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민족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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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돌 타래의 디아스포라 서사와 미학 (The Diaspora Narrative and Aesthetics in Handol's Tarae)

  • 신사빈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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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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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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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글은 한돌 이흥건의 타래를 서사와 미학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이 때 등장하는 분석 요소는 자연과 인간, 소외와 관심, 분단과 통일, 디아스포라와 겨레 등 이항 대립의 현상과 본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타래는 군사 독재 때부터 발생한 산업화와 도시화, 난개발, 서구화, 입시 위주 교육, 빈부 차, 인간 소외, 분단 갈등의 사회 문제를 무저항과 불복종의 정신으로 맞서는 상실과 고통의 체험 서사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창작 의욕이 단절된 공백기를 자기 성찰과 노력으로 극복한 이후의 타래는 '자연의 울림과 자기의 참모습', '디아스포라 의식과 겨레의 얼'을 일체화하는 디아스포라 서사시의 느낌이 두드러진다. <터>에서 시작한 조국과 국토, 겨레에 대한 서사시는 <한뫼줄기>를 전환점으로 뿌리보다 길을 찾는 디아스포라 의식이 선명해진다. 한돌은 음악보다 서사의 원천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의 타래는 '노랫말을 위해서 리듬이 곁들어지는 것'에 치중한다. 이 때문에 타래가 갖는 기호학적 특성은 내재적 의미(슬픔의 정서)가 오묘해도 외형적 음운이 단순한 것이 한계다. 공감과 더불어 감동까지 끌어내는 데는 내포적(의미론적)인 부분과 외연적(음운론적)인 부분의 조화가 필요하다. 슬픔의 정서를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하려면 음운론적 요소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슬픔에 대한 공감과 감동은 동일한 경험의 이야기보다 비슷한 정서의 분위기에 이끌리는 경우가 더 많다. 타래 속 슬픔의 미학은 유년 시절부터 겪은 상실과 고독, 가난의 맥락에서 표출된 원초적인 체험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긴 공백기를 거치면서 심화한 슬픔의 미학은 타인(실향민, 해외 입양자, 러시아 고려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의 디아스포라 경험까지 자기화하면서 궁극적인구원 서사를 지향한다. 이로써 타래는 잠재적으로 민족의 한계를 뛰어 넘을 가능성도 지니게 되었다. '이산되는 소리'로서의 타래는 다른 세계 음악과의 접점에서 깊은 슬픔의 호소력으로 유리한 국면을 맞을 수 있다. 반다문화주의가 아닌 상호문화주의의 지향으로 글로벌 디아스포라 담론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한돌의 타래는 디아스포라 음악으로서 지속적으로 공감의 영역을 찾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 향후 과제요 목표다.

풍물굿의 해외 문화이주 현상에 관한 연구 - 캐나다 토론토의 풍물패 활동을 중심으로 - (A Study of Cultural Migration of Pungmul-gut - Focusing on a Pungmul-pae's Activity in Toronto, Canada -)

  • 이용식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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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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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3-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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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사물놀이/풍물굿은 해외 한인들에게는 민족정체성의 상징이다. 한인사회의 각종 행사에서 사물놀이/풍물굿은 한국문화의 대표적 디아스포라 음악으로 자리매김한다. 한편으로 해외에서 사물놀이/풍물굿은 한국인뿐만 외국인도 즐기는 글로벌음악으로 성장했다. 해외에서 결성된 각종 음악공동체를 통해 사물놀이/풍물굿은 '전통과 변형', '정통성과 혼종성'의 담론을 통해 문화변용과 문화적응의 문화이주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풍물패 '비춰주네'의 문화적·음악적 정체성을 통해 풍물굿의 문화이주 현상을 밝혔다. 이 글에서 논의하는 캐나다 토론토의 풍물패 '비춰주네'는 외국인 상쇠에 의해 조직된 단체이다. 외국인들에게 풍물굿은 월드뮤직의 한 갈래로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음악이다. 그렇기에 월드뮤직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에게 풍물굿은 접근이 어렵지 않다. 현재 이 단체는 외국인과 한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개방적 '음악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풍물굿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각종 교재와 인터넷 시청각자료를 활용하여 가락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변형과 혼종성이라는 문화변용이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함께 참가하면서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촉진시킨다. 풍물패 '비춰주네'의 공연 사례를 통해 캐나다에서의 풍물굿의 문화적응을 살펴보았다. 진보적 주류사회에서 주최하는 공연과 보수적 한인사회에서 주최하는 공연의 대비를 통해 풍물굿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진보적 외국인 감상층은 풍물굿의 민중적 본성을 이해한다. 보수적 한인 감상층은 풍물굿의 전통적 본질을 받아들이지만, '소란'한 음악적 · 음향적 요인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풍물굿의 긍정적/부정적 수용은 외국인/한인이라는 민족적 요인보다는 진보적/보수적이라는 사상적 성향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 (Park Yeol·Kaneko Humiko Case and Performance)

