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서예(書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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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서예론(書藝論)과 서예심미(書藝審美) (The Calligraphy theory and the aesthetic of Calligraphy on Wongyo Lee KwangS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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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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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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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18C 문예부흥기에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학자 예술가이다. 1755년(영조31) 나주벽서사건으로 인해 연좌,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어 총 23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운명하였다. 이때 속필(俗筆)로 흐른 서법과 서풍의 문제점을 바로 잡고자『원교서결(圓嶠書訣)』을 집필하였고, 서법적으로 본질을 새롭게 정립코자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주체적·자각적 서풍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창적 서예술 구현으로 호남 일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원교(圓嶠)의 서예심미는 양명학의 심진(心眞)을 근저로 하는 '창경발속(蒼勁拔俗)의 엄밀미(嚴密美)', '만호제력(萬毫齊力)의 양강미(陽剛美)', '진력추전(盡力推展)의 생명미(生命美)'로 전개된다. 그는 올바른 필법 구사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조형과 생기가 있는 근골(筋骨) 화의(畫意)를 서예의 관건으로 인식하고 전례(篆隷) 고비(古碑)의 연마를 제안하였다. 생기가 있는 획이란 삼과(三過)와 길곡(佶曲)하는 가운데 창경발속(蒼勁拔俗)하여 자연스럽게 천기(天機)가 스며들고, 필묵은 만호제력(萬毫齊力)의 추전(推展)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예심미는 삼과절필(三過折筆)과 길굴완전(佶屈宛轉), 만호제력(萬毫齊力)과 추전거(推展去) 등의 필법이 뒷받침되어 근골(筋骨)과 신기(神氣)로써 신채(神彩)를 드러내었고, 우리 민족 고유의 독창적 필세와 필의를 추구하고, 천연의 진성(眞性)을 드러내며 활물(活物)로써의 생명력 넘치는 원교체(圓嶠體)로 발현되었다.

청대(淸代)의 김농(金農)과 이병수(伊秉綬)의 예서(隸書) 작품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f the Calligraphy Theory between Jin Nong and Yibingshou in the Qing Dynasty)

  • 장뢰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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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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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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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청대의 예서는 중국서예의 역사에 혁신을 불러왔다. 서예에 있어 중요한 금석학과 고증학이 청시대에 들어와 발전하였고, 그리하여 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청시대예 들어와 적지 않은 서예가들이 출현하였고, 특히 금농(金農:1687-1763)과 이병수(伊秉綬:1754-1815)은 중국의 서예의 역사에 있어 예서체가 자리 잡는데 핵심적인 역학을 한 서예가들이다. 금농과 이병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두 예서체의 대가들이 남긴 그들의 작품을 비교분석하여 예서의 미적 가능성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나아가서는 서예가로서 금농과 이병수의 예서작품을 비교분석하여 예서의 미적 차이점을 구체화 한다. 나아가서 두 서예가의 예서가 한대(한자)의 예서를 전승함에도 불구하고 청시대의 예서사에 자리매김한 원인이 탐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시대의 예서와 금농과 이병수의 예서체 그리고 서예의 사상과 그들의 서예작품은 예서를 비교 및 연구한다. 청시대의 서예가인 금능과 이병수 작품에 대한 비교분석은 예서의 역사적 그리고 미학적 판단에 중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이는 후세의 서예가들에게 예서체를 배울 수 있는 길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서예의 역사적 그리고 미학적 가치를 연구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서예미학(書藝美學) 고찰 (A Study on the aesthetic of Calligraphy by Seok Jeon Hwang Wook)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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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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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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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호남 서부의 전통적인 문한세가(文翰世家)의 후손인 석전(石田) 황욱(黃旭)(18913~1999)은 근·현대 서화계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평생토록 선비의 풍모를 잃지 않고 자적지적(自適之適)하면서 오로지 전통서예에 천착하면서 독창적 악필법과 서예세계로 만년에 각광을 받았던 인물이다. 6.25 전쟁 직후 두 아들의 좌익활동으로 인해 가정적으로 큰 아픔을 겪으면서 가산은 탕진되었다. 이처럼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감내하기 힘든 시기에도 필묵시금(筆墨詩琴)에 의지하며 올곧은 선비정신과 민족애를 잃지 않으며 상고정심(尙古正心)하였다. 그리고 세속적인 감관의 쾌락을 초월한 무기무욕(無己無欲)의 '참된 즐거움(大樂)'속에서 자득하고 소요유(逍遙遊)하였다. 그의 학서과정은 특별한 스승없이 왕희지·구양순·안진경·조맹부와 신위·이삼만 등의 서체를 집중 연마하였다. 특히 환갑 이후에 찾아온 수전증으로 인해 절필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강인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그 누구도 범접치 못할 웅건강기(雄健剛氣)의 악필법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예품과 예격으로 환골탈태하였다. 1965년~1983년까지는 '우수 악필법'을, 1984년~1993년 시기는 '좌수 악필법'을 사용하였다. 1973년(76세) 첫 개인전인 회혼기념서예전을 통해 서예가로서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의 필법은 역대 서법과 인위적인 기교를 초탈하여 천연졸박(天然拙樸)한 본성을 발현하여 생경(生硬)하면서도 근골이 넘친다. 그리고 침저험경(沈着險勁)한 추획사(錐劃沙)와 중후웅건(重厚雄健)한 인인니(印印泥)한 개성적 필의는 기이한 신운을 자아내며 기존 서법을 뛰어 넘는 독창적인 석전체(石田體)를 이루었고, 그의 불굴의 서예정신은 한국서예사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여전히 귀감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