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위정(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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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인(治人)의 차원에서 본 『대학(大學)』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로의 학문적 심화 (Academic Enrichment from The Great Learning(大學) to The Essentials of Sagely Learning(聖學輯要) when looking at it in the dimension of Governing of Others or Governance of humankind (治人))

  • 신창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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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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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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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는 치인(治人)의 차원에서 중국 유학이 조선 유학으로 전변(轉變)하는 과정을 정돈한 것이다. 특히, "대학"의 재해석이자 학문적 심화인 "성학집요"를 분석하여 조선시대 "대학"의 수용 양상을 탐구하였다. "대학"은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제왕학(帝王學)이자 성학(聖學)의 기본교재였고, 율곡의 "성학집요"는 그것의 총결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율곡은 "성학집요"의 체제를 크게 다섯 편으로 구성하고, "대학"의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을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이중 치인은 제3편 "정가(正家)"와 제4편 "위정(爲政)"에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정가"는 "대학"의 제가(齊家) 내용을 세분화하여 실제로 가문에서 행해야 하는 핵심 사항을 명확하게 정돈하고 있고, "위정"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내용을 심화하여 시대정신의 인식 및 국가 경영의 실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제3편 "정가"에서는 "대학"의 '제가(齊家)' 내용을 세분화하여 '효경(孝敬)', '형내(刑內)', '교자(敎子)', '친친(親親)', '근엄(謹嚴)', '절검(節儉)' 등, 실제로 집안에서 행해야 하는 핵심 사항을 명확하게 정돈하였고, 제4편 "위정"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내용을 심화하였는데, '용현(用賢)', '식시무(識時務)', '법선왕(法先王)', '안민(安民)', '명교(明敎) 등 시대정신의 인식과 국가 경영의 실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제2편의 "수기(修己)"를 바탕으로 치인(治人)으로 나아가는 유학의 기본 체제를 잘 보존하면서도 상황에 맞는 실천 지침을 제시하여 학문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그것은 중국 유학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화과정을 거친 조선 유학의 특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조선 민족이 지닌 인간과 학문, 정치의 특성을 이해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비장 정맥 폐쇄로 인한 단독 위정맥류 출혈: 두 건의 증례 보고 (Isolated Gastric Varix Bleeding Caused by Splenic Vein Obstruction: Two Case Reports)

  • 박주영;이상준;이형남;현동호;박성준;조영종
    • 대한영상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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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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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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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좌측 단독 문맥고혈압은 비장 정맥이 폐쇄되어 생기는 드문 임상 질환이다. 비장 정맥의 혈전증 혹은 외부 압박으로 인해 근위부 비장정맥의 고혈압이 발생하게 되며, 비장의 혈류는 짧은 위 정맥, 관상정맥, 위대망정맥 같은 측부혈관을 통하여 상장간막 정맥 혹은 문맥으로 흘러가게 된다. 위장관 출혈을 유발하는 좌측 단독 문맥고혈압에는 개복 비장절제술이 첫 번째 치료방법으로 추천된다. 하지만 중재시술을 통한 치료가 수술적 교정을 원치 않는 환자들에게는 임상적으로 유용한 치료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위정맥류 출혈을 가진 좌측 문맥 고혈압에 대한 두 개의 증례를 다루고자 한다.

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기의 복식문화 소고 (The Costume of the Wejung-chuksa period in hanmal)

  • 정혜경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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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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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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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The Study is to find out the thought of costume of the people who advocated the Wejung-chunksa. Conclusions are described as follows 1. The action to boycott western goods was the early response in the Wejung -chuksa Thought. The reason were in fear of ruin in chosun industry and worry about the westernizing the Korean. 2. The people of the Wejung-chuksa had the conservative character in order to maintain the traditional public order and the costume. They thought that costume have a role to distinguish between man and woman , the rich and the poor and so on. Therefore acceptance the wastern constume style meant that the Korean became a savage. So that they rejected the King's order about the dress-system reformation in 1884, 1895. That pointed that their ultimate purpose was to keep the traditional rule. 3. In appearance the purpose of the short-hair law was good for health. But it meant to destory the traditional order and to symbolize the civilization . Especially the short -hair in the people of Wejung-chuksa meant the destruction of the traditional rule and casting away the courtesy. Therefore they wanted to keep the value of the traditional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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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맥류 출혈에서 Balloon-occluded Retrograde Transvenoun Obliteration(BRTO)의 유용성 평가 (Evaluation of the efficacy of BRTO(Balloon-Occluded Retrograde Transvenous Obliteration) in the patients with acute gastric variceal bleeding)

