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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타이어의 현대 도덕 다원주의 비판 (MacIntyre's Critique of Modern Moral Pluralism)

  • 김영기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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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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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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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논문은 현대 도덕 다원주의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살펴보고 그의 비판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글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중요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좀처럼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낙태나 안락사와 같은 문제, 분배적 정의나 재산권 같은 문제, 전쟁과 평화와 같은 문제를 두고 일어나는 논쟁들은 곧장 주장과 반대 주장의 대립으로 귀착되고 만다. 왜냐하면 서로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서로 공통된 기준에 의해 평가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도덕적 전제들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흔히 도덕적 다원주의라고 부르며, 이러한 상황은 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발휘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현대의 이러한 도덕적 다원주의 상황을 격렬히 비판하며, 그 원인은 이른바 '계몽주의적 기획'의 실패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지난 삼백년간 철학을 지배했던 계몽주의의 기획은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인간의 본성과 목적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좌우되지 않는 합리성의 개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현실적으로 달성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도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달성될 수가 없다. 그 결과 현대의 도덕과 정치 사상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혼란은 우리가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때에만, 그 본질적 요소인 목적론에 토대하여 실천 이성에 대한 설명을 구성할 때에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덕의 상실"에서의 그 주장이 갖는 가장 어려운 난점 하나는 우리가 상황 속에 있는 존재, 이야기 속의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의 인생의 주인이자 나의 이야기의 저자라는 점에 주목할 때, 과연 현대라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가 옹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생각을 다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아울러 자유로운 제도를 지속시키려고 한다면 도덕적 다원주의는 재앙이라기보다는 인간이성이 행사된 자연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다는 점이다.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Change in Concepts and Status of Park and Green Space in Urban Planning Documents of Gyeongseong)

  • 조세호;김영민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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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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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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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경성도시계획 문헌에 기록된 공원녹지 현황표를 분석하여 근대 공원녹지계획의 의의와 한계를 파악하였다. 1925년부터 1940년의 문서 7개를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1930년과 1940년의 문헌은 공식적인 경성 공원녹지 계획안을 담고 있다. 경성의 근대 도시계획 흐름에서 공원녹지는 1920년대까지는 중요한 계획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제정을 계기로 1930년대부터 공원계획은 법정 시가지계획의 일부가 되었고, 1940년에 경성시가지계획공원안을 통해 경성의 종합적인 공원녹지계획이 완성된다. 도시계획 초기에 공원은 위생시설로 인식되다가 이후 방공, 여가, 문화적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계획된다. 주요 문헌의 계획 내용을 비교하면 규모와 기능에 따른 공원의 유형 구분, 공간적 배치를 고려한 계획 기준, 시설녹지를 통한 녹지체계의 구상 등의 중요한 계획 내용의 발전이 있었다. 공원녹지계획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공원녹지의 수나 면적의 실질적인 증가는 거의 없었으며, 계획안과 현황 사이에는 심각한 괴리가 나타난다. 1920년대에는 경성운동장이 유일하게 조성된 시설이었으며, 1930년대에도 삼청공원, 앵정공원 두 개소만 신설된다. 1930년의 계획에서 38개소가, 1940년에는 140개소의 계획 공원이 제안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산림의 공원화, 대한제국 황실 토지의 공원화, 공원 용도의 중복지정, 소규모 아동공원 중심의 실행 등 현실적 조건에서 공원녹지의 양과 질을 향상하려는 대안이 계속해서 탐색되었다. 부족한 예산과 전쟁 준비의 상황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의 공원녹지계획안은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했지만, 해방 이후 서울의 공원녹지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틀로서 역할을 한다.

북한산 조계동 송계별업(松溪別業) 정원 복원을 위한 경관해석 (A Study on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Songge Byeoleop(Korean Villa) Garden at Jogyedong, Mt. Bukhansan near Seoul for the Restoration)