  • 백현미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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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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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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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괴사진' 사건 등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사건은 종종 보도가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 그들에 대한 기사는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펴 사건이 전달·수용된 양상과 의미를 밝혔다. 퍼포먼스의 주인공답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이후 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형무소 바깥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자'였다. 그들의 '행동'은 기민하고 파격적이었다. 1926년 박열은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재판 방식을 조율했고,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 재판정에 등장해 조선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대역 사건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재판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앞뒤로 밀착해 앉은 자세로 괴사진을 찍었고, 1926년 7월 이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신문에 실리면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불온한 사진을 남겨, 자신들을 가두고 재판한 일본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의 특성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특별하게 전달되고 수용되었다. 우선 보도 금지 때문에 관련 보도가 간헐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이 플롯화된 채 알려져 긴장감이 증가했고,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둘째, 재판 전후의 진행 과정을 공연 관람기처럼 기사화하며 재판극을 경험하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과 움직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밝히고, 그들과 재판관이 주고받는 문답을 대본처럼 기술하였다. 셋째, 재판부 판사의 '담화'를 되받아 쓴 '사설'과 괴사진의 이야기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사를 통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논란과 분란을 문제적으로 드러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조화가 깨진 사태를 보여주는 사회적 드라마였다. 본 연구는 이 사회적 드라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한 역할과 이 사회적 드라마가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의미를 밝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위자로서 이 드라마를 직간접적으로 기획·추진했으며, 일제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당당한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했다.

다문화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텍스타일디자인 콘텐츠 개발 연구 - 중국, 베트남, 일본의 민화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Textile Design Contents Reflecting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Multi-cultural Society - Focused on Folk Paintings in China, Vietnam and Japan -)

  • 박상오
    • 한국과학예술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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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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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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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세계화시대에 따른 다민족, 다문화사회는 이제 전세계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하였기에 더 이상은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다문화사회관련 국가정책과 연구들은 제도적 측면과 한국문화의 일방적 교육에 국한되어 있기에 본 연구는 이러한 실질적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하는데서 시작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각국의 문화가 함축적으로 반영된 민화에서 디자인 리소스를 확보하고 생활 속 의식주에 가장 밀접한 섬유제품에 접목시킬 수 있는 텍스타일디자인 콘텐츠를 개발함으로서, 문화적 교류에 의한 소통방안을 제시하고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국내의 결혼 이민자 현황을 기반으로 빈도수 상위 3개국인 중국·베트남·일본의 민화의 특성 분석결과를 통하여 배색 및 텍스타일패턴디자인콘텐츠로 개발함으로써 다양한 섬유상품들에 즉각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도록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다문화사회는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가장 많은 결혼이민자 국가는 중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캄보디아, 타이, 몽골, 기타 순으로 나타났다. 둘째, 민화는 각국의 차별화된 문화가 함축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로서 텍스타일디자인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적합하였다. 셋째, 중국, 베트남, 일본의 민화를 활용하여 문양 및 배색 DB구축 및 텍스타일 패턴디자인콘텐츠를 개발한 결과 각국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콘텐츠의 활용도와 상품화의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다문화사회 구성원 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접하는 정서적·예술적 측면의 화합과 차별화된 관련 상품개발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세계유산도시 경주의 유산화 과정과 지역공동체의 관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eritagization Process and Local Community in Gyeongju, a World Heritage City)

  • 함예림;김의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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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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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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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경주는 약 1,000여 년 간 신라의 수도였으며 시내에는 월성, 대릉원, 동궁과 월지 등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다수 분포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지역에 소재한 유적의 유산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유산화는 과거의 산물을 현재의 필요에 따라 선정하여 유산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배 정당화, 광복 이후에는 민족문화 중흥 및 국가적 정체성 형성이라는 목적 하에 국가 주도의 유산화가 이루어졌으며, 경주는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주의 유산화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는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고 수동적 위치에 머물렀다. 2000년 경주의 유산들은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경주 시내와 남산 지역의 면 단위 세계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세계유산 등재와 함께 유산에 대한 지역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이루어졌고, 이후 2004년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지역공동체의 참여를 증진하는 제도적 장치가 지속적으로 정비되고 있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전문가 집단을 통해 진행된 경주의 유산화 과정은 경주 유산의 의미와 지역성이 이들을 통해 형성된 정체성이 부각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현재까지 지역공동체가 소극적으로 유산화 과정 또는 유산 관리에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경주의 유산화 과정을 문헌연구를 통해 분석하고 실제 경주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지역주민의 면접조사를 실시하여 제도적 유산화 과정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과 관계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경주의 유산 관리에 지역공동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언하였다.

