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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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기 신라시대 성곽과 우물에 대한 석축입면조형원리 (Principles of Stone Elevation Formation for Walls and Wells in the Silla Dynasty from 5th to 7th Centuries)

  • 강성빈;서성혁;정태열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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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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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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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에서는 5~7세기 신라시대 석축의 입면조형원리를 규명하고자 돌의 크기, 비례, 형상, 각도, 분포 등에 대하여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크기 균등도는 -0.8~4.1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작은 돌부터 큰 돌까지 다양한 규격의 돌을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라시대 석축의 큰 돌의 분포는 높이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의 석축에서 우물, 산성 등 구조적 분류와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신라인들은 석축공사에서 실용성, 효율성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며, 의장적 요소를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둘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비례편차는 0.861~1.515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 석축은 긴 판석형의 돌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길고 짧은 돌을 혼재하여 사용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형상평균은 0.45로 낮게 나타났으며, 형상편차는 최대 0.15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전체적으로 돌은 불규칙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각 돌은 형상의 차이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넷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각도편차는 4.3~16.2로 나타났으며, 각도의 평균은 2로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 석축의 각 돌의 각도는 좌, 우로 기울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신라시대 석축은 돌의 크기, 세장비, 형상, 각도간의 상관성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석축은 돌의 크기와 세장비에서 양의 상관관계, 돌의 크기와 형상에서 음의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이는 조선시대 석축은 돌이 비교적 정형화된 반면, 신라시대 석축은 재료의 본성을 지켜 입면이 재료와 하나가 됨으로써 절제의 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농서(古農書)에 나타난 한(旱)·수해(水害)와 그 대책(對策)에 관한 고찰(考察)(2)

  • 장권열;최규홍
    • Journal of Biosystems Engine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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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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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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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 천년 동안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난 농업재해(農業災害)에 관한 기록을 본바 한해(旱害)와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이 제일 많고, 한해(旱害)에 대한 기록이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이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보다 두드러지게 많았다. 한해(旱害)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시대에 11회(回), 백제시대에 20회(回), 신라시대는 연대(年代)도 길어서 통일(統一)신라 이전에 22회(回) 그리고 통일신라 이후에 23회(回) 등 100회(回)에 가까운 한해(旱害)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은 한해(早害)에 대한 기록보다 적으나 고구려 시대에 5회(回), 백제시대에 3회(回),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15회(回)의 수해(水害)(대수(大水))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한해(早害)나 수해(水害)로 인하여 흉년(凶年)을 당했을 때, 특히 한해(旱害)에 대한 재해(災害)를 입었을 때에는 국가적(國家的)인 대책(對策)을 세워 기아민(飢餓民)의 구호(救護)에 힘을 기울였다는 기록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여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국가(國家)에서 비축(備蓄)하고 있었던 양곡(糧穀)으로 구호(救護)하였고 그 시대(時代)가 이천 년 전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초기부터 라는 것을 볼 때 이들 구호(救護) 대책(對策)의 시행(施行)이 이천 년 전(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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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천문역법(天文曆法)과 물시계(漏刻) 복원연구 (Astronomical Calendar and Restoration Design of Clepsydra in the Silla era)

  • 이용삼;정장해;김상혁;이용복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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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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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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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당나라 때 사용하던 역법들과 우리나라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시대에 사용한 역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특히 신라역법에 결정적 영향을 준 당(庸)나라 역법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고 신라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역법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주로 신라시대 사용한 역법은 인덕력(麟德曆), 대연력(大衍曆), 선명력(宣明曆)등이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당시 누각전(漏刻殿)에서 사용한 누각(漏刻)의 복원설계를 위해 삼국사기와 중국과 일본의 누각 관련 자료를 찾아 살펴본 결과 통일신라시대는 사급보상식부전루를 사용함을 알게 되었다. 중국 문헌과 일본 아스카사(비조사, 飛鳥寺)에 복원해 놓은 물시계 모델을 참고하여 신라시대에 사용한 물시계 종류와 구조를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사급보상식루각 설계를 위해 파수호의 관을 통해 공급되는 물의 양과 관의 직경에 따른 변화를 알아보는 유속 측정기를 직접 제작하여 실험하였다. 그리고 이 장치를 소개하고 실험 방법에서 얻어진 결과를 제시하고 신라시대 물시계의 사급보상식루각(四級補像式漏刻)의 개념 설계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의 역법에 근거하여 당시에 사용한 부전(浮箭)과 함께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신라시대 섬유직물의 분석고찰 -천마총출토유물을 중심으로-

