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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판본(完板本) 심청전 복각 목판을 이용한 한지상의 인출특성에 관한 실험적 연구 (An Experimental Study on the Printing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Korean Paper (Hanji) Using a Replicated Woodblock of Wanpanbon Edition Shimcheongjeon)

  • 유우식;김정곤;안은주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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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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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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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고문헌 조사에서 목판 인쇄된 것인지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금속활자의 발명과 활용시기가 어떻게 판정되느냐에 따라 인쇄의 역사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목판본과 금속활자본의 판정에는 다양한 정보가 활용되고 있으나 간기(刊記)를 비롯한 인쇄 배경에 관한 정보가 없는 경우에는 인쇄된 문서의 글자, 광곽, 먹의 종류, 먹의 제작시대, 한지의 제작시기 정보를 분석하여 고문서의 제작시기와 인출(印出)방법에 관한 판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가 체계적으로 자료화되어 있지 않아 연구자의 경험과 감각에 의한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완판본(完板本) 심청전 복각 목판을 이용하여 목판본의 인출 특성을 실험적으로 조사하였다. 목판본 인출 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과 특징을 자료화하여 고문헌의 인출방법을 판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간기가 없는 목판 고소설의 경우 목판의 마모정도에 따라서 인출시기의 전후관계 추정에도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의 상징성$\cdot$경계성과 유적의 성격 (Symbolism$\cdot$Boundary of places and the characteristics of archaeo logical sites)

  • 곽종철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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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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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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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우리들의 일상생활속에 밀착되어져 온 장소의 상징성$\cdot$경계성에 주목한다면, 고대의 유적 및 고고학적 현상의 성격과 배경의 일단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밝히고자하였다. 사례로서는 고대의 경주지역의 월성해자유적에 보이는 사체방기, 불교사원 건립이전에 이미 전통신앙의 성소였던 천경림, 유적형성 초기단계에는 소규모의 집단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천변에 정착했다고 보여지는 황성동 제철유적을 들었다. 이들 유적 및 고고학적 현상의 입지와 성립배경에는 그 입지장소인 하천변, 구(구, 해자)등이 성과 속, 청정과 불정이 교차하는 상징적 경계 장소였다는 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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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지역 태실에 관한 시고 (The first study on taeshils of uljin region)

  • 심현용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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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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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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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처 태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하여 길지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 태를 봉안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ulcorner$삼국사기$\lrcorner$로서 신라 때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한다. 신라이후 고려시대 왕실에서 태 봉안의식이 성립된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제도라 하겠다. 이런 태실이 울진지역에서 필자에 의해 1997. 12부터 2000. 7까지 약 2년7개월간이라는 조사기간을 통해 신래태실, 나곡태실, 화구태실과 절태봉 등 4곳이 확인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각 태실의 주인공과 그 유물의 실체를 밝혀 보았다. 신래태실은 그 동안 행방조차 파악되지 않던 태지석, 태호, 조선통보의 유물을 모두 찾게 되었으며 조선 성종 17년(AD1486) 12월6일 오후9$\~$11시 사이에 태어나 다음해 4월7일 오전11$\~$오후1시 사이에 장태한 성종의 아들인 견석왕자의 태실로 밝혀졌다. 나곡태실은 도굴되었던 태지석의 명문도 밝혀졌으며 이 태실은 조선 광해군 11년(AD1619) 5월23일 오후9$\~$11시 사이에 태어나서 그 해 11월4일 오전9$\~$11시 사이에 장태한 광해군의 딸 태실이다. 화구태실은 신라시대 왕자의 태실로 구전되어 오는데, 풍수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태실임이 분명하나 더 이상의 태실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절태봉도 태실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태실에 대한 연구가 조선왕실의 장태처리에 관한 귀중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진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울진지역에서 발견된 태실들은 태실제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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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部金光明經』 간행과 『高麗大藏經』 각성사업

