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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식 방파제 성능기반 내진 설계 Platform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 - 전단파 횟수 누적에 따른 지반 강도 감소를 중심으로 (Preliminary Study on the Development of a Performance Based Design Platform of Vertical Breakwater against Seismic Activity - Centering on the Weakened Shear Modulus of Soil as Shear Waves Go On)

  • 최진규;조용준
    • 한국해안·해양공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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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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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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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지난 이십여 년 간 우리나라 연안에 집중적으로 거치된 직립식 방파제의 내진 성능을 검토하기 위한 예비 수치모의를 포항, 경주, Hachinohe1, Hachinohe2, Ofunato, 인공지진파를 대상으로 수행하였다. 예비 수치모의 결과 지진으로 인한 전단파가 지반을 통해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진에너지가 장주기 대역으로 이동한 Hachinohe2의 경우 항 외곽시설의 활동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지진으로 인한 전단파는 항만시설이 거치된 지표방향으로 증폭되며, 지진에너지의 상당부분은 장주기 대역으로 이동된다. 이 중 장주기 대역으로 이동되는 현상은 지반의 점성 혹은 내부 마찰에 기인하며, 전단파 증폭은 구속 응력의 감소로 인해 지표면 방향으로 감소하는 전단계수와 내습하는 전단파 횟수 누적에 따른 지반 강도 감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Das, 1993). 이러한 인식에서 본고에서는 먼저 전단파 횟수 누적에 따른 전단계수의 감소의 기술이 가능한 Hardin과 Drnevich(1972) 모형과 파동방정식에 기초하여 수치모형을 구성하고, 이어 전단파 횟수 누적에 따른 전단계수의 감소가 전단파 전파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수치모의를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선형 응력-변형률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Newmark-{\beta}$ 방법과 수정 Newton-Raphson 방법을 차용하였다(Chopra, 1995). 모의결과 전단파가 지표면으로 전파되면서 상당한 확률 질량이 상대적으로 큰 진폭과 장주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중학교 1학년 디지털교과서의 물질 단원에서 나타난 외적 표상의 활용 실태 분석 (An Analysis of the Uses of External Representations in Matter Units of 7th-Grade Science Digital Textbooks Developed Under the 2015 Revised National Curriculum)

  • 송나윤;홍주연;노태희
    • 대한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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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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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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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연구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중학교 1학년 과학과 디지털교과서의 물질 단원에 제시된 외적 표상의 활용 실태를 분석하였다. 5종의 디지털교과서에 제시된 외적 표상의 수준, 양식, 제시 방법, 상호작용성을 분석하였다. 외적 표상의 수준은 거시적 수준의 외적 표상이 주로 제시되었고, 입자적 설명은 거시적 수준과 미시적 수준의 외적 표상이 함께 제시되었다. 외적 표상의 양식은 주로 시각언어와 시각비언어 표상으로 제시되었고, 청각언어 표상이나 청각비언어 표상은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시각언어 표상과 청각언어 표상은 대부분 형식적인 형태로 제시되었고 시각비언어 표상은 운동성이 포함되지 않은 정화상이 가장 많이 제시되었다. 외적 표상의 제시 방법은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첫째, 주로 시각언어 표상과 시각비언어 표상이 함께 제시되었고, 청각언어 표상과 시각비언어 표상이 함께 제시된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청각언어, 시각언어, 시각비언어 표상이 함께 제시된 경우, 일부는 청각언어 표상의 정보가 시각언어 표상에서 중복적으로 제시되었다. 둘째, 학습 내용과 관계없는 청각비언어 표상이 다른 외적 표상들과 함께 제시되었다. 셋째, 시각언어 표상과 시각비언어 표상을 다른 페이지에 배치하는 형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청각언어 표상과 시각비언어 표상은 항상 동시에 제시되었다. 외적 표상의 상호작용성에서 설명 영역은 조작 수준의 상호작용성이, 활동 영역은 피드백 수준의 상호작용성이 주로 제시되었고, 두 영역 모두 적응과 소통 수준의 상호작용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의 결과를 바탕으로 디지털교과서 집필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논의하였다.

