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북방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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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아시아 권역의 동질성

  • 이종용
    • 한국동굴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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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동굴학회 1995년도 동북AISIA 지리학술국제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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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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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I. 서론 II. 대륙문화의 남진 1. 고조선(단군조선)시대는 물론 기씨조선, 위만조선, 한의 사군, 삼국시대 그후 조선시대까지 우리 한반도는 중국의 한문화를 받아들여 한자문화권역에 포함되었다. 2. 한반도는 나름대로의 토착문화를 발전시켰다고는 하겠으나 이 북방문화는 다시 일본열도에 불교, 천자문의 전달에서 볼수 있듯이 동북 아시아권의 문화권이 새로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따라서 북방 민족 문화권, 한자문화권이 동북아시아 문화권이라 보겠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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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피령의 조형적 특성

  • 박현정
    • 한국의상디자인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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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상디자인학회 2004년도 한국의상디자인학회:학술대회논문집*Proceedings of the Korea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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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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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복식사 연구의 의의 중 하나는 고대 복식 자료를 현대 패션 디자인에 활용하는데 있다. 현대 패션디자이너들은 전통 복식의 스타일, 소재, 색, 문양 등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에서는 고대 아시아 북방 민족들에게서 시작되어 중국 본토에 보편화되었으며 청조에는 관복의 구성품목으로 제도화된 피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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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몽골.시베리아 역사 낳고 기른 '자궁' -

  • 주채혁
    • 한국초지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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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초지조사료학회 2004년도 학술심포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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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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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 시원 알기 위해서는 고대 국가의 중심부 아닌 기원지에 주목해야 알타이 사얀산에서 비롯해 순록의 먹이인 이끼 따라 한반도로 이동 - 한민족은 바이칼에서 온 순록유목민의 후손" 바이칼은 거대한 화산지대이며 약 1만3,000년 전 빙하기 후기 이후 고도가 낮고 온천수가 솟아나는 등 사람이 살기에 적합해 유라시아 북방 몽골리안의 창세기가 쓰인 장엄한 역사무대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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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북방민족의 발식(髮飾)에 관한 연구- 요(遼).금(金).원(元)을 중심으로 - (A Study on Hairstyle in Northern Nation of Ancient China)

  • 박춘순;김일정
    • 한국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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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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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3-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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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Hair styles for human being develope according to the natural environment. Chinese hair styles have been changed from tousled hair to pigtailed hair, later additional style of shaved hair, became pigtailed. Each hair style for people, however, is based on each people's culture and history. Thus, the same changed had not been applied to each culture simultaneously. Hairstyle for Yao(遼) Jin(金) Yuan(元) that is a representation of ancient northern tribe, is summarized as follow; Tung Hu'(東胡)s inferior, Khitai(契丹)'s hair style is tousled hair and Sushen(肅愼),'s inferior, Jurchen(女眞) has partial shave and left 2 strand of pigtail. Hun'(匈奴)s inferior, Mongol(蒙古) has hair in top and shaved head except both sides and rear. One style is circular shape of braided hair at both sides. The other is one strand pigtail at the rear head, which is the original shape for Man'(滿) pigtail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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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표기체 제정 역사 고찰 (A Study on the History of the Scripts in Soviet Union)

  • 정경택
    •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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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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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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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After the October Revolution, the Soviet Union created a theory of creating letters for people who did not have scripts, and the task of applying this theory to the actuality emerged. As a result of this activity, the number of languages that have obtained the scripts exceeds the number of scripts created throughout Europe. At that time, most of the people of the Soviet republics spoke only mother tongue, and it had only oral form. In the shortest time, a scripts system for the Soviet people's mother tongue was to be created to approach and educate a large number of people to the achievements of international science and culture. At that time, Russians, Ukrainians, Georgians, and Armenians had developed and had a script system that fit their language. The languages of Tatars, Kazakhs, Kyrgyzs, Uzbeks, Turkmen, Tajiks and Azerbaizans had not well suited to Turkic languages, based on Arabic characters reflecting Semitic characteristics. For some minorities such as the Yakuts and the Chubashians, the Cyrillic-based notation had already been established before the revolution, but about 50 peoples, especially all northern peoples, had no scripts. As we see above, not only peoples who did not have not scripts before the revolution, but also scripts for all ethnic groups of the Soviet Union, which had previously been based on Latin, Arab or Jewish scripts, were created to access and educated large numbers of people within the shortest time to the achievements of world science and culture. The principle of markings for the people without the Soviet Union was to represent the unique notes of the ethnic languages by considering the unique phonetic components of the ethnic language as much as possible while observing the unity required for the Soviet ethnic characters, approaching the actual literary language and actually creating supplementary letters.

