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약(崔天若 1684경~1755)은 동래(東萊) 출신 무인(武人)으로 1713년부터 왕실의 공역을 담당한 별간역(別看役)이었다. 그는 능묘석물, 건축, 옥공예, 주조(鑄造)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 당시 사대부들은 '최천약은 형태가 없는 물건을 잘 창조한다[천약선창의(天若善創矣)].'라며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1713년 옥보(玉寶)의 거북이[귀구(龜瞿))를 깎는 것을 시작으로 왕실 공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1720년대에는 자신만의 옥보 거북이 양식을 만들어 냈다. 왕실 공예품 중에서 동인(銅人 1741년)은 우리나라 유일의 금속제 침구동인상(鍼灸銅人像)으로 인체 각 부분의 표현이 사실적인 작품으로 최천약이 감동(監董)한 작품이다. 1731년 인조 장릉 병풍석에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과 연꽃을 조각한 최천약은 이때부터 왕릉 및 사대부묘 석물에 감동을 시작하여 단경왕후 온릉(1739년), 의소세손묘(1752년)에서 초상조각에 가까운 문인석을 제작하기도 했다. 최천약은 공민왕릉 무인석을 모델로 조현명묘 무인석(1752년)을 제작하고, 그가 1755년 사망하자 후배들은 조현명묘 무인석을 계승해 박문수묘(1756년)와 정성왕후 홍릉 및 인원왕후 명릉 무인석(1757년)을 조각한다. 그 결과 14세기 말 공민왕릉 무인석의 충갑(衷甲), 흉갑의 매듭, 대(帶)의 화문(花紋) 등이 18세기 무인석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의소세손묘 문인석 조현명묘 무인석 등 최천약이 제작한 문무인석들은 초상조각으로도 손색 없으며, 조선 후기 조각의 대표작으로 김하정(金夏鼎) 변이진(卞爾珍) 등 별간역(別看役)들과 김천석(金千碩) 박필심(朴弼深) 등 최고의 석수(石手)들이 있었기에 제작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최천약이 제작한 다른 문무인석의 발굴 및 다른 별간역들의 활동과 작품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능묘석물의 실체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조선시대 22대왕인 정조대왕(正祖大王) 태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장태문화(藏胎文化)는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 왕실, 조선시대 왕실까지 오랜 기간 행해진 우리나라 고유의 왕실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전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태봉의 수만 해도 약 300여 곳으로 대부분 조선시대 왕실자손들의 태봉이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태실은 일제강점시기에 대부분 훼손되었고, 그중 일부만 현재 국내 각 지역에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조대왕 태실은 국내 현존하는 태실 중에 석물을 포함한 봉안유물과 문헌자료가 완벽하게 세트를 갖춘 상태로 잘 보존된 대표적인 태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정조대왕 태실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우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 지방사료 등에서 정조태실 조성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았으며, 태봉의 풍수지리적 위치와 현황, 태실석물의 각 부재에 대한 세부 양식 검토, 봉안된 유물의 특징 등을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자료는 추후 태실유적에 대한 연구와 정비 복원 등의 기초 자료로 중요하게 활용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태실유적은 학계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였으나, 최근 들어 태실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미술사적인 접근이 이뤄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태실유적은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등 다방면에 걸친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검토된다면 학술적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릉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연구로서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석인상의 문인석, 무인석은 1600년대에는 크기가 증가하였다가 1700년대에는 크기가 다소 감소하였으나 1800년대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증가하는 것으로 평균 분석 결과 확인되었다. 조선 왕릉의 석인상은 당시 인물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 시대 인물상의 전형을 살펴볼 수 있다. 왕릉은 일관성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규범은 시대별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지배계급의 권위적 상징의 건축물로서 의식과 법제에 따라 왕릉이 축조된 국가적 공사였다. 조선시대 묘의 석인상 크기는 능의 석인상에 비하여 약 90cm의 차이로 작았으며 조선전기에 제작된 석물은 지위에 따라 석물의 크기에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왕릉 석인상의 연대별 석물 크기를 확인하는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Rituals for burying the tae(胎) is a unique royal tradition of Korea that lasted from Unified Shilla(統一新羅) Kingdom to Joseon(朝鮮) dynasty. However, all of the currently known taesil(胎室)s are of the royal descendants of Joseon dynasty. Therefore, Taesils made earlier than Joseon dynasty are only known by historical documents. Taesils of the royal descendants of Joseon Dynasty divide into two kinds. One is for those of princes and princesses and the other is for those of Kings. The structure of taesils of princes and princesses is a stone chest(石函) in a pit which dug on the apex of the Taebong(胎峰) containing a pair of Tae(胎)-urn(the inner urn and outer urn), a stone tablet called Jiseok(誌石) which the date of baby's birth and Tae burial is inscribed in. And a tombstone-shaped stone tablet which called Taesilbi(胎室碑) was built on the ground. And the underground structure of Taesils of Kings is identical with that of taesils of princes and princesses, but instead of just an stone tablet, this has a Budo(浮屠);means stupa of a monk in korean)-shaped stone structure on the top of the stone chest, and an octagon-shaped porch was built around it, and a Tapbi(塔碑) was built. This treatise is focused on the current status and change process of stone ornaments. The subject of this treatise is 54 Taesils which were transferred to Seosamnung(西三陵)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Tae-urns and Jiseok(誌石)s from any other Taesil and its stone chest were not included in this treatise. Researches on Taesils can be great help to history by providing resources about genealogy of Jaseon royal family and social, economical status of that time. And researches on stone ornaments and tae-urns from Taesils can provide great help to stone art history and porcelain history of Joseon dynasty.