  • 최연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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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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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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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연구는 강화경판 『高麗大藏經』에 入藏된 『合部金光明經』과 13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口訣本 『合部金光明經』의 조성에 참여한 刻成人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국가적·범종파적 사업으로 전개된 각성사업에 『합부금광명경』이 조성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결본 『합부금광명경』 조성에 참여한 이들은 각성사업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이에 『고려대장경』에 입장된 『합부금광명경』과 구결본 『합부금광명경』을 상호 비교해 본 결과 경전의 내용과 板式, 그 구성 체계가 相異한 본이었다. 그리고 彫成에 참여한 각성인을 조사해 본 결과 『고려대장경』에는 ‘부령’이었고, 구결본은 ‘存植’, ‘立成’, ‘正安’, ‘孝兼’ 등이었다. ‘存植’, ‘正安’, ‘孝兼’은 고종 24년부터 16년간 전개된 각성사업에 참여한 각성인들과 동일 인물이었다. 특히 ‘孝兼’은 자신을 비구라고 밝힌 점으로 볼 때 당시 활동하던 刻字僧으로 파악된다. ‘存植’과 ‘正安’은 고종 33년에 간행된 『禪門三家拈頌集』과 13세기 중엽에 간행된 『圓覺類解』, 『弘贊法華傳』의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 刻手로 보여진다. 그래서 각성사업에 참여한 각성인들은 각자의 여건에 따라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合部金光明經』은 『妙法蓮華經』·『仁王經』과 함께 호국삼부경 중의 하나로서 고려시기에 수시로 간행되고 있었다. 『금광명경』은 국가를 보호하고 내우외환을 소멸시키기 위해 왕실을 비롯한 관료층들이 깊이 존신하고 권장하려 하였던 불교 경전이었다. 특히 대외관계상의 위기상황에는 『금광명경』을 바탕으로 하는 功德天道場이라는 호국적 성격의 법회를 개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합부금광명경』의 간행 배경에는 『고려대장경』이 국왕을 정점으로 반외세력인 몽고군을 격퇴시키고, 또 최씨무인정권으로부터 왕권을 회복시키고자 시대적 분위기가 적극 반영되어 있다. 구결본 『합부금광명경』의 간행은 민족적·국가적 사업이었던 각성사업에 적극 동참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고려 불교의 창조적 발전은 물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 하는 호국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주제어〕『高麗大藏經』, 『合部金光明經』, 刻成人, 최씨무인정권, 護國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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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인의 묘제와 사후세계관 (The thought of Death and the Tombs in the Neolithic Age of the Korean Peninsula)

  • 이상균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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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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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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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수렵과 채집이 주를 이룬다. 사철 바뀌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활동범위의 공간적 영역이 매우 넓었으며, 죽음으로 인한 묘제의 축조에 노동력과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의 묘제는 농경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다양화되는 묘제와는 다르며, 이 시기에는 지상의 묘제나 얕은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현 상황에서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사후세계관에 대한 양상은 다섯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신석기시대에는 피장자를 묻을 때의 머리를 두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 장례시에 두향문제에 대한 의례적, 종교적인 의식은 각자의 유적 내에서 일정한 규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매장방법에 있어서 통영 연대도에서 부신장이 보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앙와신전장이 주류를 이룬다. 셋째, 신석기시대에는 일반적으로 1인씩 묻는 단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합장의 풍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이 시기에는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의 다양성에 의해 이미 빈부나 신분, 지위의 고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신석기시대 중기에 상촌리유적에서와 같이 이미 화장의 풍습이 있어 이차장이 행해졌음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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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 (A Study on the Sources of Creativity in Buddhist Mural Paintings of Muwisa and Geungnakjeon in Gangjin)

  • 배종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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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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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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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이 연구의 주제는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을 살펴본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것은 세종 12년(1430)의 일이었으며, 후불벽화는 성종 7년(1476)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억불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따라서 무위사에서 어떻게 극락전의 건립이 가능하였고, 누가 벽화의 조성에 참여하였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지유와 대화주, 그리고 시주가 주도하였다. 이들 중 가장 중요시된 것은 지유었다. 특히 지유 효영은 효영대군 이보와 동일인물로 믿어진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자복사와 수륙사로 공인된 데 힘입은 불사였다. 자복사는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의 성격을 지닌 사찰이었으며, 수륙사는 수륙재를 베풀 목적으로 특별히 지정된 사찰이었다. 수륙재는 적을 포함한 전망자와 모든 망영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었다. 자복사와 수륙사에는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이 뒤따랐다. 따라서 효령대군의 무위사 불사참여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는 강진으로 낙향한 양반과 토착세력이 주도하고 대선사와 양인 부여자, 부곡민과 노비가 동참한 불사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위사가 수륙사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수륙사에서 베풀어지는 수륙재는 모든 망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왕실부터 서민에 이르는 폭넓은 참여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세종 2년에 수륙재가 공인된 유일한 상예가 되면서, 왕실의 구병부터 전염병의 방지를 기원하는 재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과 참여계층의 확대가 이루어 됐던 것이다. 무위사가 자리잡은 남해 연안지역은 왜구의 약탈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이 당시에 아미타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왜구로부터 당하는 혹독한 고초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 깔려있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되고, 대웅전이 아닌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하는 극락전이 건립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이후 강진지역의 사람들은 신분의 구별 없이 무위사의 수륙재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차츰 무위사 극락전을 수륙사라는 사격에 걸맞게 장엄하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후 45년 만에 극락전의 내부가 개조되고, 아미타후불벽화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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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검의 군사적 운용 (A study on Military Operation of Sword during Chosun Dynasty)

