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봉안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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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태조어진 봉안의식에서 관찰사의 역할과 관복 -『세종실록』을 중심으로- (The Province Official's Roles and Uniforms in the Enshrinement Rituals of the Royal Portrait of King Taejo in the Early Joseon Dynasty -Focused on the 『Sejong Chronicles』-)

  • 박현정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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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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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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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is study uses the "Sejong chronicles" ritual manual to investigate the movements and roles of provincial governors during the enshrinement rituals of the royal portrait, the official uniforms of the provincial governors in their role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official uniforms system for local governor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Provincial governors who participated in the enshrinement rituals of the royal portrait were governors 'en route' and governors 'in destination'. The movements of the governor 'en route' followed the provincial borders, official residences, and neighboring provincial borders. The movements of the governor 'in destination' followed the provincial borders, the official residence, and jinjeon. The roles of the governors included the welcoming ceremony, the bow-down ceremony, the front guard, and the farewell ceremony. The governors 'en route' wore Jobok in the welcome ceremony, and a Sibok in the bow-down ceremony before the farewell. The governor 'in destination' wore Jobok in the welcome ceremony, and Jobok (or Sibok if Jobok was not available) in the bow-down ceremony before the farewell. The characteristics of the official uniforms system for local governors in the Joseon Dynasty were as follows. First, the governors wore different uniforms depending on the importance of the ritual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econd, the names of official uniforms Sang-bok and Si-bok were used interchangeabl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ird, local governors were allowed to wear Sangbok (or Sibok) instead of Jobok.

울진지역 태실에 관한 시고 (The first study on taeshils of uljin region)

  • 심현용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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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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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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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처 태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하여 길지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 태를 봉안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ulcorner$삼국사기$\lrcorner$로서 신라 때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한다. 신라이후 고려시대 왕실에서 태 봉안의식이 성립된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제도라 하겠다. 이런 태실이 울진지역에서 필자에 의해 1997. 12부터 2000. 7까지 약 2년7개월간이라는 조사기간을 통해 신래태실, 나곡태실, 화구태실과 절태봉 등 4곳이 확인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각 태실의 주인공과 그 유물의 실체를 밝혀 보았다. 신래태실은 그 동안 행방조차 파악되지 않던 태지석, 태호, 조선통보의 유물을 모두 찾게 되었으며 조선 성종 17년(AD1486) 12월6일 오후9$\~$11시 사이에 태어나 다음해 4월7일 오전11$\~$오후1시 사이에 장태한 성종의 아들인 견석왕자의 태실로 밝혀졌다. 나곡태실은 도굴되었던 태지석의 명문도 밝혀졌으며 이 태실은 조선 광해군 11년(AD1619) 5월23일 오후9$\~$11시 사이에 태어나서 그 해 11월4일 오전9$\~$11시 사이에 장태한 광해군의 딸 태실이다. 화구태실은 신라시대 왕자의 태실로 구전되어 오는데, 풍수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태실임이 분명하나 더 이상의 태실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절태봉도 태실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태실에 대한 연구가 조선왕실의 장태처리에 관한 귀중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진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울진지역에서 발견된 태실들은 태실제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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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티드로짓모형을 활용한 사회경제적 특성에 따른 장사유형 선호 분석 (A Analysis on Preference of Funeral Type by Socioeconomic Characteristics using Nested Logit Model)