2015 개정 교육과정 통합과학 교과서의 과학의 본성(NOS) 분석 (Analysis of the Nature of Science (NOS) in Integrated Science Textbooks of the 2015 Revised Curriculum)

  • 전영빈;이영희
    • 과학교육연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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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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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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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에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통합과학 교과서에 나타난 과학의 본성(NOS) 분포를 분석하였다. 분석 대상은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출판된 통합과학 교과서 5종 모두를 분석하였으며, 분석의 개념적 틀로는 과학적 소양 기반 4가지 영역의 과학의 본성(NOS)(Lee, 2013)을 활용하였다. 4가지 영역의 과학의 본성(NOS)은 1. 과학지식의 본성(nature of scientific knowledge), 2. 과학적 탐구의 본성(nature of scientific inquiry), 3. 과학적 사고의 본성(nature of scientific thinking), 그리고 4. 과학과 기술 및 사회의 상호작용의 본성(nature of interactions among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이다. 분석은 2명의 분석자가 수행하였으며, 두 분석자간의 신뢰도는 Cohen's kappa 계수 0.83 ~ 0.96으로 비교적 높은 신뢰도 값을 나타냈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2015 개정 교육과정 통합과학 교과서에서는 과학의 본성(NOS) 4가지 측면 중에서 '과학탐구의 본성(nature of scientific inquiry)' 영역을 전반적으로 가장 강조하고 있었다. 이것은 통합과학 교과서 5개 출판사 전체 영역에서 '과학 탐구의 본성(범주 II)'의 분포가 평균 약 44 %로 나타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2015 개정 교육과정 통합과학 교과서는 출판사에 상관없이 '과학탐구의 본성(범주 II)'을 가장 강조하고 있었지만, 그외 다른 측면의 과학의 본성(NOS) 부분은 출판사별로 다소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통합과학 교과서들은 과학적 내용과 활동을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주로 제시하면서 출판사별로 다소 다르게 과학의 본성(NOS)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2015 개정 교육과정 통합과학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과학의 본성(NOS) 측면은 4. 환경과 에너지 단원을 제외하고 모든 단원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과학의 본성(NOS) 단원별 분석 결과가 대부분의 단원에서 전체 교과서 분석 결과와 유사한 양상이었으며, 4. 환경과 에너지 단원에서만 범주 II의 '과학 탐구의 본성' 영역 다음으로 '과학-기술-사회와 상호작용하는 과학의 본성(STS)(범주 IV)'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 통합 과학 교과서가 지난 교육과정에 비하여 비교적 다양하고 균형 있는 과학의 본성(NOS) 측면을 제시하고 있으며,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목표인 과학적 문제해결력과 창의력 증진을 위하여 과학적 탐구를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제정(光霽亭) 장소 전승의 함의와 의미맥락 (Implication and Its Meaning Contact of Gwangje-jeong's Place Transmission)

  • 노재현;이석우;이정한;정경숙;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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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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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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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 소재한 광제정의 건립 배경 및 연혁 그리고 장소 및 공간특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광제정 조영 및 이건(移建)에 담긴 상징과 장소적 함의를 추찰(推察)할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옛 광제정 터와 현 광제정에 대한 '물리적 환경 인간활동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은 장소성과 장소전승의 의미가 도출되었다. 정명(亭名)의 '광제(光霽)'란 선비로서 혼탁한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매당(梅堂) 양돈(楊墩)의 지조를 상징하며, 이는 매당 생존의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 광제정의 누정제영을 통해, 은일을 실현코자 한 매당의 심정과 광풍제월의 마음으로 우뚝 선 기상이 엿보인다. 광제정중건기를 통해 볼 때 광제정에 매화를 심고 광제라는 현판을 내건 주체가 바로 매당 자신이며 매당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광제정은 매당을 기리는 상징물로 존재해 왔는데 이는 경사지를 이용해 조성된 돈대(墩臺)와 매화 식재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광제정 입구 '숙호(宿虎)마을'과 광제정 우측으로 돌출된 '복호암(伏虎巖)'은 매당을 배향하는 공간이라는 장소성이 함축된 표현이며, 이곳에 새겨진 양집하의 5언시에도 매당을 추념하는 공간 아계사(阿溪祠)의 장소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매당을 배향한 아계사가 고종5년(1868) 훼철되면서 그 유지(遺址)는 '광제정 이건을 위한 터'로의 쓰임새를 보였다. 광제정 건립 이후 최소 359년간 이어져 왔던 후천리 옛 광제정 터와 그 주변은 광제정의 이건에도 불구하고 '광제정 광제마을 광제교 광제천' 등의 지명 속에 '광제'라는 전부지명소로 남아 매당을 기리는 장소로 전승되고 있다. 광제정은 남원 양씨 종중의 '연대의 공간'이라는 뚜렷한 구심적 장소로, 전승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선조의 덕업을 숭상하며 시대적 고민을 함께한 후손과 종중 및 교우자 간의 동료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장소 전승의 이면에는 매당의 인품과 '광풍제월'의 기상을 기리고자 하는 추모의 정 그리고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켜나가는 '봉선(奉先)'의 정신이 깊이 작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글로벌시대 국내유치 국제기구의 법인격 - 한·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 사무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 (Review on the Legal Status and Personality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 Hosted in Korea - In Case of AFoCO Secretariat -)