  • 노재현;송석호;조장빈;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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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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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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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문헌연구와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17C 중반 북한산 조계동(曹溪洞)에 조영된 송계별업의 장소성과 별업의 정원상 및 경관상을 추적하여 송계별업 원림의 복원을 전제로 한 경관해석을 시도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송계별업은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 이요가 인조 24년에 조성한 왕가별업이다. 본제는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건덕방 타락산 아래의 궁집 석양루로서, 대군이라는 조영주체의 신분적 특수성 때문에 송계별업 또한 단청 및 건물의 제도가 매우 화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장소정체성이자 핵심경관은 구천은폭으로 중국 여산폭포에 비견되는 다층의 폭포를 갖는 관폭과 청음의 공간이었으며, 별업 멸실 이후에는 왕릉 부석장으로 역할과 부석금표처의 장소이미지가 더해졌다. 조계동천을 중심으로 한 송계별업 내원은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한담과 창벽 등의 자연경관과 비홍교, 보허각, 영휴당 그리고 계당 등의 인공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었다. 또 현존하는 '송계별업'과 '구천은폭' 바위글씨는 별업원림의 조영자와 영역성을 상징하는 경관언어이자 장소 표식으로, 보허각을 중심으로 비홍교, 창벽, 한담 등의 경물명을 바위에 세기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각적 종점의 역할을 하는 구천은폭은 캐스캐이드형의 다단폭포로서 그 하부는 말구유 형상의 절리상 포트홀의 지형경관적 특성을 보인다. 한편 외원은 별업 정문과 행랑채 성격을 갖는 공간과 내 외원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계당과 돌다리 그리고 기거를 목적으로 한 영휴당 등으로 구분된다. 영휴당에서는 보허각만 관망되는 반면 보허각에서는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영휴당 등 사방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한 이원적 조망 틀짜임이 읽혀진다. 또한 비홍교에서 구천은폭과 창벽 그리고 한담을 상호 부감 앙시하게 되며, 비홍교를 건너 보허각에 올라 구천은폭과 조계동천을 바라보는 단계적 행위를 체험케함으로써 속세에서 선계로 이행되는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시인성 스마트 안전의류의 설계 및 제작 (Designing and Fabricating of the High-visibility Smart Safety Clothing)

  • 박순자;김선웅
    • 감성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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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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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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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의 목적은 형광직물과 재귀반사 소재만으로 제작, 보급되고 있는 현 안전의복에, LED 부착으로 시인성을 높여 야간이나 기상악화 시 안전사고로부터 작업자나 보행자를 보호하고, 기울기 센서와 소리신호를 탑재하여 의식불명자의 구명에 도움을 주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공학적 하이테크를 적용하여 설계·제작한 산업용 서스펜더형 안전벨트 및 기울기 센서와 소리신호가 탑재된 안전조끼형 벨트를 개발하였다. 그 효과로 첫째, 서스펜더형 안전벨트는 필름에 접착된 자동 점멸 LED에 의해 빛을 방출하도록 설계하여 벨트 착용자의 신체는 LED와 재귀반사를 통해 멀리서 인식되어 사고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한 야간에 실시하는 도로변이나 고지대에서의 작업, 구조대원 활동, 스포츠 활동 시사고를 예방하거나,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LED 발광을 변화시키는 신호로 사고 지점을 빨리 발견할 수 있어 인명구조에 도움이 된다. 둘째, 착용자가 조난사고 등으로 인하여 의식불명으로 쓰러질 경우, 조난신호를 발생하는 첨단 디바이스를 개발하여 감지 및 신호 장치를 탑재한 결과 제어부의 기울기 센서가 인체의 각도를 자동 감지하였다. 동시에 조끼형의 벨트 형태로 제작함으로써 탈착이 용이하도록 하여 활용도를 높였다. 사고로 착용자가 쓰러지면 이 벨트의 기울기 센서가 각도를 감지하고 제어기가 고주파 음과 LED 점멸신호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기존의 안전 조끼의 경우 주변 조명이 없을 때는 조끼를 착용한 사람을 감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였지만, 본 연구에서는 안전벨트의 음향과 빛 신호로 주변 조명이 없을 때에도 100 m 이내에서 착용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 LED 부착과 기울기 센서, 소리신호 소자를 부착한 스마트 안전의류의 개발은 사고발생 감소와 구명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피 헌원(軒轅)에 바치리라" -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청말(淸末) '네이션(민족)' 구조의 확립 - (The Myth of Huang-ti(the Yellow Emperor) and the Construction of Chinese Nationhood in Late Qing(淸))

