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삼국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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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실록 인명 네트워크 분석 (Analysis of People Networks in Goguryeo, Baekje, and Silla Dynasty Silloks)

  • 정진수;김학용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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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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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4-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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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네트워크는 다른 사회 네트워크와는 달리 척도 없는 네트워크 (scale-free network)의 특성이 아닌 정보의 보급, 인터넷 연쇄 편지, 청원 편지 등에서 보여주는 유포 네트워크 (dissemination network) 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왕조를 통합한 삼국왕조실록은 사회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체 네트워크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와 계층적 네트워크 (hierarchical network)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는데, 삼국왕조실록도 척도 없는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계층적 네트워크의 특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각 국가의 영토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는데,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만의 독특한 양상을 가지는데, 이 양상이 삼국 통일을 이루는 근간을 만든 것으로 분석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반적인 나라 경영, 발전 양상 및 이들 나라의 중심이 되는 왕의 인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통치 양상을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삼국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인물을 역사학적 관점이 아닌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분석함으로서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황사의 역사 (Asian Dust Events in Korea)

  • 전영신
    •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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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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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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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황사는 중국과 몽골의 건조지역으로부터 바람에 의해 수송되어 날아오는 먼지 현상이다. 이 먼지현상은 이따금 멀리 북미대륙까지(Husar 등, 2001) 이동한 것이 위성영상으로 확인되며, 캐나다(McKendry 등, 2001)에서도 실제 관측되기도 한다. 요즘에는 이 먼지가 인체와 기후에 미치는 염려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이를 예측하는 연구가 시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기록된 황사현상은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되며, 최근과 비교하면 무엇이 다른가? 삼국시대의 역사 기록인 삼국사기와 고려시대의 고려사,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속에 기록된 지난 약 2천년간의 기록을 정리해보았다. 또한 기존의 와다유우지(Wada, 1917)와 다무라센노스케(Tamura, 1983)의 조사결과도 참고하여, 우리나라에서의 관측된 황사기록을 가능한 많이 찾고, 확인하여, 과거 우리나라의 황사현상을 되짚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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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유성우의 장기적 변화와 분산유성의 계절적 변화 연구

  • 양홍진;박창범;박명구
    • 한국우주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한국우주과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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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우주과학회 2004년도 한국우주과학회보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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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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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우리는 삼국사기 (57 B.C.-A.D. 935)와 고려사 (A.D. 918-1392)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A.D. 1392-1910)의 자료로부터 3861개 유성 기록과 31개 유성우 기록을 찾아 연구하였다. 먼저 이 자료에서 오늘날 알려져 있는 유성우들을 찾아본 결과 Perseid 유성우와 Orionid, north-Taurid, 그리고 Leonid 유성우들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천년 동안 꾸준히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로, 이 옛 자료에 유성우의 장기적 변화가 보이는지를 살펴보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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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을 통해 본 한국인의 목욕의식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Bathing Culture Studied via Historical Literature -History of the Three States, Prehistory of the Three States, History of Koryo, True Records of Chosun Dynasty-)

  • 안옥희;김학민;김현지
    • 한국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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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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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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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In this study, 2,238 incidents from History of the Three States, Prehistory of the Three States, History of Koryo, True Records of Chosun Dynasty had been analyzed in order to examine the bathing styles of Koreans. The results were as follows. In the period of Three States, baths were taken for the purposes of cleanness, remedy, and beauty culture as well as etiquettes. And spa, rainwater, rivers, streams, and bath tubs were used. In the period of Koryo, it included not only reasons for etiquettes as in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but also reasons for medical care and daily life. In spa, temples, and homes, baths were taken by using perfumes and towels. In Chosun Dynasty, daily baths were for hygiene, health, and bodily charms. Before religious ceremonies, they made sure that they took baths, and spa baths were popular for the medical care. The ways to take baths included the order which area was the first to be washed, time, and areas concretely, and seasons, weather, and conditions of body were considered before taking baths. Moreover, the places included natural places such as streams, reservoirs, rivers, as well as artificial places such as temples, places for envoys, and palaces. Especially, in spa areas, bathing buildings were constructed. Considering all these, baths were taken for the purposes of ceremonies and medical care in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and daily baths took down their roots in the period of Koryo. In the period of Chosun Dynasty, spa baths for cures, prays and rituals, hygiene and bodily charms were considered as a reason. How to take baths and means were decided carefully. Therefore, the results above demonstrated that baths took down their roots in people's daily life in Korea since the period of Ko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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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가례의 부용향(芙蓉香) 연구 -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Use of Buyonghyang During the Joseon Royal Wedding Ceremony - Focused on Sunjo Sunwonwanghoo Garyedogam Uigwe -)

