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금옥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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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옥총부>를 통해 본 안민영의 가악 활동과 가곡 연창의 방식 (Ahn Minyoung's activities on Music and the ways of Gagok playing through 'Geumokchongbu')

  • 김용찬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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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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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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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금옥총부>는 안민영의 개인 작품만으로 이루어진 가집(歌集)이다. 가집 편찬자이자 가창자(歌唱者)로 활동했던 안민영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의 시조 문학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루어야만 하는 인물이다. 그가 편찬한 가집인 <금옥총부>의 검토를 통해서, 안민영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곡원류>는 물론 <금옥총부>라는 가집 역시 그의 치밀한 음악적 고려에 의해 탄생된 가집인 것이다 가집에 수록된 음악의 곡조는 당시 연창(演唱)되던 가곡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대체로 <금옥총부>를 비롯한 이 시기에 편찬된 가집의 편제는, 오늘날 가곡 연창의 전통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가집의 편자인 안민영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지 않은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었지만, 그의 개인사적 면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부분 해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금옥총부>에는 매 작품마다 작품의 창작 배경이나 다양한 설명을 곁들인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발문 중에서는 작품의 창작 연대를 밝힌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연대기를 통해 안민영의 생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추적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음악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 드러나기도 했으며.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왕실 인물들과 당대 예인(藝人)들과의 활발한 교유의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가집에 수록된 일부의 특정 곡조들을 취해서 부분적으로 묶어 부르는 연창 형식이 존재했음도 확인되었다. 예컨대 대원군이나 왕실 인물들에게 바치는 '하축시(賀祝詩)'는 그 성격상 철저히 연창을 전제로 창작된 것이다. 따라서 특정 인물들에게 바친 '하축시'는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세트로 묶여 연창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를 통해 당시 가곡의 연창 방식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 졌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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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영과 <승평곡> (Ahn Minyoung and 'Seungpyeonggok')

  • 김용찬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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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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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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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안민영의 가집 편찬 작업은 그 자신이 일생 동안 추구했던 예술적 역량을 실현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최근 안민영이 편찬했던 또 다른 가집인 <승평곡>이 발굴됨에 따라, 그의 가집 편찬 작업이 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승평곡>은 전체 12수의 작품으로 구성된 가집인데, 가곡창의 곡조에 맞춰 각 1수씩의 작품이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가집 중에서, '가장 작은 가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가집은 안민영이 주도한 '승평계'라는 모임이 결성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엮은 것이다. 여기에는 안민영이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서문의 내용은 그의 또 다른 가집인 <금옥총부>의 서문의 내용과 일부 구절이 가집의 성격에 맞게 일부 탈락되거나 변개된 것을 제외하면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승평곡>의 서문에는 승평계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의 이름이 적시되어 있어, 당시 이들의 면모와 활동 상황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승평곡>은 그 서문에서 승평계를 결성하기 위한 목적과 의도를 밝혔으며, 그 하축연에서 부를 가곡의 레퍼토리를 엮어 만든 가집이다. 수록된 작품들은 그 내용이 모두 직 간접적으로 당시의 대원군과 연관되어 있다. 승평계의 하축연이 대원군을 위한 자리였기에, 그 내용도 자연스럽게 대원군을 위한 헌사(獻辭)로 채워진 것이다. 또한 전제 12수의 작품은 기존의 논의와는 달리, 각각 8수와 4수로 구성된 2개의 서로 다른 '편가 형식'의 연창 레퍼토리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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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고악보(古樂譜) 가집(歌集)의 음악론(音樂論) 고찰(考祭) - <서(序)>를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n Musical Theory of Ancient Score and Anthology in 19th Century - Focused on -)