  • 최철영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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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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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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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정부는 AFoCO 협정의 이행을 위한 상설 행정조직으로서 AFoCO 사무국을 국내에 유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국제기구를 인정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며, 국제기구가 국내에서 법인격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국내법적 근거나 정부부처 차원의 국제기구 등록이나 국제기구 공인을 위한 법제도적 장치가 없는 현실이다. 이 글은 AFoCO 사무국의 국제기구로서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국제법 이론과 국제기구의 국내법적 지위와 관련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의 국제기구관련 국내 법제를 실증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글로벌화 추세 속에 향후 지속적으로 추진될 국제기구의 국내유치에 따른 국제기구 사무국의 국제법적 지위와 국내법인격의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사점을 찾고자 하였다. AFoCO 사무국은 한국과 아세안 회원국정부가 당사국이 되어 합의를 도출하고 국제법의 규율을 받는 조약으로 성립된 AFoCO 협정을 체결하여 설립되었다는 점, 국제기구는 당해 기구의 설립을 위한 국제법적 문서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법인격이 부여되지 않아도 설립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법인격을 보유한다는 묵시적 권한이론 등을 고려할 때 국제기구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법인격을 향유한다. 따라서 AFoCO 사무국은 산림분야에 있어서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 간의 협력사업 수행을 목표로 하는 행정적 기관으로서 한국과 아세안 회원국들이 당사국인 다자간 지역 국제기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여 좀 더 많은 국제기구를 적극 유치하고자 한다면 유치하는 국제기구에 대하여 사례별로 또는 국제법 이론에 근거하여 국제기구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할 것이 아니라 외교부 소관의 법률로 가칭 '국제기구 유치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명시적인 국내법 규정에 근거하여 국내 유치 국제기구에 대한 법적 지위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를 국내에 적극적으로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해적행위의 범죄구성요건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입법 방향 (A Critical Review and Legislative Direction for Criminal Constitution of Piracy)