허규 연출 '완판 창극'의 특징과 의의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Wanpan Changgeuk' Written by Heogyu)

  • 김기형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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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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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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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허규는 80~90년대 창극 연출을 담당하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는 전승 5가 뿐만 아니라 실전 판소리를 창극화 하였으며, 창작 창극 작품도 다수 무대에 선보였다. 특히 '완판 창극'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흥보전>을 무대에 올린 후 1985년 <적벽가>를 공연함으로써 전승 5가의 창극화 작업을 완결지은 것은 그가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허규는 주체적 민족문화의 정립과 한국 전통연희의 창조적 계승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실천적인 연극인이다. 그는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창극 작품은 그 연원에 따라, (1)전승 5가의 창극화 (2)실전 7가의 창극화 (3)창작 창극으로 세분해 볼 수 있다. 허규가 연출한 작품에는 이 3가지 유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승 5가를 창극화한 작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허규가 시도한 '완판창극'은 한국의 전통유산 가운데 빼어난 예술적 성과를 거둔 요소들을 집대성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해 보고자한 것이다. '완판창극'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전통을 중시하는 연출 태도, (2) 전통연희 요소의 적극적 수용, (3) 격조와 윤리의식의 중시, (4) 해학의 강조와 보조인물의 적극적 활용이 그것이다. 허규가 시도한 '완판창극'은 창극이 성취할 수 있는 예술적 수준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판소리 유산을 망라하고 나아가 전통연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허규는 '완판창극'에서 판소리의 진정성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대목도 빠뜨리지 않고 장면화 하려고 했다. '완판창극'의 공연 시간이 4~5시간이나 소요되었다는 것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허규가 완판창극에서 거둔 성과는 이후 창극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시도된 '완판장막창극'도 그 모태는 허규의 '완판창극'에 두고 있다. 창본을 종합해 내고 판소리의 좋은 점을 모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90년대 '완판장막창극'은 대형 무대화를 지향했으며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버라이어티한 요소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완판창극'과 대비된다. 허규의 완판창극이 끼친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판소리의 '열린 형식'을 창극의 공연 문법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허규는 극의 전개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전통연희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극적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창극 극작술의 한 방식으로 인식되어, 이후 창극연출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즘 창극은 어떻게 하면 청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감동받는 창극' 보다는 '재미있는 창극'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연 시간도 최대 2시간을 넘지 않으려고 하며, 관현악 반주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는 허규가 '완판창극'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창극의 지향점은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다목적 공연장의 탄생배경에 관한 소고 (A Brief Review of Backgrounds behind "Multi-Purpose Performance Halls" in South Korea)

  • 김경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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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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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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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연구는 군사정권의 권력 전개양상에서 드러나는 문화정책이념이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형성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한국의 공연장 현황은 우리나라 공연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회관(문예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공연문화와 향유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예회관들은 다목적홀로 운영되고 있으며 운영주체는 절대다수 정부와 지방정부 또는 출자출연기관의 재단법인 등 공공영역에서 운영한다. 따라서 정부와 지방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대상이며 제도적 측면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초헌법적인 유신을 공포하고 우리나라 문화예술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문화예술진흥법」(1972.9)을 제정한다. 이법을 근거로 「문예중흥5개년계획」(1973)을 수립하고 문화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전국의 '문화예술'회관, 또는 '문화'회관이 다목적홀로 지어진 데에는 문화예술진흥법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를 "문학, 미술, 음악, 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으로 명시함으로써 지금의 '다목적'개념의 근거가 된다. 한편, 문화공보부의 조직직제는 "문화와 예술"을 관장함을 명시하고 대중문화와 예술진흥을 구분 짓는 문화행정체계를 갖춘다. 그러나 이시기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박정희의 화법은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하고 있다. 예술은 문화에 포함되는 개념이지만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함으로써 정치적 시국이나 시행부서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였고, 이러한 모호성은 예술이 이데올로기적 활용에 정책적으로 동원되는 기제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고 문화공보부의 관장 하에 1978년 다목적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한다. 그러나 제도상의 문화예술=다목적과 설립을 추진했던 정부조직의 문화≠예술, 권력이 인식했던 문화예술=예술은 대중음악의 대관문제를 두고 가치충돌로 표출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족문화를 앞세운 국풍81을 통해 저항세력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정권의 의도는 실패하였고, 저항과 지지의 양축에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안으로 국민의 문화향유 기회확대 정책에 방점을 둔다. 이는 앞 정권의 문화예술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며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추구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 있어 앞 정권과의 차별성은 곧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향유기회의 확대는 문화영역의 분배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의 예술발전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고 하드웨어의 상징성으로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은 유신체제하에 만들어진 법체계의 "문화예술"의 정의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근거하여 공공 공연장의 운영목적으로 '다목적'의 개념이 탄생한다. 군사정권을 이은 전두환 정권은 프로시니엄 구조의 다목적 공연장을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표출하였고, 전국적으로 재생산 되어 오늘날 한국의 공연문화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