  • 육영수;김상용
    •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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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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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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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 천마총출토유물의 직물류 20여편을 화학적 및 물리적 시험분석을 통하여 그 사용섬유, 직물의 밀도, 구성계의 섬도, 조직, 염색상태등을 조사하므로서 그 직물의 신라시대 당시의 명칭 또는 품질의 정도와 염색기술등을 추정하여 문헌상의 기술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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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비단과 양잠에 대한 연구 (The Investigation silk fabrics and sericulture on Silla periods)

  • 이광우;이준희;석희숙
    • 한국염색가공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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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염색가공학회 2011년도 제45차 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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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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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신라는 유잠국을 거쳐 새로운 비단이라는 신라(新羅)로 국호를 변경한다. 신라 뽕나무와 비단의 행방을 �O는다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한반도의 신라의 땅이라는 추정에 의거하여 1995년부터 조사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한반도의 지명을 방문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내용이 전혀 한반도에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1.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최근 한학자이신 이중재님이 발표한 논문과 책자를 기초로 조사 검정을 하는 중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 하였다. 2. 중국고금지명대사전(1931)을 중국 청도에서 섬유공장장으로 근무하는 정윤화친구의 도움으로 구입하여 이중재의 책의 내용을 검정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의 비단과 양잠을 한반도에서 확인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3. 삼국사기의 내용을 중국고금지명사전을 이용하여 확인한 결과 그동안 의문으로 되어 있는 임라설, 가야설, 고구려 신라 백제의 강역, 문익점 선생의 최초의 목화에 대한 사실 등 모든 사실을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 검정하였고, 현재의 한반도의 역사는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4.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나라 형태의 국가는 없었고, 조선시대부터 국가의 형태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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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金石文)에 나타난 ‘차(茶)’ 자소고(字小考) (An Illustration of ‘茶’(tea) Inscription in Epigraphs’)

  • 이형석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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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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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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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기획된 명문(銘文)을 말하는데 갑골류, 도기류, 철폐(鐵幣)류 등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금석문 251점 중 '차(茶)'자가 기록된 것을 조사 연구하였던 바 비문 16점, 와당 1점, 도자기 1점 이었으며 시대별로는 신라시대 5점, 고려시대 13점 이었으며 최초로 기록된 차(茶)자는 전남 장흥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884년)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금, 향, 구슬 등 여러가지 귀중품 중 차(茶)를 최상의 것으로 취급하였으며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경우가 많았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가 신라시대, 고려시대에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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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과학인물-우리나라 최초의 수학자 부도(1700년전 .신라시대)

  • 박성래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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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5호통권3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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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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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부도는 삼국시대 신라초기의 인물로 한국최초의 수학자라고 볼 수 있다. 부도는 1천7백 전 지금의 조달청과 비슷한 물장고사무를 맡았는데 그때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아 당대 최고의 계산능력을 지닌 사람을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귀족아닌 서민으로 6두품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오른 부도는 「삼국사기」에 '가난하지만 아첨하는 일이 없이 문서와 수확에 익숙해 임금이 불러 문장고 사무를 맡겼다'라고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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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누각 복원을 위한 연구

  • 정장해;이용삼;석우일
    • 한국우주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한국우주과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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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우주과학회 1997년도 한국우주과학회보 제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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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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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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