  • 주호상;최열
    • 대한토목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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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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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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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의 목적은 사회경제적 특성에 따른 장사유형 선호의 결정요인을 도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장사유형은 매장, 봉안, 자연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본 연구는 사람들이 3가지 장사유형을 선택함에 있어 그들이 가진 어떠한 사회경제적 특성이 영향을 미치는지 실증분석하였다. 이를 위하여 2017년 사회조사 자료와 전국의 장사시설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매장과 화장을 상위 계층으로 하고, 화장의 하위 계층에 봉안과 자연장이 반영된 위계 구조를 구성하여 분석용 자료를 구축하였다. 구축된 자료를 바탕으로 네스티드로짓모형을 활용한 실증분석을 실시하였다. 실증분석 결과, 장사유형의 선호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특성은 성별, 연령, 가구주 여부, 혼인상태,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만족도,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계층의식, 월평균 가구소득, 주택 유형, 주택 점유형태, 도시 거주 여부로 추정되었다. 네스티드로짓모형의 결과는 직접 탄력성과 교차 탄력성을 산출하여 변수별 탄력성 계수를 근거로 해석하여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변수들의 직접 탄력성 및 교차 탄력성 계수를 산출하였다. 산출한 직접 탄력성은 통계적으로 유의한 변수가 변화할 때, 각 장사유형의 선택 확률을 해석하는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교차 탄력성은 특정 장사유형을 선택하는 경우, 나머지 장사유형을 선택하는 확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해석하는데 활용하였다. 실증분석 결과 중 주목해야하는 점은 자연장과 관련된 사항이다. 자연장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자연장지의 공급을 활성화하고, 자연장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국토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숭의묘 건립과 숭의묘 제례악 (Soongeuimyo 崇義廟 Establishment and Soongeuimyo Jeryeak 祭禮樂)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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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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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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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숭의묘는 유비를 주향으로 하고 관우와 장비를 배향한 것 외에도 제갈량·조운·마초·황충·왕보·주창·조루·관평 이상 8인을 종향한 사당이다. 배향 인물 중 관우가 포함되어 있어 관왕묘의 하나로 인식되고 논의되었다. 이는 기존에 있던 관왕묘인 동묘, 남묘, 북묘에 이어 '서묘(西廟)'라고도 불린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관우라는 인물을 모셨다는 공통분모 때문에 관왕묘와 숭의묘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숭의묘는 관왕묘와 차별되는 면모가 있다. 숭의묘는 배향인물의 측면에서 관왕묘보다 격이 높았고 아악·아악악현·육일무가 수반되어 사용되는 악무(樂舞)의 종류가 현격히 달랐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1904년 4월 27일에 첫 봉안의식이 행해진 후 1908년 7월에 폐지되기까지 숭의묘제례가 행해진 기간은 불과 4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숭의묘 터를 조선총독부에서 고아원과 맹아원으로 사용해 버리는 바람에 그 묘역까지 철저히 훼손되어 숭의묘의 기억을 되돌릴 공간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숭의묘제례는 조선의 전통적인 제례용 악무(樂舞)의 형태를 두루 갖추어 중사(中祀)격으로 행례된 중요한 국가제례의 하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강병책의 일환으로 구상된 제례로, 칭제(稱帝) 이후 환구제례와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대한제국 최후의 국가사전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조선 정조대왕 태실 연구(朝鮮 正祖大王 胎室 硏究) - 태실석물(胎室石物)의 구조(構造)와 봉안유물(奉安遺物)의 특징(特徵) - (A Study on the Taeshil of Great King Jungjo of Joseon)

  • 윤석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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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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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6-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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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글에서는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조선시대 22대왕인 정조대왕(正祖大王) 태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장태문화(藏胎文化)는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 왕실, 조선시대 왕실까지 오랜 기간 행해진 우리나라 고유의 왕실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전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태봉의 수만 해도 약 300여 곳으로 대부분 조선시대 왕실자손들의 태봉이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태실은 일제강점시기에 대부분 훼손되었고, 그중 일부만 현재 국내 각 지역에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조대왕 태실은 국내 현존하는 태실 중에 석물을 포함한 봉안유물과 문헌자료가 완벽하게 세트를 갖춘 상태로 잘 보존된 대표적인 태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정조대왕 태실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우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 지방사료 등에서 정조태실 조성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았으며, 태봉의 풍수지리적 위치와 현황, 태실석물의 각 부재에 대한 세부 양식 검토, 봉안된 유물의 특징 등을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자료는 추후 태실유적에 대한 연구와 정비 복원 등의 기초 자료로 중요하게 활용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태실유적은 학계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였으나, 최근 들어 태실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미술사적인 접근이 이뤄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태실유적은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등 다방면에 걸친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검토된다면 학술적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조선후기 창덕궁 대보단의 조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nstruction and the Transition of Daebodan in the Late Josun Dynasty)

