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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統合)의 시학(詩學), 왕사정(王士禎)의 시론(詩論)과 사론(詞論) (The Poetics of Integration; Shi Zhen Wang's poetics and theory on Ci)

  • 김규선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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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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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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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청초(淸初)의 시인(詩人), 시론가(詩論家)로서 청(淸) 사대(四大) 시학(詩學) 중 하나인 신운설(神韻說)의 창도자(唱導者)로 알려진 왕사정(王士禎)은 50년 넘게 청초(淸初) 시단(詩壇)의 영수(領袖)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통시적(統時的)으로는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엄우(嚴羽)의 "시화(詩話)", 서정경(徐禎卿) 의 "담예록(談藝錄)" 등 위진(魏晉)부터 명(明)에 이르는 주요 시학(詩學)들의 성과를 통합하고 공시적(共時的)으로는 청원(淸遠)/호건(豪健), 종당(宗唐)/종송(宗宋), 완약(婉約)/호방(豪放), 북송사(北宋詞)/남송사(南宋詞)와 같은 당대(當代) 문단(文壇)의 쟁점들을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통합적 시학(詩學)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변함없는 목표는 역시 특정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기준 위에서 문학 본연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 기준과 가치의 제공은 역시 신운설(神韻說)이 그 원천이 되었고 구체적으로는 '불저일자(不著一字), 진득풍류(盡得風流)', 미외지미(味外之味), 흥회(興會), 자연(自然), 아정(雅正) 등이 각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의 신운설(神韻說)은 몇 가지 시품(詩品)만을 편파적으로 추켜세우는 대신, 각 시품(詩品)이 적절하고 완벽한 경지에 이르면 보편적으로 얻는 본연(本然)의 정신적 특성으로 '신운(神韻)'을 귀결지음으로써 객관적, 보편적 차원에서 그 통합성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신운설(神韻說)은 그의 시론(詩論)과 사론(詞論)을 통합하는 작용도 했다. 왕사정(王士禎)이 미학 이론으로서의 신운설(神韻說)을 성립,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시론(詩論)과 사론(詞論)이 상호독립적으로 윤곽을 갖추는 동시에 상호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나아가 거꾸로 양자(兩者)가 신운설(神韻說)을 심화시킨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립된 왕사정(王士禎)의 통합적 시학(詩學)은 시(詩)와 사(詞)에 대한 실제 비평에서도 특정 작가나 조대(朝代), 유파(流派)에 대한 편견에 빠지지 않고 각각의 장점을 보고 취사선택하는 객관적 감식안을 발휘하였다. 이로써 왕사정(王士禎)의 통합적 시학(詩學)은 거의 반 세기 동안 청초(淸初) 문단(文壇)을 주도하고 청(淸) 사대시학(四大詩學)의 선성(先聲)이 될 수 있었다.

<황조가>에 대한 접근 방식 재고 - 편찬자의 의도를 중심으로 - (Reconsidering the Approach to )

  • 조하연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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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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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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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삼국사기> 편찬자의 의도를 중심으로 유리왕에 대한 전체기록 속에서 <황조가>가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황조가>가 등장하는 유리왕의 초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과 <삼국사기>의 기본적인 서술 방식에 비추어 <황조가>의 삽입이 이질적임을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찬자가 이 노래를 기록한 이유를 중심으로 이 노래의 의미를 탐구한 연구가 의외로 드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유리왕에 대한 편찬자의 인식, 유리왕에 대한 전체 기사의 양상, 해당 부분의 원문 재해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즉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굳이 직접적으로 논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유리왕의 내면이 담긴 취미로서 <황조가> 부르기를 소개하여 그가 겪은 실패와 이후의 통치에 나타난 불안과 실수들이 모두 충분한 자질을 다듬지 못한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자면, 유리왕이 평소 불렀던 짧은 노래로써 유리왕의 삶의 한 단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편찬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황조가> 최고(最古)의 향유자를 넘어 우리가 지향하는 최고(最高) 수준의 향유자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향유는 문학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의미를 찾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편찬자의 의도를 추적함으로써 소중한 문화유산인 <황조가>가 지닌 문학사적, 역사적 의의를 자세히 드러내고, 이를 온전히 보유하고 보전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유리왕의 삶 전체와 이 노래에 담긴 유리왕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의 서지적 특징과 자료적 가치 - 수록 인물 분류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Bibliographic Characteristics and Data Value of YoungNamRooSiun(嶺南樓詩韻) - focusing on the classification of the recorded characters -)