  • 이선우;이관섭;이형진;장용철;유명선;고기영
    • 대한방사선협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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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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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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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To evaluate the efficacy and safety of balloon occluded retrogade transvenous obliteration (BRTO) to treat acute gastric variceal bleeding. Between October 2001 and April 2002, seven patients(M : F = 6 : 1 : mean age, 55yrs) with acute gastric variceal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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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송병선의 놀이방식과 의의 - 그의 유기를 바탕으로 - (The Play Method and Significance of Song Byung-seon(宋秉璿) - Based on His Travel Essay(遊記) -)

  • 유영봉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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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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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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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생전에 유림(儒林)의 신임을 얻었고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공직을 거부하고 재야에서 정진하고 후학 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연재는 고종에게 을사조약의 폐지를 간청하였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선비의 양심으로 회덕(懷德)에 있는 고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재는 사림(士林)의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면서 국권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왕과 백성, 유림에게 남기고 왕에게 최후의 호소를 보낸 것이다. 이후 1962년 연재는 건국훈장을 받았다. 송병선의 여행은 일생에 걸쳐 이루어졌다. 22개의 길고 짧은 여행기가 남아있다. 소풍은 주로 육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이 말이나 노새를 탔고 때때로 수레나 가마를 사용했다 또한 그는 때때로 수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일부 여행기에는 내륙 수로와 해로를 이용한 기록이 있으며 조상 유물을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가문의 계승이라는 사명을 재확인하고 선조들의 찬란한 위업의 일부가 되겠다는 의지도 확인된다. 또한 견학에는 경전 낭독과 성리학 토론이 추가되었으며 그의 여행은 성리학의 세계관을 널리 알리고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연재는 선조들이 남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침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그리고 그는 과감하게 나라를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났다.

"난경(難經)"난자탐원(難字探原) -이(以)'육십팔난(六十八難)'위예(爲例) -"난경(難經)"의 어려운 글자의 근원에 대한 연구 -'육십팔난(六十八難)'을 예로 들어-

  • 왕지령;임소경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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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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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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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난경(難經)"의 오유혈(五兪穴) 이론(理論)이 가장 많이 제기되는 문제는 '육십팔난(六十八難)'의 오유혈(五兪穴)의 주치작용(主治作用)이다. "영추 본수편(靈樞 本輸篇)"에서는 다만 오유혈(五兪穴)의 명칭과 위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지, 계통적인 주치에 대한 설명이 없고, '육십팔난(六十八難)'에서 명확히 5가지 종류의 질병에 대해서 귀납(歸納)하고 오유혈(五兪穴)이 주관하는 병증(病證)을 분별하여 후세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난경(難經)"에서 오유혈(五兪穴)에 대해서 물이 흐르는 형상을 비유하여 사지(四肢)에서 체간(體幹)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내경(內經)"의 십이경맥(十二經脈)이 여환무단(如環無端)하는 체계와 전혀 부합하지 않아서 학문과 임상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해독하기 위한 심도 있고 다양한 연구가 진행된 결과 고문자(古文字)의 해독(解讀)잘못된 계산식을 위한 공구서(工具書)들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본 논문은 그러한 고문자(古文字) 해독(解讀)의 연구방법(硏究方法)을 통해 "난경(難經)"의 오유혈(五兪穴) 이론(理論)의 난제(難題)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형수경합(井滎輸經合)에 대해서 "난경(難經)"의 '육십팔난(六十八難)'에서 "소출위정(所出爲井), 소류위형(所流爲滎), 소주위유(所注爲兪), 소행위경(所行爲經), 소입위합(所入位合)"이라고 설명한 그 것 중에서 출(出), 류(流), 주(注), 행(行), 입(入)과 정(井), 형(滎), 유(兪), 경(經), 합(合)의 글자를 고문자(古文字) 해독(解讀)의 측면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이를 의학적(醫學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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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A를 이용한 스마트 교통안전 시스템의 만족도 분석 연구 (A Study on the Satisfaction Analysis of Smart Traffic Safety Systems using Importance-Performance Analysis)

