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신라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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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서남부지역 출토 도질토기에 대한 일고찰 (A Study Of Pottery In South-western Gaya Area)

  • 하승철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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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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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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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서남부토기의 기종은 삼각투창고배, 일단장방형투창고배, 이단엇갈린투창고배, 수평구연호, 기대, 광구호, 대부직구호, 컵형토기 등이며, 서남부토기가 대가야, 아라가야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토기생산체제와 유통권을 형성한 것은 5세기 중엽이었다. 이후 서남부토기의 생산은 가야가 멸망하기까지 약 100년 간 지속되었으나, 신라토기의 진출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서남부토기 성립기의 산청 중촌리 집단은 사통의 교통로를 이용하여 백제지역, 합천지역, 진주, 고성지역과의 활발한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5세기 중$\cdot$후반대의 서남부지역은 산청$\cdot$함양권, 진주권, 사천$\cdot$고성권을 중심으로 경호강과 남강을 이용한 내륙의 교역권과 남해안의 해상 교역권을 장악하여 강성해졌으며, 이러한 교역의 이점을 바탕으로 황강 상류지역인 합천 저포리$\cdot$봉계리, 합천 옥전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반면에 이른 시기에 도질토기 생산체제를 갖추고 광범위한 분포권을 형성하였던 함안의 아라가야는 유통권이 축소되었으며, 서남부토기와는 의령$\~$군북$\~$진동을 잇는 선으로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서남부지역은 산청 중촌리 집단을 가장 강력한 중심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한편, 5세기 후엽과 6세기 전엽의 대가야는 거창, 합천 반계제, 옥전, 함양 백천리 등으로 확산되고, 백제와의 교통로인 남원, 아영, 운봉, 장수지역으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서남부지역은 백제, 합천 등 주요한 교역 대상을 상실하게 되므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산청 중촌리 집단은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고성지역은 새로운 교역의 상대자인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 새로운 중심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서남부토기의 성립과 확산, 소멸과정을 통하여 서남부집단의 변화양상을 그려보고자 하였으며, 백제토기, 대가야토기, 신라토기의 출현양상을 시기별로 나누어 고찰해 봄으로써 서남부 지역의 대외관계를 추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된 서남부토기의 분포범위와 이와 관련된 집단은 '소가야'란 명칭으로 묶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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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역 초기수혈식석곽묘의 검토 (A Study on the Early Stone-lined tombs in Gyeongju Area)

  • 조수현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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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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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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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이 글에서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초기수혈식석곽묘의 축조집단유형, 신라토기의 부장시기, 구조적 특징, 발생 등에 대하여 낙동강하류역인 부산${\cdot}$김해지역의 초기수혈식석곽묘와 비교${\cdot}$검토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두 지역 모두 초기수혈식석곽묘는 지배층집단보다 하위계층의 집단에서 먼저 채용되며, 이와는 반대로 신라토기의 부장은 지배층집단에서 먼저 부장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경주지역 초기수혈식석곽묘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파악되는 하삼정고분군의 석곽묘 9호는 낙동강하류역인 부산${\cdot}$김해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대목곽묘의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두 지역을 비교${\cdot}$검토한 결과, 평면형태, 규모 등에서 약간의 상이점이 관찰된다. 따라서 경주지역의 초기수혈식석곽묘는 낙동강하류역에서 전파되어진 것보다는 내세사상의 관념이 증가하여 묘제에 반영되어진 결과로서, 붕괴가 쉬운 목재보다는 견고한 석재로의 인식전환과 자체적인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 발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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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초당동 제1호고분 (江陵 草堂洞 第1號古墳)

  • 김병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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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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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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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
  • 상술(上述)한 것을 요약(要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형식(形式)은 대형(大形)개석(蓋石)을 덮은 일봉토(一封土) 일석실(一石室)로서 폭(幅)은 아래가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양형(樣形)에다가 무이도(無羡道)라는 것과 동침(東枕)이라는 점. ② 토기(土器)는 엇갈린 이단투창(二段透窓)의 고배(高杯)와 구연(口緣)이 외반(外反)된 유태장경호(有台長頸壺)를 중심(中心)으로 적색토기(赤色土器), 마구철도(馬具鐵刀), 토추(土錘), 방추차(紡錘車) 등과 함께 유리옥(玉)도 출토(出土)되었다. ③ 초당동(草堂洞) 주변(周邊)에는 신라토기편(新羅土器片)을 찾아볼 수 있는 고분군(古墳群)이 있다는 것.

경주 황성동 유적지의 식물규소체 분석과 응용 (Phytolith analysis and application in Hwangseong-dong Archaeological Site, Gyeongju)

  • 김효선;윤순옥;황상일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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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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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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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형산강 연안의 경주 황성동 소재 주거지 유적에서 유적지내 목곽묘에 매장된 토기 속의 토양을 대상으로 식물규소체 분석을 행하였다. 연구지역은 신라시대 천년동안 왕경을 중심으로 하는 도읍지에 인접하여 있고 형산강의 충적평야를 이용하여 일찍부터 농경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기 내부 토양에서의 분석결과, 하부층준에서는 벼와 함께 갈대속, 기장족, 쇠풀족이 함께 출현하여 인접한 지역에서 농경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토기의 용도에 대해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매몰토와 토기내부 토양과의 비교분석 및 토기 내부 토양의 대형식물유체 분석도 병행하는 등 다양한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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