  • 문주석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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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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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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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19세기의 고악보와 가집의 서문에 나타난 음악론을 연구하기 위하여 총 39종의 문헌자료 가운데 서문이 수록된 고악보 자료는 $\ulcorner$금보정선(琴譜精選)$\lrcorner$ $\ulcorner$칠현금보(七絃琴譜)$\lrcorner$ $\ulcorner$현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lrcorner$ $\ulcorner$현가궤범(絃歌軌範)$\lrcorner$ $\ulcorner$죽취금보(竹醉琴譜)$\lrcorner$ 등 5종이며 가집 중에서는 $\ulcorner$교방가요(敎坊歌謠)$\lrcorner$ $\ulcorner$승편곡(昇平曲)$\lrcorner$ $\ulcorner$가곡원류(歌曲源流)$\lrcorner$ $\ulcorner$금옥총부(金玉叢部)$\lrcorner$ 등 4종의 자료를 활용하여 19세기의 고악보와 가집에 나타난 음악론을 고찰하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도출되는 결론은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고악보의 서문에서는 음악가의 마음상태는 본래의 성품과 바른마음을 가져야 하며, 조화로운 소리는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다. 음악가의 안정된 심리상태와 바른마음의 발현이 곧 바른음악의 표현임을 강조하였다. 둘째, 가집의 서문에서는 바른 뜻 즉, 노래말이 외설적이거나 잡스럽지 않은 노래말을 중시하였다. 바른 노래말은 급박하거나 경박스럽지 않은 완만한 빠르기의 속도로 소리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고악보와 가집의 서문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고악회복'이다. 느리지만 조화롭고 바른음악을 지향하는 것이 19세기 문인지식인들과 음악가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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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패트론으로서의 대원군과 박유전 <적벽가>의 변모 (Pansori Patronage of Daewongun and His Influences on Park Yujeon's Jeokbyeokga)

  • 유민형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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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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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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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은 판소리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요소 중 판소리의 '패트론'의 비중을 점검하고자 시도되었다. 문화예술의 향유계층인 동시에, 후원자로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패트론은, 서양 예술의 역사를 분석함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적극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여러 장르의 예술에 있어서 패트론의 영향력은 언제나 중요하게 연구되었다. 판소리의 패트론은 좌상객으로 통칭되는 양반층이었는데, 판소리가 양반층 사이에 애호되면서 왕실 패트론도 생겨나게 된다. 흥선 대원군은 판소리 애호가로 유명했으며, 또한 판소리 명창의 패트론으로서 후원했다. 대원군은 통인청대사습을 통해 판소리를 후원함과 동시에, 판소리의 선발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패트론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운현궁을 중심으로 활동한 가객 안민영과 함께 판소리 명창으로 박유전을 후원하였다. 대원군이 아직 세도를 잡기 전 전주에서 머무를 때 전주의 토호였던 백진석에게 도움을 받았다. 대원군은 세도를 잡게 되면서 전주에 통인청대사습 운용에 관여 하였고, 백진석의 청을 들어서 전주에 판소리 감상용의 저택인 학인당(學忍堂)을 지을 수 있게 하였다. 대원군이 특히 후원했던 판소리 명창으로 박유전을 들 수 있다. 박유전은 대원군의 운현궁에서 좌상객들의 영향아래, 자신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판소리의 텍스트와 음악을 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박유전은 순창출신의 명창으로 서편제의 비조로 불렸고, <심청가>와 <적벽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제자로는 이날치를 들 수 있고 초기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를 통하여 서편제로 전승되었다. 박유전이 한양으로 와서 운현궁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소리는 창곡과 사설에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박유전의 판소리는 이원성을 띠게 된다. 대원군은 박유전 판소리의 변화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박유전이 운현궁에서 다듬어 정제화한 판소리가 이른 바 강산제이다. 박유전이 한양으로 오기 전의 소리인 서편제와, 한양에서 다듬어 새롭게 완성한 강산제와는 완전히 구별될 수 있을 정도로 음악, 사설, 그리고 이념적 기반에서 차별화되어 있다. 그 변화의 모습을 동편제 및 서편제 <적벽가>와 강산제 <적벽가>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강산제 <적벽가>는 사상적으로는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일관적으로 띠게 되며, 조조에 대한 야유와 비하의 수위가 동·서편제 적벽가에 비하여 훨씬 약화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수들의 전투장면을 사설에 재인용하여 포함시킨 부분과, 한시의 적극적인 인용을 늘린 것 또한 양반좌상객의 취향에 부합하여 변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