  • 백상진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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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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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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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제적 협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주요해역에서는 여전히 해적행위가 근절되고 있지 않다. 수 출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안전한 해상교통로 확보는 우리의 생명줄이므로 해상 안전 및 보안에 대하여 사활을 걸어야 할 상황이다. 그렇지만 해적행위의 처벌에 관한 형법은 여전히 미비한 측면이 있어 입법적 고려가 필요하다. 해적을 인류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모든 국가는 자국의 피해여부와 관계없이 해적을 처벌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이러한 보편적 관할권을 통하여 해상무역과 군사활동의 필수적인 공간인 공해(公害)상에서 해상교통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백 년 전부터 국제적 공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특히 아덴만 해역에서는 소말리아 해적을 단속하기 위하여 선진 각국에서 함대를 파견하여 합동작전으로 해상안보위협에 대처하고 있다. 국제관습법과 UN해양법협약에 따라 해적행위에 대하여 보편적 관할권이 허용되더라도 이를 위한 국내법적 제도가 미완비되어 있거나 국제법규와 상이한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을 경우 해적행위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다. 즉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국제규범에 상응하는 보편적 관할권과 해적죄의 구성요건이 형법에 규정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의 선행 없이 무리하게 우리 형법을 확대 적용하여 해적을 처벌할 경우 세계인권규약이나 기타 국제규범을 위반하여 외교적 분쟁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적을 범죄로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규정이 없으며, 다만 형법 및 선박위해처벌법 등에서 해적행위와 유사한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해적행위를 충분히 포섭하고 있지 않아 실효성 있는 해적처벌에 한계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해적죄의 구성요건에 대한 여러 제안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그 입법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궁중의 의례와 음악의 중개자, 협률랑(協律郞) (Hyupryulrang(協律郞), the Mediator of Royal Ceremonies and Music)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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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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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9-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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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협률랑(協律郞)은 궁중에서 의례(儀禮)를 행할 때 음악의 연주와 정지시점을 알려주던 직책이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궁중에 오례(五禮) 체제로 범주화 되고 실행되면서부터 협률랑의 존재가 드러난다. 유가에서는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고 이와 같은 흐름이 궁중 오례(五禮)로 연계되어 주요의례에 음악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궁중 의례의 진행 상황에 따라 음악의 삽입 여부를 알려줄 매개자가 요청되는 실정이었다. 궁중의 의례와 음악의 조화로운 구현을 위해 협률랑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률랑이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며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의 협률랑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전담되다가 전악(典樂)에게 잠시 일임된 적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장악원(掌樂院) 관원이 맡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장악원 관원 중에서도 주로 장악원 정(掌樂院 正)이 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장악원 첨정(僉正)과 장악원 주부(主簿)도 현실적인 여건에 따라 수시로 차출되곤 하였다. 장악원 정, 첨정, 주부 등 역대 협률랑 역임자들의 공통 사항은 모두 당하관(堂下官)이었다는 점이었다. 당하관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관료였으며, 권한이 미약했던 실무자였다. 이는 궁중 행사에 동원되었던 많은 이들이 맡았던 각각의 다양한 직책 중 협률랑이 궁중의례에서 점하던 위상을 드러낸다. 한편 의례 집행 여건이나 의례 자체의 성격에 따라 장악원 관원 대신 계라선전관(啓螺宣傳官),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여집사(女執事) 등도 협률랑으로 유연하게 활용되어 의례와 음악 집행에 흠결사항이 없도록 조치되었다. 협률랑의 활동은 악대가 수반된 대부분의 의례에서 휘를 세우거나 눕히는 행동으로 압축된다. 휘는 깃발의 하나로, 성곽 영토 지역 등을 표시하던 시각 장치의 일종인데, 사냥할 때나 군대에서는 진퇴를 알리는 신호 체계로도 사용되다가, 의례와 음악을 조율하는 용도로까지 그 쓰임이 확장되었다. 그런데 밤에는 휘가 보이지 않으므로 조촉(照燭)으로 대신하거나, 때로는 금고기(金鼓旗)를 대용품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협률랑의 명칭은 궁중연향의 경우 의물의 명칭을 빌려와 거휘차비, 조촉차비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협률랑의 자리는 서계(西階) 위 서쪽 가까이 동향(東向)한 상태로 배치되었는데, 의례 집행 장면이 잘 보이면서 악대와 가까운 지점이었다. 그 역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의례의 공간과 음악의 공간이 함께 파악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또한 행사를 대비한 예행 연습, 습악(習樂), 악대 배치, 음악 연주 속도 조절, 악곡(樂曲) 누락 방지 등 의례와 연계된 음악적 부분까지 관여하고, 그 직무를 책임지는 역할을 감내했다. 이러한 역할 수행 과정에는 전악(典樂)과의 협업 지점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장악원의 조화로운 운영을 위해 장악원 소속 관료와 악인이 함께 노력했던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의례 절차에 맞게 음악 연주를 챙겨야 했던 협률랑은 궁중의 의례와 음악을 연결해주는 중개자였다.

『청음록(晴陰錄)』으로 본 (사(社))유도회(儒道會) 약사(略史) (Outline History of Corporation Yudohoi(儒道會) via 『Cheongeumrok(晴陰錄)』 by Hong Chan-Yu: "Volume of Materials")

  • 정후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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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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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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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청음록(晴陰錄)"은 권우 홍찬유(1915-2005) 선생의 일기(1969년 1월 9일~1982년 1월 14일)이다. 선생은 사단법인 유도회의 창립부터 모든 운영에 직접관여하였으므로 유도회의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다. 따라서 이 "청음록"은 유도회 역사를 정리하는데 적합한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청음록"은 모두 19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분량은 200자 원고지 3,300매 정도이다. 일기 작성은 한문으로 되어있으며, 한문 문장으로 썼으되 한글 문장 어순을 따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문의 많은 부분이 초서(草書)로 씌어있고, 또 중간 중간에 많은 한시(漢詩)가 삽입되어 있다. 이 원고는 일기 중에서 사단법인 유도회에 관련된 주요사항만을 발췌한 것이다. 1. 사단법인은 1968년 11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고 이듬해 1969년 1월에 문공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문화부장관 허가번호 제다-2-3호(종무 1732.5). 2. 사무실은 처음 서울 종로구 원남도 133-1 원남빌딩 3층(현 서울대병원 앞 대학약국 자리)에서, 종로구 관수동 경보빌딩 2층, 다시 종로구 예지동 4번지 광장회사 388호실(흥산친목회(興産親睦會) 사무실)로 이전, 이후 경운동 건국빌딩 3층으로 이전하였다. 3. 운영비 조달은 성종호 이사장의 장남 성상영의 지원, 후에는 차기 이사장인 김원태, 권태훈이 담당하였으며, 1979년부터는 홍찬유 이사가 부담하였다. 3. 유림 활동으로는, 성균관 석전제(釋奠祭) 참가를 비롯하여, 파리장서비건립(巴里長書碑建立) 및 건립 기념시집 발간, 유림독립운동사 열전편찬(미완), 가정의례준칙 제정에 실천위원으로 참가하였다. 4. 성균관과의 분쟁이 있었으나, 1975년 7월 고법, 1976년 2월 대법에서 패소하였다. 5. 성균관 유도회와 통합에 관한 의논이 있기는 하였으나 거의 진척이 없었다. 6. 1979년부터 본격적인 유교 경서 및 한문 강좌를 홍찬유 이사가 주도하여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재 일반 시민 강좌를 비롯하여, 장학생 강좌가 30년을 맞이하고 있으며, 수료생이 220명에 달하고 있다.