There has been a lot of controversy over the claim that ancient characters were engraved on a stone plane collected near the Samsin Mountain in Hadong-gun, and that it was used as an altar based on the contents on the stone. The importance of the role of geoscience in prehistoric petroglyph research was presented through analysis and comparison with representative domestic petroglyphs. First, by examining the geological formation process of the collected stone objects, it proved that prehistoric actions were not applied. Second, as a result of comparative analysis from the viewpoints of human geography and topography with representative petroglyphs in Korea, it is unreasonable to argue that the stone was made for an altar. Third, it is considered that among the ancient characters under debate, the straight line indicates a cleavage of carbonate minerals, and the curved shape results from the growth of lichens. Finally, we propose that reproducing the lines found on the stone was impossible by using ancient techniques, and that there was no trace of any artificial actions applied to the spots considered to be curved characters. As shown in such research cases, the results of petroglyph research will have high reliability, if research by experts in each field continues after the geoscientific basis is secured. In this respect, the contribution of Earth science to cultural assets and archeology is expected to increase in the future.
조선왕릉 태릉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의 무덤으로 다양한 종류의 석조물(석물 24기, 봉분석재 144개)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조물은 모두 중조립질의 흑운모화강암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석조물의 주요 손상양상은 물리적 손상과 생물오염으로 확인되며 이 중에서 박리박락(145기), 입상분해(138기), 보수물질(156기)과 함께 생물오염인 조류(154기), 지의류(165기), 선태류(97기)가 높은 발생빈도를 보인다. 특히 생물학적 손상(조류)이 가장 심각한 상태(3등급 이상이 전체 석물의 94%)로 즉각적인 보존처리가 요구되며 부분적으로는 박리박락과 입상분해 등도 중장기적인 보존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에코팁 경도와 초음파탐사 결과, 석재의 약 70%이상이 물성이 상당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분광 분석에서도 봉분석재 표면의 80% 이상에서 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이 부분에는 P(인), S(황), Cl(염소), Ca(칼슘)이 높게 검출되었다. 이는 태릉이 수백 년 동안 야외에 위치하고 있어 물리적, 화학적 및 생물학적 요인 등에 의해 풍화작용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릉 석조물 중 물리적 풍화등급이 높은 석물은 물성을 보강하기 위해 강화처리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며 생물은 석재의 손상을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건식 및 습식 세정으로 제거해야 한다. 또한 보존처리 이후 생물의 재발생을 지연하기 위해서는 봉분에 흘러내린 토사를 정기적으로 정리해줄 필요가 있고 장기적으로 보존상태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비〉는 1651년 봄 비문이 완성되고, 여산(礪山)(현재 익산시 여산면)에서 석재를 채취하여 1653년 4월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비는 당시 왕실의 지우(知遇)를 받던 벽암(碧巖) 각성(覺性), 취미(翠微) 수초(守初) 등 고승대덕이 건립을 주도하고, 인평대군 등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범종(梵鐘)의 용뉴(龍?)를 모방한 '용뉴형(龍?形) 이수(?首)'라는 새로운 이수형식(?首形式)의 첫 작품이다. 더불어 이 비석의 영향을 받은 용뉴형 이수의 비석들은 이후 왕실과 사대부 비석으로 전래되어 18세기까지 제작된다. 또한 이 비석은 음기(陰記)의 내용을 통해 조말룡(曺唜龍)이라는 왕릉 석물을 제작하던 석공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조말룡은 석공 중에서 유일하게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은 인물로 비석에는 동일한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분석한 조말룡의 이수 조각 양식은 17세기 최고 수준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를 바탕으로 17세기 능묘 비석의 장인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도선 수미비>는 비석의 건립 과정 및 후원세력, 제작 장인 등이 분명해 사료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제작되어 이 시기 비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왕실 및 사대부의 후원으로 제작된 불교 석조물이 다시 왕실과 사대부의 능묘 석물로 전파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가봉태실이 현재 두 곳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하나는 경남 사천시의 소곡산에, 다른 하나는 경북 성주군의 법림산에 있는 것이다. 