간도의 우리문화와 중국의 왜곡에 관한 대응방안 연구 (A Study on Indigenous Culture of Gando and Countermeasure against China's Distorting Action)

  • 신용우;오원규
    • 지적과 국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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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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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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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1909년 우리나라가 외교권을 잃은 상황에서 맺어진 일본과 중국의 간도 협약에 의해 간도가 불법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다 할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이나 간도에 산재해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중국은 동북공정을 비롯한 영토공정을 앞세워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미 의미가 없는 조약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보다는 역사와 문화를 왜곡해서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그런 중국의 속셈을 아는 이상 우리는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간도에 산재한 문화가 과연 누구의 문화인가 하는 근원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주권 역시 영토에 관한 주권을 판단하는 요소 중 하나로서, 영토의 진짜 주인은 그 영토에 존재하는 문화를 향유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간도에 있는 문화의 주인은, 고조선 이래 형성되어 현재까지 맥을 이어온 북방문화권의 주인인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밝힌다. 고대는 물론 근대의 봉금지역해제 이후 간도에 문화를 정착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도 문화의 주인이 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 문화에 대해 왜곡을 일삼는 중국의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지나간 역사는 조작될 수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면서 성숙하고, 밖으로 표출되어 형성된 문화는 왜곡할 수 없다. 아울러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는 청나라 역사가 과연 중국의 역사인가를 재검토할 정책적 제안을 한다.

몽골과 고려의 변발 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Pigtails for the Mongolian and the Koryo Dynasty)

  • 김기선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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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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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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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Information sources about Mongolian pigtail of 13-14C are relatively rich. But it was difficult to estimate the shape of the pigtail in detail with the descriptions in historical writing or travel books only, and paintings were neither enough to observe the beautiful shape of the pigtail closely on the whole because the portrayed characters were always wearing their hats. However, the authors could trace the detailed shape of the pigtail of 13-14C through close investigation into Mongolian stone statue of the period. In conclusion, the authors performed a comparative study by historically comparing the historical writings, archeological materials, ethnological materials and figurative arts featuring medieval Mongolian pigtail. And the authors paid careful attention to the meaning of those materials to the hairdo history. Historically nothern minority races have become assimilated with surrounding races in language, culture and customs through long economical and cultural exchange, and today their national traits gradually fade away by globalization. But each minority race still stands independently and maintain its own traditional culture. only recently began the study by Korean researchers on Mongolian pigtail, and there is still much to be discussed in ethnological issues such as racial pedig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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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의 사르마티아(Sarmathia)식 검집 패용 방식의 전개 과정으로 본 동서교섭 (Thinking in Terms of East-West Contacts through Spreading Process of Sarmathia-Pattened Scabbard on Tillya-Tepe Site in Afghanistan)

  • 이송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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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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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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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최근 북방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가하면서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양상과 그 실체들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르마티아인들의 동서 교역의 활동 양상을 사르마티아식 검집의 확산 지역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르마티아인들의 검은 스키타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한 아키나케스(Akinakes)의 계보를 잇는 것이지만 손잡이나 패용 방식에서 손쉽게 칼을 뺄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즉 양 측면에 달린 4개 돌기에 끈으로 연결한 검집을 허벅지에 부착시키는 패용 구조로 변한 것이다. 사르마티아식 검은 기원전 5세기 파지리크시기 알타이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중심지인 남시베리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로마로 확산되었다. 이 글에서는 동서 교섭의 요충지인 박트리아지역에 속하는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 4호묘에서 출토된 검집에 관심을 두었다.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한 채 매장되었던 틸랴 테페 4호묘의 묘주는 당시 쿠샨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박트리아에서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파악된다. 묘주가 2자루의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하고 있었던 것은 박트리아에 사르마티아의 영향이 상당이 수용된 사실을 의미한다. 사르마티아인들이 동서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산 물자를 실크로드에 공급하였던 이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이에 사르마티아인들이 활동한 북방 초원 루트에 중국 한대 동경, 메론형 구슬, 수정구슬 등의 장식구슬, 금환연접구슬 등 중국 특히 비단이 생산되었던 남중국의 공예품들이 출토되는 경위에 관심을 가졌다. 모자이크 구슬은 당시 남중국 그리고 사르마티아와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살펴보았다. 거리적으로 먼 사르마티아와 남중국이 교섭할 수 있었던 중간 매체로는 흉노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흉노의 유적에서 남중국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금환연접구슬이 발견되는 점을 참고하였다. 남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한 금환연접구슬이나 모자이크구슬이 아프카니스탄의 틸랴 테페 유적에는 없는 반면 같은 초원길로 연결되는 사르마티아 유적이나 흉노의 몽골 유적에서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는 남중국과 사르마티아, 흉노와의 연결 루트를 상정하게 한다. 한편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심연대인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 초원루트와 남중국을 잇는 교통로로는 운남에서 미안마를 지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 동부로 들어가는 서남실크로드로 판단된다. 1세기 동서교섭의 루트에는 북방 초원 루트, 남해 루트, 오아시스 루트 등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이들 루트들은 운반, 집산되는 물자의 특성이나 당시 정치적 관계에 의해 다양하게 사용되고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남중국을 잇는 최단거리의 길인 서남루트가 북방 유목민들인 사르마티아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개척된 상황을 살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