  • 하수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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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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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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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문헌을 통해 조선왕실의 부용향을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한국에서 향은 삼국시대부터 불교문화와 함께 전래되었다. 부용향은 조선시대 왕실을 상징하던 향이며 왕실의 각종 의례에 사용되었다. 민가에서도 혼인할 때 신부의 가마 앞에서 부용향을 태우기도 했다. 부용향은 의례, 방향, 방충, 의료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부용향은 침속향과 백단향을 주 향재로 하여 모향, 백급, 영릉향, 감송향, 팔각향, 삼내자, 정향, 소뇌, 비초 등 10가지 향재를 혼합해 만든 합향이다. "탁지준절"과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향재의 수급 방법을 추적했다. 각 향재의 특성을 파악하고 "제중신편", "동의보감" 등의 의서를 통해 제조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통해 부용향을 제작한 향장의 협업과 처우를 살펴보았다. 가례에서 부용향이 사용된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에 향이 갖던 의의를 알아보았다. 가례는 이전의 가례도감의궤에 비하여 그 체제가 잘 정비된 것으로 평가받는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참고했다. 궁에서는 의례를 진행하는 동안 항상 향을 사용했다. 반면 신부의 집에서 진행된 경우 오로지 비수책의에서만 향로 차비 등의 향과 관련된 차비가 동원되어 이 시기에만 향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책봉 후에야 비로소 향을 사용하게 됨을 통해 부용향은 왕실 사람만이 사용했으며 왕실을 상징하는 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인삼의 유래 및 효능의 서지학적 고찰 (Bibliographic consideration on the efficacy and the origin of Korean ginseng)

  • 곽이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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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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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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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고려인삼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서 가장 인기있는 건강식품중의 하나로 한반도(북위 33~48도)가 원산지이다. 인삼은 중국 전한 시대 '사유'에 의해 쓰여진 "급취장" (BC 48~BC 33)에 최초로 언급되어 있으며,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의약적 치료용으로 중국에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삼의 인공재배에 대한 기록은 1596년 중국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이후 야생삼이 감소하는 시기와 맞물려 숙종 13년(1687년) "승정원일기"에 '묘삼'의 기록이 나타난다. 묘삼은 벼의 이앙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발명으로 1600년대 초반에 인삼의 인공재배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한편 홍삼에 관해서는 1123년 중국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숙삼'(인삼을 쪄서 건조한 삼)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것이 홍삼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 조선 중종 17년(1552년) "조선왕조실록"에 '판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풀로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선조 35년(1602년)에는 '파삼'(삼을 찌고 압착하여 얇은 판처럼 만든 후 실로 꿰어 붙인 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1506~1545) 시기부터 선조(1567~1608) 시기에 홍삼의 제조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홍삼의 제조법은 그 전부터 이루어졌다고 추정되지만 조선 중종~선조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홍삼'이란 용어는 정조 21년(1797)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고종 36년(1899)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에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 삼정과에서 홍삼을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아울러 순조 10년(1810년)에는 증포소를 개성으로 이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시기에 대규모 홍삼제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조선 숙종시대에 확립된 인삼 인공재배기술과 정조시대의 홍삼제조법, 그리고 순조시대의 증포기술 등이 결합하여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후 1916년 '김택영'이 지은 "소호당집"에는 홍삼의 제조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전통적 한국홍삼 제조법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인삼의 효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BC 83-96년 중국에서 저술된 "신농본초경"으로 이 효능은 그 이후 여러 의학서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앞으로 고려인삼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은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보존되어야 하며 이러한 서지학적 노력은 과학적 연구결과와 더불어 세계속에 고려인삼의 독창성을 알리고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역사기록을 이용한 청계천의 홍수범람해석 (Flood Inundation Analysis of Cheongye-stream by The Historical Records)

