위진중풍(李挻把中風的原因分類爲眞中風), 겸중풍(兼中風), 류중풍(類中風), 사중풍(似中風), 종이조취료구분외풍여내풍계기(從而造就了區分外風與內風契機). 대어중풍적원인(對於中風的原因), 장개빈주장배제외풍근한어내풍적관점(張介賓主張排除外風僅限於內風的觀點). 재차기초상(在此基礎上), 설기여조헌가주장진수고갈급진화허시기원인소재(薛己與趙獻可主張眞水枯褐及眞火虛是基原因所在), 대차관점(對此觀點), 장수신적"중풍각전"중, 기유찬동적(旣有贊同的), 역유지비판의견적내용(亦有持批判意見的內容). 대어중풍적증상(對於中風的證狀), 이연근거병사소재분위중장, 중부(中부), 중혈맥(中血脈), 중경등(中經等). 우기대중경증적분류(尤基對中經證的分類), 재기타의서중시무법견도적분류적표준(在基他醫書中是無法見到的分類的標準). 저가이인위(這可以認爲), 타이 "금궤요략" 위의거(爲依據), 시부합내풍적증상분류(是符合內風的症狀分類). 장개빈파비풍적증상종대적방면분위경병화장병(張介賓把非風的症狀從大的方面分爲經病和臟病), 연후재파경병세분위경증화위증(然後在把經病細分爲經證和危證), 장병세분위초경증화위증(臟病細分爲稍經證和危證). 진관경병출현어지체(盡管經病出現於肢體), 이장병출현정신이상(而臟病出現精神異常), 단시경병여장병균유경증화위증(但是經病與臟病均有經證和危證). 저일주장시흔유지이성적. 대중풍적치료(對中風的治療), 이연대체상견지료금원이전적치료방법. 기용신한혹신온거풍화담(旣用辛寒或辛溫去風化痰), 혹용신온발한(惑用辛溫發汗), 혹용고한공리등(或用苦寒攻裏等). 장개빈지출상술방법대원기쇠약적중풍부적합사용(張介賓指出上述方法對元氣衰弱的中風不適合使用), 차장수신지출차시거풍치법실제상부적합내용풍이적합어외풍적치료(且張壽신指出此時去風治法實際上不適合內風而適合於外風的治療). 장개빈인위비풍적원인시진양여진음지허이불시풍담(張介賓認爲非風的原因是眞陽與眞陰之虛而不是風痰), 진관시급성기(盡管是急性期), 여과몰유담증(如果沒有痰證), 타견결반대사용거담지법(他堅決反對使用祛痰之法). 재중풍치료상(在中風治療上), 장개빈인위한다(張介賓認爲汗多), 소변소(小便少), 시진액부족소치(是津液不足所致), 소이수유열증역불요사용삼리지법, 병지출유뇨증시신허소치적위증(幷指出遺尿症是腎虛所致的危證), 종이진일보강조료진액적중요성(從而進一步强調了津液的重要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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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거원절교서(與山居源絶交書)」에 드러난 혜강(?康)의 은일관(隱逸觀) (A study on the perspective of hermit of Ji-kang's letter to Shan Ju-yuan in breaking off relations)

  • 이진용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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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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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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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서(史書)의 평가와 연구 성과에 따르면, 혜강은 위진(魏晋)시기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학자이다. 다만 현재 몇몇 연구자들은 혜강이 현실에서 벗어나 사회제도를 부정한 피세주의자로 평가한다. 논자는 바로 이러한 관점이 혜강의 철학을 이해하는 올바른 이해방식인가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혜강이 꿈꾸었던 이상과 현실적 삶의 모습이고, 논의는 그가 산도(山濤)에게 보낸 절교서인 "여산거원절교서(與山居源絶交書)"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이를 통해 혜강이 현실사회에 대한 기본적 반응 양식, 혼란한 현실에 대한 반성 및 새로운 이상으로의 전환이라는 구도를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여산거원절교서(與山居源絶交書)"에 드러난 혜강의 인생이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혜강은 본래 소극적이며 직접적인 현실참여를 꿈꾸었지만, 현실에서의 실현불가능을 직시하고 '은일(隱逸)'이라는 새로운 인생이상을 모색한다. 둘째, 중국의 전통적 은일관(隱逸觀)에 따르자면, 혜강은 유도(儒道)은일관에 대한 양가적 입장에서 도가(道家)은일관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마지막으로, 혜강은 소극적이고 피세적 방식으로 현실의 갖가지 문제에 접근했지, 결코 현실을 저버린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이와 같은 현실사회에 대한 이해와 인생이상은 그의 철학체계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발해 묘지(墓誌) 양식의 형성배경과 영향 (The study on the formation and influence about the epigraph form the Bal-Hae Dynasty)

