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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城)제사와 그 의미 - 성황신앙의 수용배경을 중심으로 - (The rites for fortress of Silla's and the meaning)

  • 채미하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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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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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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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는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되어 있는 성(城)에 대한 제사가 우리나라에 중국의 성황신앙이 수용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음을 살펴본 것이다. 신라 국가제사에는 성이 제사대상으로 나오는데, 북형산성 가림성 도서성이 그것이다. 이들은 비록 명산대천제사와 함께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되었지만, 산천제사와는 구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된 성들은 삼국시기 치소(恥笑) 역할을 하였는데, 통일 후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그 위상에 변화가 있었다. 성은 외적으로부터 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방어물로, 삼국통일전쟁을 경험한 신라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성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이에 신라 국가는 그것을 국가제사에 편제하여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고 보았다.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된 북형산성?가림성?도서성 중 가림성은 신라 국가제사에서 혁파되었는데, 그 제사는 지역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신라 말 지역 세력이 중국의 성황신앙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된 성은 '군현성'이었다. 고려시대 성황 사는 치소가 있는 성에 위치하였다. 또한 북형산성?가림성?도서성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성황서 역시 군사 거점 지였고 성황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볼 때 고려시대 성황제사가 중국과는 달리 비교적 일찍 국가제사에 편제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신라 국가제사에 편제된 성에 대한 제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이전의 식생 간섭사 (Vegetation Disturbance of Korea during the Pre-Chosun Dynasty Period)

  • 공우석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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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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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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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자연식생 간섭사를 시공간적 관점에서 복원하였다. 자연식생 간섭은 신석기시대에 본격화되었으며, 간섭은 초기에 저지와 해안에서 이루어졌으나, 후기에는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밭의 개간이 활발해지고, 특정 수종에 대한 선택적 이용에 따른 간섭이 있었다. 철기시대에는 밭농사를 위한 개간이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져 자연식생의 파괴가 계속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별채, 목재 가공, 철제 농기구 사용, 가축에 의한 땅 갈기 등이 도입되면서 경작지 확대를 위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간이 장려되면서 다락밭이 조성되고, 땔감, 조선, 광업, 목판 인쇄, 개간 등으로 자연식생의 간섭이 심각해졌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주된 요인은 농경 및 벌채와 관련된 인간의 활동이었고, 그 외 일상생활과 산업에서도 산림 식생의 간섭은 발생했다. 신석기시대 전기의 괭이농사, 후기의 보습농사, 청동기시대의 가축에 의한 보습농사, 철기시대의 농기구를 이용한 농사와 삼림 벌채 등으로 농경에 의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논농사와 밭농사, 신라의 밭농사, 통일신라 때 밭의 확대 개간, 고려 때 개간 장려에 따라 다락밭이 확산되면서 전국에서 산림 훼손 피해가 심하였다 벌채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본격화되어 후기에는 섬이나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밭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벌채는 계속되었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목공구가 발달하면서 자연식생의 제거가 쉬워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앞선 목재 가공 기술, 신라와 가야의 광물 생산, 목재 가공, 개간에 따라 식생 파괴가 심했다. 고려 때에는 연료와 개간으로 나무가 벌채되었고, 대신 산에 소나무 등을 심으면서 마을 주변에서 소나무 숲 경관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기타 활동으로는 구석기 전기의 석기와 불, 신석기시대의 정착생활과 관련된 활동, 청동기시대의 제련, 철기시대 철제 생활용구 제작, 고조선의 온돌난방, 삼국시대의 아궁이·굴뚝을 갖춘 온돌방, 신라의 많은 숯 사용, 고려의 선박 건조, 전란, 목판 인쇄, 연료, 경제작물 재배, 전면적인 온돌난방 보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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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대(六大) 다류(茶類)에 대하여 -제 1보 신라시대 이전- (On the Six Kinds of Teas -Part I Silla Dynasty-)