  • 윤경호;김현준;장철희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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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10년도 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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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08-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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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과거에 발생한 극한홍수에 대해 역사기록 혹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경향성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시추 자료 분석에 의한 연구는 과거에도 극한홍수가 발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기와 같은 개인적인 기록물에도 이런 재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은 측우기의 앞선 발명과 맞물려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사에는 그 시대에 발생하였던 주요 홍수에 대해서는 정성적인 기술이 되어 있으며,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왕조가 개국된 이래로 500년간 발생한 홍수와 피해지역 및 피해규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 연구의 선행연구에서는 과거 청계천에서 관측된 측우기 기록을 이용하여 홍수수문분석을 수행한 후 과거 청계천의 극한홍수량을 산정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홍수량 산정결과를 토대로 HEC-RAS를 이용하여 과거 청계천에 대하여 각 홍수사상별 홍수위를 산정하였다. 이렇게 산정된 홍수위를 과거 역사기록상의 피해기록과 비교 분석하기 위하여 수치고도모형(DEM)의 이용으로 공간적 피해규모를 평가하고자 하였다. 모형의 입력 자료로는 하도구간 및 하천단면, 조도계수, 하상경사, 상 하류단 경계조건 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과거 청계천에 대한 하천 단면자료 및 조도계수 등이 필요하나 대상지점의 과거 실측자료가 없는 바 청계천 개수계획평면종단도(1936년, 경성부), 준천사실(1760년), 동국여지비고(1870년), 조선지형도집성(1921년), 경성지적도(1912년), 청계천 유물 발굴조사보고서(2006년) 등의 고문헌을 통하여 청계천 본류 구간에 대하여 단면 입력자료를 구성하였다. 또한 실제 청계천의 주변부 피해양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청계천의 지류구간에 대해서도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2003년), 영천교 발굴조사보고서(2003년) 등의 자료와 함께 근대까지의 기록물들을 활용하여 단면 입력자료를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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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 (Periodical Perceptions from Historical Materials for KIM Yoo-Shin)

  • 박찬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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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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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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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일통삼한'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되었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되었다.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무(武)를 일으킨 대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고려시기에는 신라에 이어서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김부식은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김유신을 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큰 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했다. 또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중국의 인물에 견줄만한 능력과 공훈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도 김유신이 병법에 뛰어났고 쇠뇌와 같은 훌륭한 무기를 활용했다고 보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김유신이 왜적을 소탕해주기를 바랐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

조선조의 공문서 및 왕실자료에 나타난 장류 (Jang(Fermented Soybean) in Official and Royal Documents in Chosun Dynasty Period)

