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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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언행록』의 사제관계에서 탐색한 학습법과 그 현대적 이해 (Modern Interpretation of the Method of Learning Reflected in the Teacher-Student Relationship in On Haeng Lok by Toe-gye)

  • 신창호;지준호;이승철;심승우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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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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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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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퇴계의 "언행록"에 나타난 사제관계를 통해 퇴계가 추구했던 교육방법 또는 학습법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현대 교육적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퇴계는 다양한 저술과 제자 교육을 통해 전통 유학 교육에 충실하게 임했다. 특히, 심득(心得)과 궁행(躬行)으로 제자들을 일깨웠는데, 그것은 전통 유학의 교육방식에 기초하였다. 이런 점에서 퇴계는 유학의 교육관과 교육 방식에 따라 스승으로서의 직분에 성실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학에서 스승은 단순한 지식 전수자이기보다는 인간의 전체적 삶의 문제를 고민한 전인적 교사였다. 때문에 스승은 옛것과 새것의 계승과 창조의 측면을 적절히 조화하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와 끊임없이 배우며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려는 교육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했다. 퇴계도 제자마다 개인에 대한 가르침에 성실하게 응대하여 학문의 과정에서 공경과 신뢰를 확보했고, 제자들 또한 그런 학문적 인격에 감화받고 스승의 학맥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현대적 의미의 교육방법이나 학습법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인지학습과 성인학습의 측면에서 대비할 수 있다. 퇴계의 사제관계에 드러난 교육방법이나 학습법은 인지학습의 측면에서는 잠재학습과 통찰학습, 그리고 모방학습과 상통하고, 성인학습의 측면에서는 경험학습과 자기주도학습, 그리고 의사소통학습의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도서간행(圖書刊行)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Guam LeeJung's Publication of Books)

  • 안현주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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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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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9-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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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연구는 16세기 성리학자이며 문선이었던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도서간행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 결과 구암은 20종의 도서 편찬 교정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3종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고, 4종의 서적을 교정 간행하였으며, 12종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황, 남궁침, 김충갑, 김홍 등이 도움을 주었다. 간행된 서적들은 1종을 제외하고 모두 성리학관련도서였고, 서적의 간행사기는 1554년부터 1566년까지로 구암이 성주, 경주, 순천에서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였다. 또한 서지사항이 확실한 19종은 모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정산 송규의 사상 형성과정에 미친 증산의 영향 (The Influence of Jeungsan on the Thought Formation Process of Jeongsan Song Gyu)

  • 김탁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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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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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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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는 15세 때 증산교인들과 만나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정산은 그들의 권고로 가야산에서 3개월 동안 수행했으며, 가족들에게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도록 포교했다. 이후 정산은 18세 무렵에는 여러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증산의 행적을 좇아 멀리 전라도까지 찾아간다. 그곳에서 정산은 증산의 누이동생을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모셔와 백일치성을 드리는 정성을 보였다. 다시 증산의 생가를 찾아간 정산은 증산의 외동딸로부터 「정심요결」이라는 도교적 수련서를 전수받았고, 증산이 천지대도를 연 장소인 모악산 대원사에서 10개월간 공부를 행하였다. 대원사에서 만났던 증산교인과의 인연으로 그녀의 집에 머물던 정산은 그곳에서 비로소 소태산과 만났다. 소태산과의 만남이 있기 이전의 청년 정산은 증산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산은 원불교를 선언한 이후로도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증산의 종교적 표어를 사용했고, 증산이 제자들에게 써주었던 글귀를 주문처럼 외웠으며, 증산이 짓거나 인용한 한시(漢詩)를 언급했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이 지은 『현무경(玄武經)』에 나오는 구절들을 독특하게 해석했으며, 증산이 했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나아가 정산은 증산의 언행록에 나오는 글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했으며, 증산을 개벽을 주재하는 삼원(三元)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적극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