  • 홍기만;김종훈;하정아;김광호;김종훈
    • 한국재난정보학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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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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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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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연구목적: 본 연구는 교통안전 향상을 위해 적용중인 스마트 교통안전 시스템에 대하여 이용자의 만족도 분석을 통한 개선 사항을 도출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방법: 설문조사 기반의 IPA 분석을 통해 운전자와 보행자 그룹의 시스템 및 서비스 개선 항목을 도출하였다. 연구결과: 분석 결과, 운전자와 보행자 그룹 모두 Quadrant 1(Keep up the Good Work)은 '위정정보 인지성', Quadrant 3(Low priority)은 '주의정보의 정시성'으로 나타났다. 반면 운전자 그룹에서 Quadrant 1(Keep up the Good Work)로 분석된 'AI 디스플레이 적합성'이 보행자 그룹에서는 Quadrant 3(Low priority)으로 나타났다. 결론: 스마트 보행안전시스템은 이용자에 따라 만족 요인이 달라질 수 있으며, 이용자 중심의 시스템 구축 및 서비스 제공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동무(東武) 이제마(李齊馬)와 최문환(崔文煥)의 난(亂) (Dong-Mu Lee Je-Ma and The Rising of Choi Moon-Hwan)

  • 박성식
    • 사상체질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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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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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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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연구 목적 : 동무 이제마는 1984 년에는 '한국문화예술선현(韓國文化藝術先賢)' 50인 중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고, 1996년에는 12월이 '이제마의 달'로 지정되어 그의 업적을 기념하였으나, 일부 역사가는 그가 1896년 함경도(咸慶道) 의병장(義兵將) 최문환(崔文煥)을 잡아 가둔 인물이라 하여 그의 업적 평가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본 연구는 1896년 함흥에서 일어난 소요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 및 발생 동기와 경과 과정을 규명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평가(評價)를 내리고 이를 통해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적(思想的) 연원(淵源)을 연구하는데 단서를 찾고자 한다. 연구 방법 : 본 연구는 먼저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과 을미의병에 대해 살펴 보고 1896년 (병신(丙申)) 함흥에 서 최문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정부측(政府側) 기록, 의병(義兵)(최문환(崔文煥))측(側) 기록, 이제마측(李濟馬側) 기록,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이 나타나는 기타(其他) 사료(史料)들을 중심으로 비교 검토하였다. 연구 결과 및 결론 : 1896년 2월 함흥(咸興)에서 일어난 혼란은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폭발한 을미의병운동의(乙未義兵運動)의 일환으로 최문환(崔文煥)이 중심이 되어 단발(斷髮)을 강요하던 관리(官吏)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때 이제마(李濟馬)는 최문환을 붙잡아 가두고 난(亂)을 진압하여 훗날 '의병을 탄압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수구(守舊)와 개화(開化)가 충돌하는 시기였으며, 이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있을 수 있는 원산(元山) 일본군(日本軍)의 공격으로부터 주민(住民)의 안전(安全)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을 근거로 보아 이제마는 유생의병(儒生義兵)들이 주장하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주자학적(朱子學的) 문화이념(文化理念)이나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정치이념(政治理念)과는 다른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면적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한국(韓國) 민족운동사적(民族運動史的) 측면(側面)에서 의병장(義兵將) 최문환(崔文煥)에 대한 좀 더 많은 연구(硏究)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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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현실인식과 대응 (The awareness and response to reality of Yoon Hee Soon, a female fighter for independence)

  • 신성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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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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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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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강원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에 따른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 그리고 아들 유돈상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집안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화서학파였던 고흥 유씨 일가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보다는 아름다운 과거로의 복귀와 복원을 염원했고, 의병을 일으킨 것 또한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친정과 시가 모두 화서학파였던 윤희순 역시 그들과 동일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된 동인 역시 충 효 열과 같은 중세적 가치였다. 특히 집안의 안사람이자 여성으로서의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응했다. 그녀는 보다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안사람으로 대변되는 여성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 하에 그녀는 '교육'을 통한 '계몽'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했고, 이 과정에서 의병가와 포고문 등은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