「역대가(歷代歌)」를 통해 본 옥동(玉洞) 이서(李漵)의 역사인식(歷史認識) (Okdong Lee Seo's Historical View Examined through Yeokdaega)

  • 윤재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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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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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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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글은 옥동(玉洞) 이서(李?)의 장편 영사시(詠史詩) "역대가(歷代歌)"를 대상으로, 그 속에서 확인되는 옥동의 역사인식을 살펴보고자 한 글이다. 옥동 이서가 도덕적 수양을 최상의 가치에 둔 도학자(道學者)였다는 점에서 옥동의 "역대가"는 유가적(儒家的) 인식세계(認識世界)와 구분하여 설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옥동의 "역대가"는 7언 526구로 구성된 장편(長篇) 고시(古詩)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역대가" 계열의 작품들과 그 구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옥동의 "역대가"는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은 태초부터 명(明)나라 멸망시기까지 중국의 사적을 서술한 부분이고, 두 번째 단락은 당대 현실의 부조리를 서술하여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역대가" 계열의 작품들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여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사적만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옥동의 "역대가"는 그의 유가적(儒家的) 역사인식(歷史認識)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옥동에게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는 역사적 사실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덕적 수양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옥동은 자신이 익힌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예리한 비판, 그리고 도덕적 수양의 필요성에 대한 자극을 모두 더하여 526구의 장편 영사시 "역대가"를 창작하였다. 그런 점에서 옥동의 "역대가"는 예술성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문학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옥동의 "역대가"는 그 나름의 문학성을 통해 이전까지 저작된 여타의 "역대가" 작품들과 비교하여 문학적으로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옥동의 "역대가"는 문학성과 함께 그 스스로의 학습과 자기 신념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와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 도구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황상(黃裳)의 추사가(秋史家)와의 교류와 시적 형상화 (Hwangsang's Exchanges with Chusa Family and Poetic Embodiment)

  • 구사회;김규선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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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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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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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19세기에 활동했던 치원(?園) 황상(黃裳, 1788~1870)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와 맺었던 교류 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황상에게 추사란 어떤 존재이고, 추사에게 황상이란 무슨 존재였을까? 대답은 추사에게 황상이란 존재보다는 황상에게 추사의 존재가 무엇이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것은 황상과 다산의 관계가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매우 유의미한 존재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추사가 형제들도 반상의 신분을 떠나서 황상을 아꼈고 예우를 갖춰 시인으로 대접하였다. 추사는 황상을 다산 시학의 계승자로 인정한 비평가였고, 한편으로 문단의 패트런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추사가와 관련된 황상의 한시는 "치원유고"에 31제(題) 34수(首), "치원소고(?園小藁)"에 14제(題) 18수(首)로 모두 45제(題) 52수(首)로 집계된다. 반면에 추사가 황상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는 "완당전집"에 2제 3수, 기타 <기황수(寄黃?)> 정도가 전할 뿐이다. 황상이 추사를 비롯한 삼형제를 처음 대면한 것은 1853년 9월, 그의 네 번째 상경으로 이뤄졌다. 황상이 추사 삼형제를 만나고 시인으로 인정받는 모든 과정에는 다산 정약용의 큰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역할이 컸다. 정학연은 다산가의 장남으로써 황상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황상은 추사에게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보이고 자신의 시집 서문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추사의 비중으로 볼 때, 그것은 황상 자신이 더 이상 지방의 무명 시인이 아니라 중앙문단에서도 인정받는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추사 삼형제에 대한 황상의 시작품에는 공통적으로 교분과 우의, 그리고 각별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황상이 다산가나 추사가와의 교류 과정을 보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앙과 지방이라는 지역적 차별성이나 반상이라는 봉건제도의 계급적 차별을 벗어나서 상호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