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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 판소리 사설 <심청가>에 구현된 남경의 중의적 의미 (The Meaning of Namgyeong on Shimchungga of Shin, Jae-hyo)

  • 이문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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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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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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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신재효 판소리 사설 <심청가>에 나타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중의적(重義的)인 의미를 밝힌다. <심청가>의 시간적 배경은 이야기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허구적 낭만적 시간이며, 동시에 조선후기 서민의 고단한 삶의 사실적 역사적 시간이다. 아울러, 공간적 배경은 중국의 옛 도읍지와 조선의 서울을 중첩 연상시키면서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히, 공간적 배경인 남경은 가련한 백성의 딸인 심청이 '만백성의 어머니'가 되는 가상가공의 허구적 낭만적 공간이며, 조선의 '황성-경성-서울'을 연상시킨다. 바야흐로, 조선의 서울에서 만백성의 행복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판소리 향유층의 바람이 담긴다. 신재효 판소리 사설 <심청가>는 조선후기 사회상과 풍속을 바탕으로 하고, 중국의 시간과 공간을 차용하여 작품을 구체화한다. 이것은 중국을 배경으로 하면서 조선의 시간과 공간을 환기시키고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심청가>에서 공간적 배경인 남경은 조선후기 신재효를 비롯한 만백성의 자유로운 상상(想像)의 나래를 펴기에 중의적인 최적지라고 할 만하다.

<박타령>에 나타난 재화(財貨)의 문제와 신재효 (The Problem of Property Portrayed in Baktaryeong and Shin Jae?hyo)

  • 정충권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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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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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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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에서는 신재효의 개작본 <박타령>에 담긴 재화의 문제를, 인물들의 재화 관련 행위를 통해 살펴 본 후, 그것을 근거로 하여 신재효의 재화관과 현실 인식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박타령>에서는, 놀부에게는 곡물 중심의 축적 재화를 지닌 기존 텍스트에서의 부농 형상에다, 화폐 경제에 민감한 자로서 돈의 운용 증식에 능숙한 부민의 형상이 부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흥부에게는 최소한의 생존 재화도 없이 자신의 농토로부터도 유리된 빈농의 형상에다, 놀부류 인물이 주도하는 화폐경제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외감을 느끼는 빈민의 형상이 더 부가되었다. 이러한 개작은 신재효 나름대로의 재화관의 소산일 수 있었다. <박타령>의 세부 서술을 통해 볼 때, 그는, 지나친 집착을 해서는 곤란하지만, 재화와 돈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는 인간 삶에 있어 긍정되어야 할 것이라 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빈민 문제에 있어서는, 하층민의 경제적 노력과 부민들의 배려가 필요하리라 보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격변해가는 세태 하에 향촌 사회 중인 부호가로서의 위기감과 그로 인한 자기 방어 의식도 텍스트 속에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박타령>은 신재효자신의 재화관을 준거로 하여 기존 <흥보가(전)>의 빈부 문제를 실상에 더 부합하게 그려내면서 당대 현실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진단도 담아낸 기획성의 텍스트였다.

판소리 패트론으로서의 대원군과 박유전 <적벽가>의 변모 (Pansori Patronage of Daewongun and His Influences on Park Yujeon's Jeokbyeokga)

  • 유민형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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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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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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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은 판소리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요소 중 판소리의 '패트론'의 비중을 점검하고자 시도되었다. 문화예술의 향유계층인 동시에, 후원자로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패트론은, 서양 예술의 역사를 분석함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적극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여러 장르의 예술에 있어서 패트론의 영향력은 언제나 중요하게 연구되었다. 판소리의 패트론은 좌상객으로 통칭되는 양반층이었는데, 판소리가 양반층 사이에 애호되면서 왕실 패트론도 생겨나게 된다. 흥선 대원군은 판소리 애호가로 유명했으며, 또한 판소리 명창의 패트론으로서 후원했다. 대원군은 통인청대사습을 통해 판소리를 후원함과 동시에, 판소리의 선발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패트론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운현궁을 중심으로 활동한 가객 안민영과 함께 판소리 명창으로 박유전을 후원하였다. 대원군이 아직 세도를 잡기 전 전주에서 머무를 때 전주의 토호였던 백진석에게 도움을 받았다. 대원군은 세도를 잡게 되면서 전주에 통인청대사습 운용에 관여 하였고, 백진석의 청을 들어서 전주에 판소리 감상용의 저택인 학인당(學忍堂)을 지을 수 있게 하였다. 대원군이 특히 후원했던 판소리 명창으로 박유전을 들 수 있다. 박유전은 대원군의 운현궁에서 좌상객들의 영향아래, 자신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판소리의 텍스트와 음악을 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박유전은 순창출신의 명창으로 서편제의 비조로 불렸고, <심청가>와 <적벽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제자로는 이날치를 들 수 있고 초기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를 통하여 서편제로 전승되었다. 박유전이 한양으로 와서 운현궁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소리는 창곡과 사설에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박유전의 판소리는 이원성을 띠게 된다. 대원군은 박유전 판소리의 변화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박유전이 운현궁에서 다듬어 정제화한 판소리가 이른 바 강산제이다. 박유전이 한양으로 오기 전의 소리인 서편제와, 한양에서 다듬어 새롭게 완성한 강산제와는 완전히 구별될 수 있을 정도로 음악, 사설, 그리고 이념적 기반에서 차별화되어 있다. 그 변화의 모습을 동편제 및 서편제 <적벽가>와 강산제 <적벽가>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강산제 <적벽가>는 사상적으로는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일관적으로 띠게 되며, 조조에 대한 야유와 비하의 수위가 동·서편제 적벽가에 비하여 훨씬 약화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수들의 전투장면을 사설에 재인용하여 포함시킨 부분과, 한시의 적극적인 인용을 늘린 것 또한 양반좌상객의 취향에 부합하여 변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