한 임금의 가봉태실은 두 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다. 필자는 경북 성주에 있는 태실이 단종의 가봉태실이며, 경남 사천에 있는 단종 태실은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의 태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현존 유물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하지 못하여 이번에 문헌기록과 유물을 비교 연구하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1. 단종의 태실은 아기태실과 가봉태실로 두 개가 있다. 즉 최초 단종의 아기태실은 1441년 윤11월 26일에 성주 선석산 태봉에 조성되지만, 1451년 성주 법림산으로 이안되어 2차 아기태실이 조성된다. 그후 세조에 의해 1458년 태실이 철거된다. 그러나 법림산 태봉에는 가봉태실석물이 잔존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단종이 임금으로 등극한 후 재임기간(1452~1455)에 가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2. 사천의 태실이 단종의 태실로 정착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 단종 복위과정과 관련성을 두었다. 복위되면서 왕의 격식에 맞게 태실도 보수되는데, 이때 사천의 소곡산 태실을 단종의 것으로 잘못 알고 보수하였다고 보았다. 또 가봉시기는 단종이 복위되어 장릉 개수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1699~1719)으로 추정하였으며, 의궤와 가봉석물에 난간석이 없는 것은 추봉된 임금의 무덤에 난간석을 하지 않고 간략히 조성하는 왕릉의 예처럼 태실도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게 되었다고 보았다. 3. 지금까지 사천의 태실을 단종 태실로 알고 있던 것은 오류이며, 1462년에 장태된 인성대군의 태실로 결론지었다. 이는 서삼릉 태실에 있어야 할 단종 태실은 없고 인성대군 태실이 조성되어 있는 점에 착안을 하였다. 즉 1928년 이왕직이 사천의 단종 태실을 봉출하여 서울에 보관하다가 1930년 서삼릉으로 옮겨 갈 때 태지석의 명문에 단종이 아니라 인성대군 태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서삼릉에는 단종 태실이 아닌 인성대군 태실을 조성한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 태실을 조성하면서 남긴 "태봉"과 사천 태실 서삼릉 태실에서 출토된 유물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역사, 이념, 문화, 미술, 건축, 제례 등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결정체이며, 500년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산물로서 그 상징적 의의가 매우 크다. 왕릉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히 능침 주변에 배치된 석물들은 능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기능으로서 중요한 요소였으며, 그 중에서도 봉분 가장 가까이에 표현된 십이지는 그 기능의 가장 중심에 놓여져 있는 대상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에서부터 시작된 십이지신상은 전해지는 규모나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능묘 축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했었음이 확실하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릉에 이르러서는 규모나 형태에서 매우 간소화된 경향을 띠게 되면서 다른 석물들에 비견하여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 십이지신상은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과 방위의 개념으로서 능묘를 장식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며, 시대별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나타나며, 조선왕릉까지 그 전통성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상징성은 간과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조선왕릉에 표현된 십이지 도상(圖像)을 크게 3가지로 형식 분류하여 그 원류와 시기별 전개 과정을 고찰해 보았다. 십이지 도상은 사람의 몸과 얼굴을 표현한 인신인수형(人身人首形), 관에 십이지 동물을 표현한 인신인수관형(人身人首冠形), 십이지와 십간 팔괘의 혼합 문자형으로 분류된다. 조선왕릉의 이 3가지 십이지 도상은 그 원류를 중국으로부터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 교체되면서 왕릉을 장식하는 주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애용된다. 조선왕릉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 이래 이어온 우리나라 능제의 고유성과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산 증거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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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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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칙]
1. (시행일) 이 약관은 2016년 9월 5일부터 적용되며, 종전 약관은 본 약관으로 대체되며, 개정된 약관의 적용일 이전 가입자도 개정된 약관의 적용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