  • 이연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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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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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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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대보단은 명나라 황제인 태조, 신종,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황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1704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신종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건립된 것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이미 화양동에 신종을 위한 건물을 짓고 제례를 지냈었는데 이것이 국가적인 의례로 확대된 것이다. 당시의 대보단 건립은 창덕궁 후원 영역을 크게 바꿔 놓았으며, 후원 서북쪽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보단의 건축과정만을 살펴본다면 대보단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입지선정 과정에서 공간적으로나, 의례적으로 가장 적합한 곳은 후원의 내빙고터였다. 그럼에도 빙고를 옮길 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궁궐 담장 바깥에 위치한 별대영터에 건립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단을 건립하기 위한 석재는 새로 채석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변통한 것을 재활용했다. 별대영의 행각은 커다란 변경 없이 그대로 대보단 행각으로 전용했다. 건축공사의 규모만을 따지자면 그리 대단한 공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은 대보단 건립 후 몇 차례 제례를 치른 다음에는 대보단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보단이 다시 역사에 크게 등장한 것은 영조에 의해서였다. 영조도 재임 초기에는 대보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1740년대 들어 대보단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수차례에 걸친 대보단 중수가 진행됐다. 1739년에는 제기고를 중건했다. 또 1745년에는 재실을 건립하면서 대보단 의식 전날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도록 의례를 정비했다. 1749년에는 대보단에 의종과 태조를 봉안하면서 대대적인 대보단 증수가 이루어졌고, 기존의 대보단과 전혀 다르게 형태가 변경되었다. 이때 조성된 단은 새롭게 채석한 석재를 사용해서 쌓은 것이었다. 또 전사청, 재생청, 악공청 등 새로운 건물을 추가로 건립하기도 했다. 1762년에는 대보단에 공신을 종향하면서 지속적으로 대보단이 창덕궁 후원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다. 정조 재위 기간에도 대보단은 창덕궁 후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보단에서 건축적으로 커다란 중수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1799년 창경궁에 위치했던 경봉각을 대보단 내부로 이건한 일이 있었다. 이후 대보단 제례는 계속되었지만 커다란 건축적 변화는 없었고, 1908년에 제향이 중지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원각사종(圓覺寺鐘)에서 보신각종(普信閣鍾)으로 -조선시대 탈불교화의 일례- (Transforming the Wongaksa Bell[Buddhist Bell] to the Bosingak Bell[Court Bell]: An Example of the Debuddhismiz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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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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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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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보신각종은 호불군주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한양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를 건립하면서 그곳에 봉안하고자 1468년에 조성한 범종(梵鐘)이었다. 현재 보신각종은 타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손상되었는데, 그것은 원각사종에서 보신각종으로의 역사적 변천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본고에서 보신각종에 가해진 인위적 훼손에 주목하여, 누가, 언제, 왜 훼손하였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먼저 제1장에서는 관련되는 선행 연구성과를 검토하여 필자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점 및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가장 주된 논점인 보신각종과 원각사종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학설사를 검토하여, '보신각종=원각사종'의 관점에서 필자가 논의를 전개함을 밝혔다. 이어서 제2장에서는 세조가 원각사종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선 초에 왕명으로 조성한 종들을 조종(朝鍾)과 범종(梵鐘)으로 나눈 다음, 조종 4구-태조의 종루종, 태종의 돈화문종, 세종의 광화문종, 세조의 사정전종-와, 범종 3구-세조의 용문사종, 흥천사종(또는 정릉사종) 및 원각사종-를 만든 시기순으로 정리하였다. 요컨대, 세조는 만년에 원각사종을 조성하면서, 거기에 한 마음으로 임금과 부처가 소리로써 백성을 교화하겠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보신각종에 보이는 인위적 훼손의 흔적을 면밀하게 고찰하였다. 먼저 보신 각종의 현상을 관찰한 다음, 이를 보신각종을 전후하여 조성한 흥천사종(1462) 및 봉선사종(1469)과 비교하여, 범종의 구성 요소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훼손되었는가를 추적하였다. 훼손된 구성 요소는 다시 불교적 요소-견대(肩帶)의 복련(伏蓮), 보살입상 4구, 최항(崔恒)이 지은 종명(鐘銘)-와, 비(非)불교적 요소-주종 관계자 가운데 도제조(都提調) 명단-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원각사종에서 불교 문자와 상징이 지워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불교지우기'라 명명하고 그 이념적 요인으로 동시대 유자(儒者)들의 맹렬한 벽불론(闢佛論)을 주목하였으며, 후자는 정치적 요인으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보신각종의 인위적 훼손에는 이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갑자사화(1504년)부터 연산군 퇴위까지로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범종으로서의 원각사종이 조종으로서의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변신의 의미를 종소리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음미하였다. 1468년 최종적으로 완성된 원각사종은 1504년까지 3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예불(禮佛)을 위한 범종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504년 원각사가 폐사되면서 그 역할도 끝났다. 1536년에는 원각사지에서 남대문으로 옮겨졌으며, 1594년 11월 다시 타종할 때까지 전후 90년 동안 침묵 속에 방치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종루종이 파괴되면서 원각사종은 조종으로 재탄생하였으며, 명동 고개를 거쳐 1619년 종루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종루종[보신각종]으로서 1908년 일제가 타종을 중단시킬 때까지 300년 가까이 매일 새벽[파루(罷漏)]과 저녁[인정(人定)]마다 규칙적으로 타종되었다. 원각사종[범종]에서 보신각종[조종]으로의 변신은, 종소리가 상징하는 바가 부처의 소리에서 임금의 소리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원각사종이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불교지우기'는, 조선 전시기에 걸쳐 불교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요컨대, 보신각종에서 확인되는 불교지우기야말로 조선시대 한국 사회의 탈불교화를 역설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