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김창흡(金昌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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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과 간챠잔을 통해서 본 18·19세기 한일 한시의 한 면모 (Aspects of Chinese Poetry in Korea and Japan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s Demonstrated by Kim Chang Heup and Kan Chazan)

  • 최귀묵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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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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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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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에서 필자는 한국의 김창흡과 일본의 간챠잔의 시론과 한시 작품을 비교 검토했다. 본론에서 얻은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창흡과 간챠잔은 의고주의 비판에 동조했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견이 일치했다. 성당시를 일방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 눈앞의 (소소하기까지 한) 경물에 눈길을 주고, 거기서 촉발된 차분한 정감을 담는다. 과장된 언어가 아닌 실다운 언어를 사용한다. 모름지기 시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두 사람의 차이점 또한 주목된다. 김창흡은 정감과 경물은 천리를 매개로 하여 작품 안에서 만나게 되며, 둘을 매개하는 언어 표현은 철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했다. 반면 간챠잔은 정감과 경물을 매개하는 천리를 상정하지 않았다. 간챠잔은 경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 작시의 이상이 있다고 했다. 요컨대 김창흡은 경물을 통해 이치를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간챠잔은 경물 자체를 표현하는 데 머문 차이가 있다. 또한 김창흡은 시는 천리의 표현이면서 국가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담아내는 고차원의 언어활동이라고 했다. 사대부로서 문학의 위상을 높이 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크다고 했다. 반면 간챠잔은 문학은 오락이라고 하면서 문학은 철학과 정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김창흡은 문학은 학문과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했다면 간챠잔은 문학은 문예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김창흡과 간챠잔의 시학이 각자 개인의 성취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두 나라 한시사의 기저에 놓여 있던 특성이 두 사람을 만나서 표면화한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두 사람의 시학은 좁게는 한시, 나아가는 두 나라 문학 일반의 특성을 표면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범에 매이지 말고 실경을 개성적으로 그리라는 요구는 오랜 기간 성장해 온 두 나라 문학의 특성이 드러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인물성론(人物性論)의 초(初)·만년설(晩年說) 구분에 대한 비판 (A Critic on Analysis for theory of Nature between Human and Animal in Nongam Kim Changhyob)

  • 이종우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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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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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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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 대하여 당시 학계에서 그의 인물성론(人物性論)에 대한 해석에서 초년미정설(初年未定說)과 만년정론(晩年定論)이라는 논란이 일어났다. 오희상(吳熙常)은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은 초년미정설, "여권유도재론사변록변(與權有道再論思辨錄辨)"은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김창흡(金昌翕)도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을 초년미정설이라고 해석한다. 김창협의 제자 어유봉(魚有鳳)은 서변(書辨)과 잡식(雜識)을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하였다. 임성주(任聖周)는 잡지를 초년미정설과 만년정설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재의 연구자들도 그에 동조하여 김창협의 인물성론에 대하여 초년설과 만년설에 차이가 있다고 해석한다. 반면에 임성주는 김창협의 잡지에서 초년의 인물성동론이 만년에 인물성이론으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창협의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에서는 기의 통색(通塞)으로 인하여 리도 그에 따라서 편전(偏全)이 있다고 말함으로서 인물성이론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여권유도재론사변록변(與權有道再論思辨錄辨)"에서 직접 동론과 이론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만물과 인간의 리가 같다고 여겼고 그것은 인물성동론을 의미한다. 반면에 인간이 생성될 때 형기의 정을 얻었기 때문에 그 성은 온전하지만, 다른 생물은 그 편을 얻었기 때문에 그 성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인물성이론이다. 인물성동론의 이유는 리(理), 이론은 형기(形氣)의 차이에서 일어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잡지에서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인물성동론과 이론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낙론의 어유봉과 오희상은 잡지를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한다. 같은 글에 대한 해석에서 이러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들 모두 자신의 학설을 김창협에 가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창협의 인물성론에 대한 해석으로서 초년미정설과 만년정론은 후세 학자들의 구분일 뿐이다. 자신들의 학설을 김창협의 권위에 가탁했던 것이다. 결국 김창협에게서 그러한 변화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