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오횡묵(吳宖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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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지방의 날씨, 농사.주민의 삶, 정책의 상호관계 : 오횡묵의 "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을 사례로 (Interrelation among Weather, Agriculture and People's Life, and Policy in a Local in the Late Choson : In Case of "Goseong Chongswaerok" by O Hoeng-muk)

  • 박규택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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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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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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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의 개념적 틀을 이용하여 고성부사로 재직한 오횡묵이 기록한 "고성총쇄록"의 국역본을 분석하였다. 연구는 오횡묵이 날씨, 농사, 주민의 삶, 지방행정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록했는지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연구 결과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날씨는 크게 세 가지의 표현 방식, 단순 변동 농사 관련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날씨의 변동은 그 자체보다 백성의 삶과 사회 경제 정치와 연관시킬 때 보다 큰 의미와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둘째, 날씨와 중앙 지방의 정책은 특정한 조건, 즉 가뭄이 심할 경우에 충돌하여 사회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셋째, 민요(民擾)를 일으킨 백성들의 행동은 일정한 제약 조건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한적 행위자의 모습은 오횡묵 부사의 공무집행, 즉 진휼, 기우제, 세금 징수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넷째, 고성 지방의 날씨, 농사와 주민의 삶, 행정 간의 상호 관계는 개별 가구, 고을, 지방, 도, 국가의 중층적 규모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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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금마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 일대의 현황과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 (A Review of Current Status and Placeness on the Yusang-Goksu Ruins in Hwanggak-dong, Geumma, Iksan)

  • 노재현;한민순;서윤미;박율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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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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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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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옛지도 및 항공사진의 분석, 현장 관찰과 드론 사진 촬영과 고저측량 그리고 주민인터뷰를 통해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에 소재한 '유상곡수(流觴曲水)' 암각서 유적의 입지성과 장소성을 추적하여 이곳에서의 유상곡수 수계(修禊) 등의 향유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이곳의 장소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내 유상곡수로 정원 유적의 조명과 보존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유상곡수 유적이 존재하는 황각동 일대는 여러 문헌에서 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경(佳景)으로 손꼽혀왔다. 황각동의 유래는 의정부(議政府)의 별칭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그의 태생지와 인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별서인 태허정(太虛亭), 은거당인 퇴휴당(退休堂)과 묘소 그리고 사후 배향 서원 등이 인근에 다수 분포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밭일 후 바위에 호미를 걸어 놓는 넓은 바위인 하서대(荷鋤臺)는 중국과 한국의 한시의 용례로 볼 때 한가로운 전원생활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소박하고 은자적인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 유적의 핵심이 되는 '유상곡수' 바위글씨가 있는 수석바위 상부의 암혈(巖穴)은 수계를 지원하기 위한 차일공(遮日孔)으로 파악되며 인근의 일간정과 모정은 유상곡수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등잔바위 전면에 새겨진 '황각동(黃閣洞)'바위글씨는 황각동천(黃閣洞天)에 이르는 관문으로, 향촌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관념화한 표식으로 파악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황각동'과 '하서대' 바위글씨는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인 1901년 3월 29일에 익산군수 오횡묵과 지인인 김인길(金寅吉)이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봉구의 「황각동운(黃閣洞韻)」과 양곡의 후손인 소진덕의 「황각동시회(黃閣洞詩會)」란 시제로 볼 때 황각동에서 곡수연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 모임이 최소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현재 곡수로의 최대폭은 11.3m, 횡단구배는 15.04%로 계상되었으며 곡수로로 추정되는 수로 구간의 연장거리는 약 27.6m, 종단구배는 3.51%로 측정되었으나 현재 양안이 석축으로 처리된 점을 감안한다면 곡수로의 폭원과 연장거리는 훨씬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과 관련된 봄(삼월삼짇날) 모춘(暮春) 이용, 음주와 시 짓기, 시제 「황각동시회」, 유상곡수 바위글씨 그리고 인근 유상정으로 추정되는 일간정이라는 정자의 존재 등으로 볼 때 최소한 조선 말기까지 유상곡수연이 펼쳐진 공간이었음이 확인된다. 아쉽게도 '유상곡수'바위글씨에 대한 암각 주체와 조선 말기 이전의 향유자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함은 연구 한계로 남는다. 이는 향후 이에 대한 꾸준한 자료 발굴 노력을 통해 구명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