  • 안용근
    • 한국식품영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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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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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8-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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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및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를 통하여 문집,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의궤, 공문서 등의 문헌에 나타난 33가지 장의 종류 및 소요량, 장에 의한 백성의 구제, 장 관련 제도 등을 밝혔다. 우리나라 지명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콩(豆)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만주지역과 우리나라가 콩의 원산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는 콩과 소금, 메주를 세금으로 받거나, 공납 받아 장을 만들었다. 현종 5년(1664) 호조의 콩 저장량은 90,000여 섬(16,200 $k{\ell}$), 1년 소요량은 42,747섬(7,694 $k{\ell}$)이었다. 영조 32년(1756) 재해에 콩 10,000섬(1,800 $k{\ell}$)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영조 36년 (1756) 재해에는 전국의 세두 85,700섬(15,426 $k{\ell}$)을 감면하여 주었다. 조선조의 장 담당 관청은 내자시, 사선서, 사도시, 예빈시, 봉상시 등이고, 총융청(경기군영)의 장은 973섬(175.14 $k{\ell}$), 예빈시의 장은 1,100여 섬(198 $k{\ell}$)이다. 장을 담당한 직책은 장색, 장두, 사선식장 등이 있다. 정조 때(1777~1800) 왕실에서는 메주를 가순궁, 혜경궁, 왕대비전, 중궁전, 대전에 연간 20섬(3.6 $k{\ell}$)씩 공급하고, 감장은 가순궁 74섬 5말 1되(13.41 $k{\ell}$), 혜경궁 95섬 7말 2되 6홉(17.23 $k{\ell}$), 왕대비전 94섬 9말 5되 4홉(17.09 $k{\ell}$), 중궁전 84섬 11말 3되 4홉(17.17 $k{\ell}$)을 공급하였다. 장독은 어장고에 112개 있고, 남한산성 장창고에 690개가 있는데, 연간 15섬(2.7 $k{\ell}$)씩 장을 담갔다. 백성들이 굶주리면 나라에서 장으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대량 구제 기록이 20여 차례 있다. 세종 5년(1423) 굶주린 사람들에게 콩 2천섬(360 $k{\ell}$)으로 장을 담가주고, 세종 6년(1424)에는 쌀, 콩, 장을 47,294섬(8,512.92 $k{\ell}$)을 주고, 세종 28년(1446)에는 콩 46,236섬(8,322.68 $k{\ell}$)으로 장을 담가주었다. 조정에서는 장을 급료로도 주었다. 상을 당하여 장을 먹지 않고 참으면 효행으로 표창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은 19종류로 장(108), 염장(90), 말장(11), 육장(5), 감장(4)의 순이다. 승정원일기에는 11종류로 장(6), 청장(5), 말장(5), 토장(3)의 순이고, 일성록에는 5종류로 장(15), 말장(2), 감장(2)의 순이다. 의궤 및 공문서에는 13종류로 감장(59), 간장(37), 장(28), 염장(7), 말장(6), 청장(5)의 순이고, 시로는 전시(7)와 두시(4)가 있다. 이 중 육장 외에는 모두 콩만으로 만드는 장이다. 문집, 조리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의궤 및 공문서 여섯 자료에 가장 많이 수록된 장류는 장(372), 염장(194), 감장(73), 청장(46), 간장(46), 수장(33), 말장(26) 등 콩으로 만든 장으로, 조리서에 존재하는 중국계 장은 문집과 왕실자료에는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백성들과 왕실, 조정의 식생활에서는 콩으로 만든 전통 장이 사용되었다.

한국 역사서 속의 별똥비와 별똥 소나기의 목록 (CATALOGUE OF METEOR SHOWERS AND STORMS IN KOREAN HISTORY)

  • 안상현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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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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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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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정통 한국 사서 원전에 수록되어 있는 천문관측 자료에서 별똥비와 별똥 소나기 기록을 검색하여 천문학적인 검토를 거쳐 그 목록을 작성하였다. 한국 사서에 나오는 별똥비 기록은 현재 국제 학계에 1958년 Imoto와 Hasegawa가 영문으로 발표한 논문이 표준이 되고 있는데, 이 문헌은 주로 1917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연구과제의 일환으로 일본인 관구리길가 작성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만든 목록은 날짜나 원전 인용 상의 오류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정사서 원전을 검색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쳐 수정되고 확장된 별똥비 및 별똥 소나기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결과 지난 2천년 동안 한국의 역사서에는 별똥 소나기가 25번, 센별똥비가 4번, 보통 별똥비가 5번 기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사자자리 별똥비, 페르세우스 별똥비, 핼리혜성의 의해 생기는 물병자리-/sub n/ 별똥비와 오리온자리 별똥비 등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으나, 상당히 많은 기록들은 이에 속하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 제시한 목록은 추후 많은 천체물리학적 연구에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