  • 심송교;조우연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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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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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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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고에서는 청말(淸末)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전통적인 황제(黃帝)전설과의 괴리를 살피고, 나아가 근대중국 '네이션(민족)'구조 형성의 역사과정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또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사회적 충돌에 대해 살피고자 하였다. '네이션(혹 민족)'은 일종 '상상(想像)의 공동체'로서 근대적인 창조물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상'을 하는 행위자들은 항상 그 시선을 아득히 먼 과거에로 돌리고자 한다. 즉 민족의 기원에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황제(黃帝)'라는 존재가 바로 이러한 청(淸)왕조 말기라는 시대상황의 수요에 의해 '중화민족'의 시조로 정립되었던 것이며, 20세기 중국 민족의 기호[심볼]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제(黃帝)라는 이 기호[심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민족의 창조는 청(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자 한 반만혁명(反滿革命)이라는 현실 정치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혈연적인 연관성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공동체 구성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에 관한 '상상'은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논란의 초점으로 된 '황제기년(黃帝紀年)'과 '공자기년(孔子紀年)'의 논쟁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민족관념의 충돌이었다. 또 일부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황제(黃帝)'의 종족개념을 확대하여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로써 '소민족주의(小民族主義)'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일부 만주족(滿洲族) 출신의 학자들도 '황제(黃帝)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역사기억을 새롭게 쓰고자 시도하게 된다. 결국 근대 중국의 민족구조를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분석해봤을 때, 지극히 구조적인 기호[심볼]로써 '황제(黃帝)'관념은 사실상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하나의 치열한 투쟁의 장(場)이었던 것이다.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은 역사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성적(理性的)인 접근보다는 항상 민족주의라는 감성적(感性的)인 목소리를 앞세우곤 한다. 특별히 중국은 경제대국화와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중화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 형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러한 시도가 극에 치달을 경우, 자칫 동아시아에 커다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 역자(譯者)로서는 이러한 서양에서 이미 거의 폐기되다시피 된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일변도의 접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나남출판, 2002)가 한국 학계에 널리 소개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특히나 중국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관한 본고가 가져다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물론 본고 역시 이론의 틀은 "상상의 공동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이론의 틀에 '중국민족의 형성' 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끼워 맞춰 봤을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한 시도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틀에로의 대입이,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검토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람에서 본고를 번역하여 학계에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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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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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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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시기 합천지역의 의병 활동과 전투 (Military Activity and Combat in Hapcheon Area during the Imjin Invasion Period)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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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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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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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연구의 목적은 임진왜란 시기 합천지역의 의병활동과 합천지역의 전투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인홍은 합천, 김면은 고령에서 의병 창의를 하게 되었다. 정인홍은 지피지기의 리더십을, 김면은 조화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둘째, 정인홍 의병군의 전투는 1차 무계전투, 사원동 복병전투, 초계 마진전투, 안언전투, 3차 성주성전투이다. 김면 의병군의 전투는 연강전투, 개산포전투, 2차 무계전투, 우척현전투, 지례전투, 사랑암전투이다. 정인홍 김면이 연합하여 싸운 전투는 1차 성주성전투, 2차 성주성전투이었다. 정유재란시기 정인홍은 경상우도의 군량을 책임지는 조도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합천지역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들어가는 진입로이자 수송로였다. 셋째, 명군의 참전과 역할은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요동을 방어하는 이이제이의 전술과 함께 일본군을 대항하는 견제 장치의 한방편이었다. 1593년(선조 26) 1월 이여송의 평양성 전투 승전 이후, 명군은 적극적인 전투보다는 강화협상을 통한 실리를 추구하였다. 실제적으로 진주성전투가 벌어졌을 때, 명군의 유정 부대는 1593년 6월 말에 사천병의 단병무예를 가지고 입성하였으나,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다. 넷째, 임진왜란 시기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과 명군의 군량미 원조 등 전국토가 폐허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지만, 각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협력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경상우도 합천지역의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은 전쟁기간 중에 일본과의 강화와 전투의 두 가지 측면에서 전권을 행사하였던 명군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주체성을 내세워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항전의지를 보임으로써 민족적 자신감과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문화는 향보와 근왕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지역공동체의 하나 된 마음과 정신이 승화된 민족의 저항정신이었다.

『춘추』 왕력(王曆)➂ - 주력(周曆)에서 하력(夏曆)으로, 그리고 공자의 "행하지시(行夏之時)" (『Chūn-qiū』Wáng-lì(『春秋』王曆)➂ - from Zhōu-lì(周曆) to Xià-lì(夏曆), and "Xíng-xià-zhī-shí(行夏之時)" Mentioned by Confucius)