  • 김명배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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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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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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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1979년(年) 이전(以前)까지 찻감(다식품(茶食品))의 분류(分類)에는 사종분류법(四種分類法), 육종분류법(六種分類法), 십종분류법(十種分類法)이 통용(通用) 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年) 이후(以後)부터는 다(茶)의 화학적(化學的) 성분(成分)에 의(依)한 육대(六大) 다류(茶類)의 분류법(分類法)이 등장(登場)하였다. 한반도(韓半島)에도 육대(六大) 다류(茶類)의 전래(傳來) 여부(與否)와 제다(製茶) 및 음다(飮茶) 여부(與否)를 각(各) 시대별(時代別)로 고찰(考察)함에 있어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당(唐)나라로부터 전래(傳來)된 녹다(綠茶)인 병다(餠茶)의 풍습(風習)은 현대(現代)까지 전승(傳承)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確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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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 음료류 개발에 관한 연구중 임원십육지를 중심으로 한 차에 관한 연구(2) (The tea among soft drinks in Imwonsipyukch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 오승희
    •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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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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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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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 임원 십육지내에 있는 음청류 중 차에 대하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circled1 차의 제법은 엽차나 말차를 향약이성 재료와 꿀 등의 감미료를 첨가하여 엽차를 사용하지 않고 비탕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circled2 차 재료의 사용부위별을 보딘 열매를 이용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곡물 사용도 많았다. \circled3 문헌을 인용한 것은 중국 원나라 문헌인 거가 필용과 이조 문헌인 증보산림경제에서 주로 인용한 것으로 보아 이조시대에서는 순수한 차의 흔적은 별로 없으나 향약이성 차가 많이 있었다. \circled4 차는 건위, 청심, 윤폐, 해독, 지갈작용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또한 다른 음청류에서 볼 수 없는 보간 역할을 하며 강장 작용도 있었다. \circled5 관능 검사 결과 차는 향기와 감미가 현대의 차류 보다 좋았으며 특히 현대의 단순한 맛보다 복합적인 맛이 있었다. \circled5 우리 나라의 차는 신라시대 이전은 역사가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으나 종일신라시대부터 차를 본격적으로 먹였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차풍이 대단히 성행하여 일종의 음차가 예식화 되었다가 이조에 와서는 엽차의 제법이 까다롭고 달이는 법 또한 복잡하여 순수한 차가 없어지고 향약치성 재료로 한 차가 성 행 하였다. 개발 가치성은 강죽차가 가장 높았으며 전체 음료중 차의 개발 가치성은 59%로서 높은 편이며 가치성이 없다는 것은 4%로서 가장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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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호남지역 신라계 석탑 연구 (A Study on Stone Pagodas with Silla Style in the Honam Region of Korea in Goryeo Period)

  • 탁경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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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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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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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제까지 호남지역의 석탑은 대체로 백제의 고토란 이유로 백제계 석탑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검토한 결과 호남지역의 석탑은 94기이고, 이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제계 석탑은 15기, 신라계 석탑은 34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본 논문은 이제까지 백제계 석탑에 편중한 연구에서 신라계 석탑에 대한 검토를 통해 호남지역 석탑의 새로운 면모를 밝히고자 하였다. 석탑의 지역적인 배치를 통해 본 결과, 통일신라시대에는 전라남도에 치중하여 신라 석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호남지역 전역에 걸쳐 불국사 삼층석탑을 모방한 신라계 석탑이 건립된다. 이러한 점은 이전의 시기보다 신라계 세력의 호남지역에 대한 불교지배력이 강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는 김제, 정읍, 순창 담양, 영암 강진을 중심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호남지역 신라계 석탑의 기단부의 형식은 이층기단은 21기, 단층기단은 12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석탑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인 이층기단을 계승하고자 했던 의도로 파악된다. 단층기단도 1매석, 또는 자연암반을 하층기단 삼아 단층기단으로 만들어진 탑도 2기가 있었다. 탑신부는 삼층석탑이 21기, 오층석탑이 12기이며, 1층탑신석을 1매석으로 만든 탑이 25기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3층탑신부와 탑신석 1매석 제작 전통을 잘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옥개받침은 3단, 4단, 5단 등 그 구성방법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이층기단을 가지고 있는 석탑 중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에 탱주가 있는 석탑은 16기 중 12기가, 삼층석탑은 21기 중 15기가 전라남도에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계 석탑의 정형성을 잘 계승하여 더 많이 유행한 지역은 전라남도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문화유산속의 과학(5) - 경주 포석정의 회돌이 원리

  • 이종호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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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5호통권3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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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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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경주 포석정은 사적 1호로 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래모양의 수로 위에 띄운 술잔을 돌리며 시와 노래를 즐기도록 만든 것이다.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게 만든 이 포석정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한 것으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기술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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