  • 박재복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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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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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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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정혜(貞惠) 정효(貞孝)공주의 묘지(墓誌)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발해 묘지 양식의 형성 배경과 특징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발해의 묘지 양식은 다음과 같은 고고학적인 특징과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발해의 묘지는 규형(圭形)의 비갈(碑碣)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규형으로 된 비(碑)는 동한(東漢) 시대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위진(魏晉) 시대에 이르러 무덤 앞에 묘비 세우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함에 따라 무덤 안에 규모가 작은 비갈 형태의 묘지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출토된 발해의 묘지 2점은 동시대의 당나라나 통일 신라의 그것과는 달리 규형의 비갈 양식을 띠고 있다. 이는 위진 남북조 시기의 비갈 양식이 고구려에 영향을 끼쳤고 다시 고구려의 비갈 양식이 고분벽화와 함께 발해의 묘지 제작 방식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인근 왕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스스로의 독특한 묘지 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발해의 묘지 형태는 전형적인 규형(5각형)에서 뾰족한 윗부분을 다시 반으로 나누고 가로로 윗부분을 잘라 내어 사다리꼴의 변형된 규형(6각형)으로 변화 되었는데, 이는 이전과 동시대의 주변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고유한 양식이다. 셋째, 정혜공주묘지 정면의 테두리선과 문양도 새롭게 등장하는 양식으로, 발해의 묘지에서는 미학적인 기준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듯하다. 정혜공주의 묘지는 우선 비 몸돌의 정면에 실선을 새겨 넣어 장방형의 몸체와 사다리꼴의 이수(?首) 부분으로 구분하고, 다시 사면의 가장자리에서 두 선을 긋고 그 사이에 식물의 덩굴문양을 새겼으며, 윗부분의 사다리꼴 안에는 꽃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써 한층 화려한 모습을 보인다. 넷째, 발해의 묘지 양식은 인근 지역에 성립된 후대 왕조의 묘지 양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발해의 영향을 받은 고려는 물론 요, 송, 금, 원 등의 묘지에서도 발해묘지 양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 거문고 연구 재검토 (A Re-examination the study on the Gogureoy Geomungo)

  • 최헌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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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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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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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기원한 악기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선비등 지식층의 애호 악기가 되어 '백악지장(百樂之丈)'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거문고의 우리 음악문화에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하겠는데, 이 악기의 기원이 외래의 와공후(臥??)라는 것을 넘어 고구려의 거문고 자체가 부정되고 와공후(臥??)만을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거문과와 관련된 연구는 여러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 연구 주제는 주로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 제작설을 인정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거문고류 현악기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초기에 부정되던 거문고 와공후(臥??) 기원설은 임겸삼의 주장대로 고구려 거문고가 모두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왕산악이 진(晉)의 와공후(臥??)를 개조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와공후(臥??) 기원설을 인정하고 그 시기가 언제인가에 연구의 초점을 둔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여럿의 거문고류 현악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이들을 비교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류 악기를 다시 검토해본 결과 8개의 고구려 고분에 나타나는 10개의 고구려 거문고류 현악기는 단순히 금(琴), 쟁(箏), 축,(筑) 와공후(臥??), 거문고로 단정 짓기 쉽지 않았다. 조금씩 그 형태와 연주자세, 괘와 술대의 유무, 줄의 수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은 고분벽화의 정밀 묘사의 부정확성을 떠나서, 악기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또 그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그 명칭을 금(琴), 쟁(箏), 축(筑), 와공후(臥??), 거문고라기 보다는 금(琴)류, 쟁(箏)류, 축(筑)류, 와공후(臥??)류, 거문고류라 해야할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들 악기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류 악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유된 생각인데, 이는 고구려에서 거문고가 정착되기 전에는 다양한 거문고류 현악기가 연주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적설에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것도 문제로 보았는데, 그것은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즉 공후인(??引)에 등장하는 공후(??), 즉 와공후(臥??)를 고려한다면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설은 믿기 어려우며, 고구려보다 더 이전 시기부터 거문고류의 현악기를 연주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무도하가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기원전 3-4세기의 악기로 신강(新疆)지역에서 공후(??)가 발굴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이 지역이 중국에 속한 곳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공후(??)는 외래 악기가 분명하고, 중국에 전래된 이후 금(琴), 슬(瑟), 쟁(箏) 등 악기의 영향으로 와공후(臥??)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시기는 위진(魏晉)시대의 고분에 괘가 있는 와공후(臥??)류 악기의 그림과 토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빨라도 한대(漢代)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중국에서는 아직 공후(??)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고조선에는 공후(??)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 전래 과정은 중국을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또 와공후(臥??)가 외래의 세워 연주하는 하프류의 공후(??)를 뉘여 연주하는 악기로 개조한 중국의 악기로 주장하는 것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즉 중국에 와공후(臥??)가 생기기 이전 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고조선에 와공후(臥??)가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문고의 기원이 된다는 와공후(臥??)의 발생지(發生地)는 혹시 고조선(古朝鮮)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설혹 한(漢) 무제(武帝) 때 공후(??)(와공후(臥??))가 만들어 졌다는 설이 사실이고 이에 따라 뉘여타는 공후(??), 와공후(臥??)가 한대(漢代)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이 진(晉)에서 전래된 와공후(臥??)를 개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고조선(古朝鮮)에 이미 와공후(臥??)로 추정되는 공후(??)가 있었으므로 고구려 사람들이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와공후(臥??)?)을 몰랐을리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칠현금(七絃琴)이 중국 전통의 琴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한(漢)의 문화와 교류가 많아서 한(漢)의 고취(鼓吹)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한(漢)의 금(琴) 역시 이미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이 금(琴)이더라도 고구려 사람들이 그 연주법을 몰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거문고를 굳이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을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앞에서 살핀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고구려의 거문고는 금(琴)이든 와공후(臥??)든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를 개조해서 만들었다기 보다는 고조선에서부터 내려오던 거문고류 현악기를 개량하여 만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다만 금(琴)이든 중국에서 만들어진 공후(??)든 혹은 쟁(箏) 슬(瑟) 축(筑) 등의 악기가 고구려에 전래되었다면 이들이 거문고 창제에 참조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그러나 거문고 창제의 원형을 굳이 외래 악기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 전래의 거문고류 현악기가 있었고 이를 토대로 외래의 현악기를 참조하여 거문고를 창제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좀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연구해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문제라 하겠으나, 적어도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고구려 거문고를 보는 시각을 갖춰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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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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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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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