  • 서정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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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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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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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선진시기에 고육력(古六曆) 등 다수의 역법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중 특히 주력(周曆)과 하력(夏曆)의 논의들이 주가 된 것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춘추"에서의 역수 체계와 공자가 직접 제자에게 말했던 "행하지시(行夏之時)"에서의 역수 체계가 서로 다른 것에 따른 의혹으로 불거진 수많은 쟁론들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짓달을 세수(歲首)로 하는 주력은 태음력 체계이며 하력은 건인월(建寅月)을 세수로 삼은 절기력(節氣曆) 체계이다. 이 두 가지 역법은 그 세수와 계절명 그리고 태음력과 태양력이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공자가 위방(爲邦)의 방편으로 하력 이행을 권장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천정(天正) 지정(地正) 인정(人正)이라는 3정(三正) 중에서 사람이 중시된 인정을 기준해야 한다는 철학적인 우주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성 향상이라는 현실적인 국가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공자가 비록 위정자들에게는 이상적인 도덕적 무결점을 강조한 반면, 대민 정책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위정자의 현실에 바탕을 둔 책무를 역설하고자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의례』와 선진 제자서의 상례 비교 (The Comparison between "the Book of Etiquette and Ceremonial" and the Hundred Schools of the Contents about Funeral Rites)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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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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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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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의례"에 보이는 상례 관련 내용을 선진 제자서의 내용과 비교한 것이다. 고대 상례에 관련된 가장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문헌은 "의례"이다. 이것은 내용상에서 "좌씨전", "묵자", "순자" 등의 선진 제자서에 반영된 것도 있고 반면에 상호 어긋나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고대의 "의례"를 비롯한 예경(禮經)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이미제자서에 반영되기도 하고, 반대로 제자서의 내용이 후대 유가에 의해 예경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의례" 상복 편의 기본 내용은 선진 제자서에 대체로 반영되어 있고 공통적인 내용이 많다. 대표적으로 부모와 군주를 위한 삼년상은 유가에서 공통적으로 선양한 것이다. 비록 묵가에서 유가의 후장구상(厚葬久喪)에 대해 반대하지만, "의례"의 상복제도는 적어도 춘추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례"와 제자서에 반영된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복상(服喪) 대상이 성인인가의 여부에 따라 상복에 차이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선진 제자서에 반영된 상례 관련 내용은 "의례"의 규정과 다른 주장도 많다. 특히 제자서에 반영된 부모를 위한 상복은 "의례"의 규정과는 달리 사회적 지위의 다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부모와 군주를 위한 상복제도와는 달리 아내와 첩을 위한 제도는 "의례"의 규정과 다른 내용이 많이 보인다. 현행본 "의례" "상복" 편에 나열된 규정은 복상 주체와 대상의 신분에 따라 상복과 상기를 달리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역사적으로도 엄밀하게 시행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친친"의 부자관계에 기초해서 자식을 위한 상례는 비교적 분명하고, 군주와 부모를 위한 상례는 명확히 규정되고 강조된 반면에 신하와 아내를 위한 상례는 규정이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삼강"(三綱)이라는 용어가 한대(漢代) 정치윤리 이념을 반영한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 처음 보이는 것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이미 "의례"에 반영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양수명과 이돈화의 근대화에 대한 견해 및그 철학적 근거에 대한 비교 연구 - 한·중 신문화운동 시기의 저작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mparison of Liang Shu-Ming and Lee Don-Hwa's Perceptions of Modernization and the Philosophical Grounds of their Perceptions : Focusing on Works during the New Cultural Movement Period in Korea and China)

  • 황종원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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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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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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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의 신문화운동 시기, 양수명과 이돈화의 근대화에 대한 견해 및 그 철학적 근거에 대해 비교, 검토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시기 두 인물의 한중 양국 신문화운동에 대한 적극성은 달랐지만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태도 및 이 태도를 정당화하는 생명철학적 근거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양수명은 서구적 근대화에 찬동하면서 서구에서 과학과 민주가 발전할 수 있었던 정신적 동력의 문제에 대해 삶의 세 가지 근본문제, 그에 대한 인간의 세 가지 태도, 이로부터 유형화한 세 가지 문화 및 그것의 3단계 재현설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답변했고 생명의 자기중심성에 대한 주목에서 출발해 자기와 타자의 분리를 전제로 이성을 동원해 대상을 계산하고 개조하는 삶의 태도를 서양의 정신으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의 첨예성을 드러냈다. 한편 이돈화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찬동하면서도 처음부터 서구적 근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이를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주의로 극복하려 했다. 근대 과학을 수용하면서도 신비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 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이것이 천도교 식 창조론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 서구의 생철학적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동학의 교의에 입각해 생명의 타자 연관성, 협동성, 연대성을 강조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근대를 수용하면서도 근대를 넘어서려는 그의 태도는 양수명보다 한발 앞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서양의 정신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의 서구 근대에 대한 비판은 양수명처럼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