  • 강성문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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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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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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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도검이 군대와 실전에서 가지는 군사적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보았다. 먼저는 조선전기의 도검과 도검군에 관한 것이다. 병사들의 개인 휴대무기인 도검이 대여진전을 통해서 일정한 규격화가 성립된 문종대의 환도체제였다. 다음은 지휘관에게 군권을 위임하는 대장 임명식은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부월의식으로 나타났는데, 조선조에는 점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조선의 대전략은 여진족에 대한 대북책은 기병 중심의 전법체제로 전문 도검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는데 이 열세를 화약병기 등으로 보충하였다. 조선 정부는 임란왜란과 같은 대전쟁기에 중국과 일본의 도검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 활용하였다. 조선 정부는 임란중에 명나라의 삼수병제에 의한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도감을 창설하였다. 살수 병종의 단병기들의 사용 숙달은 도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단기간에 가능했던 것이다. 임란시에 왜검은 크기가 조선의 환도보다 길어서 실전에 효과가 켰다. 조선은 왜검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왜검술의 습득에도 관심이 높았다. 강왜자를 통해 왜검술의 전습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조선은 도성 방위를 위한 도길 무예를 비롯한 단병기에 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조는 실제적인 도성 방위를 위한 군사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수성전을 위해 화약병기 뿐만 아니라 단병기 무예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 1750년에 발간된 병서가 $\ulcorner$무예도보통지$\lrcorner$ 이었는데, 단병기 무예 중에서 도검류의 비중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검류의 장점은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된 개인 휴대무기로 최후의 백병전에서는 최상의 무기라는 점이다. 모든 전투에서의 최후의 급거지간에 의존할 수 있는 방호무기였다. 그리고 이는 여러 실전을 통해서 그대로 입증되었다. 현대 병기의 등장으로 재래의 단병기의 전술적 기능은 퇴화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도검류는 다른 단병기와는 달리 현재에도 소총의 총검술용 대검과 의례적인 지휘도 및 예도 등으로 그 군사적 기능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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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생태박물관(에코뮤지엄)형성과 실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Esrablishment of an Ecomuseum in China and its Actual States.)

  • 오일환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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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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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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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중국에서는 21세기에 들어 인간과 자연의 조화 및 생태의 균형 유지가 매우 중시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전면적이 협력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조화로운 사회건설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뿐 아니라 개혁개방 이후 급격한 경제적 변화로 전통 문화의 보존과 중화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애국주의 교육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에 중국은 박물관의 문화유산 보존과 전시기능 뿐 아니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박물관 형태인 생태박물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국은 대도시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던 대규모의 박물관을 대신하여 노르웨이의 지원과 중국박물관협회를 중심으로 꾸이저우성, 꽝시장족자치구, 내이멍구자치구 등 소수민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산간 오지지역을 중심으로 생태박물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태박물관의 건설은 서부대개발이 진행되면서 소수 민족의 고유한 문화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문화적 수요를 창출하고 경제적 생활향상으로 함께 화해사회(조화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커다랗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생태박물관 조성을 국가사업으로 전환하면서 민족과 지역 특성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고 활성화하기 위하여 소수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를 더욱 강화하면서 점차 중국화, 본토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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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육을 위한 문화유적의 해석(Interpretation)에 관한 기본연구 (A Study on the Interpretation of Cultural Heritage Sites for Public Education)

  • 한상우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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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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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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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이 연구는 문화유적을 역사교육 또는 문화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유적이 가지는 교육적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이러한 유적의 교육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해석 (Interpretation)의 중요성과 그 방법상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논의하는데 그 연구목적이 있다. 문화유적이 가지는 교육적 가치는 대상 문화유적에 대한 역사 문화적 사실을 인식시키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외에도 이러한 교육적 효과를 통한 문화유적의 보존과 관리 측면에서도 큰 중요성을 지닌다. 문화유적의 교육적 활용과 함께 유적 보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교육적 가치를 잘 활용하여 유적이 가지는 교육적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달하고 방문객을 설득시킬 수 있느냐 하는 해석의 문제에 대한 많은 연구와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해석이란 여러 가지 전달 매개체를 사용하여 유적에 대한 올바를 이해를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본존의식을 이끌어 냄과 더불어, 유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여 유적이 교육적 그리고 관광자원으로 유용하게 활용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문화유적의 해석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에 있어서는 주요 대상층에 대한 설정과 그에 알맞은 프로그램의 적용이 현실적으로 우선 전제되어야 하며, 그들에게 알맞은 수준의 교육적 정보와 지식을 다양한 형태의 해석적 도구와 방법을 사용하여 제공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방문객에게 제공하고자하는 교육적 메시지를 잘 담은 해석의 주제를 먼저 도출하여야 하며 선정된 주제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의 해석 방법과 기술들이 개별적 또는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문화유적에 운영 중인 해석프로그램이 방문객에 대해 의도된 교육적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철저한 평가는 해당 해석프로그램의 계속적 운영에 있어서 큰 중요성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전시를 포함한 해석프로그램의 평가는 크게 기획 단계에서의 평가, 개발과정 중의 평가, 그리고 완성 후 평가 등 3단계의 평가를 거쳐 그 결과를 해석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에 계속 반영한다. 문화유적 현장에서의 해석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은 현실적으로 많은 인력과 재정적인 뒷받침이 요구되는 일로 계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며, 문화유적의 관리측면에서 기존의 하드웨어의 구축에 관한 관심에 병행하여 앞으로는 해석프로그램 같은 유적 활용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운영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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