  • 전재동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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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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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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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최근에 소개된 필사본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의 서지적 특징과 자료적 가치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영남루시운"은 영남루 본당 마루를 비롯하여 능파당(凌波堂), 침류각(枕流閣), 객사동헌(客舍東軒), 덕민정(德民亭), 람수정(攬秀亭) 등 6개 건물을 대상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창작된 기문(記文), 상량문(上樑文), 제영시(題詠詩) 등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 작가는 누적 인원 412명이며, 작품 수는 산문(散文) 11편, 운문(韻文) 559수(首) 등 총 570편이다.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에 수록된 제영시(題詠詩) 작가(作家)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비롯하여 밀양(密陽), 청도(淸道), 경주(慶州), 창원(昌原) 등지의 지방관, 선위사(宣慰使), 경차관(敬差官), 어사(御使), 선전관(宣傳官), 호송관(護送官) 등 문무(文武)관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누적인원 412명 가운데 318명이 중앙과 지방의 관원들이며, 이 수치는 전체 작품의 77%를 차지한다. "영남루시운"에 수록된 작가들의 관직별 분류를 통해 조선전기 영남루 제영시(題詠詩) 작가들은 일반 시인묵객들보다 특정 임무를 띠고 밀양 지역에 파견된 관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영남루는 승경(勝景) 감상의 목적 이외에 관찰사나 도사의 집무 공간, 왜국 사신 접대 등의 공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월당 사유록의 남원(南原) 시문과 만복사저포기의 향토성 (Namwon poetry of Maewol-dang Sayou-rok and the local color of )

  • 강석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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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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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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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타난 향토성을 해명한 논문이다. <만복사저포기>는 "금오신화"의 다른 작품에 비해 향토성이 매우 진한 작품이다. 남원과 만복사는 이 소설의 주된 배경으로, 주제를 구현하는데 밀도 있게 활용되었다. 또한 저포(樗蒲)와 같은 민속놀이가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주인공은 남원(南原)의 토성(土姓)인 양씨였다. 양생이 귀녀(鬼女) 하씨(何氏)와 만나 사랑을 나누던 만복사와 하씨의 무덤이 있던 개령동, 양생이 하씨와 영원히 헤어진 뒤 약초를 캐다가 사라진 지리산은 지극히 향토적인 공간이다. <만복사저포기>의 향토성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김시습이 오랫동안 남원에 체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습이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에서 개성적이며 향토적인 배경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복사저포기>는 많은 고소설들이 가진 장소적인 전형성(典刑性)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복사저포기>의 향토성은 <만복사의 양생설화>에서도 확인된다. 남원지방에서 전래되어 오던 <만복사의 양생설화>는 1970년초에 채록되었다. 이 설화는 <만복사저포기>와 매우 비슷하여, 이 설화를 <만복사저포기>의 근원설화로 보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만복사저포기>의 아류작으로 판단한다. <만복사저포기>는 아주 어려운 한문 소설이며, 조선시대 선비들도 쉽게 접해 보지 못했던 희귀소설이 <만복사의 양생설화>의 발생과 전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주된 요소는 바로 <만복사저포기>의 향토성이다. 이런 향토성으로 인해, <만복사저포기>가 남원의 민중에게 쉽게 수용되었고, 이후 민간 설화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의 현실인식 (A study on Keup-ahm Min Sah-pyeong's Realization of Reality)

  • 정성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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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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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9-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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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의 목적은 고려 말에 삶을 영위한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현실인식을 고찰하는 데 있다. 민사평은 당시 여러 학자들과 활발한 교섭을 통해 학문적 교류가 가능했다. 그는 21세 때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수행해 오면서 행동이 바르고 지조가 변하지 않았다. 민사평은 이제현, 백문보, 이색 등과 자주 만남을 가지며 생각을 주고 받았다. 가끔 백문보는 모여서 술 마실 때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색은 민자평이 현묘한 시법을 깨달은 자라고 높게 평가한 바 있으며, 그의 시는 후세까지 계속 전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민사평이 활동했던 시대는 고려 말로서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국외적으로 고려 말은 당시 빈번했던 왜구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토와 고통 받는 백성들로 온 나라가 불안정했다. 국내적으로는 당시 위정자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이 심각했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며 애민적 현실인식을 보였다. 그는 의리가 없는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욕심이 있다면 부귀영화도 언젠간 쇠퇴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 백성의 심정을 깊이 동정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구제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민사평의 애민적 현실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유영국(劉永國)의 초기 구성주의: <랩소디>(1937)에 나타난 유토피아니즘 (Yoo Young-kuk's Early Constructivism: Utopianism in (1937))

  • 유영아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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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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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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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is study is about Yoo Young-kuk's early works which show constructivism, especially focus on his debut painting, for the 7th Dokuritsu Bijutsu Kyokai(獨立美術協會, the Independent Fine Arts Association) in Tokyo in 1937. The work was painted 2 years after he had started his study in Japan in 1935. It was the first painting that applied Constructivism.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Constructivism to be a leading art in his abstraction. After this picture, Yoo was soon devoted to the principles of Constructivism-- Faktura(material), Tektonika (tectonics), Tekhnika(technique), space, construction-- in his painterly reliefs. This article examined why Yoo concentrated on Constructivism for , what the characteristics were, and what influences were on other works from 1935 to 1949. In addition, I investigated in which period was painted and how Constructivism was spread in 1930s and early 1940s in chapter 2. I scrutinized Rhapsody in chapter 3. When Yoo created Japan was under the Fifteen Years War(1931-1945), and a major discourse was the Japanese Spirit at that time. It was connected with construction of an ideal nation which the Japanese ultra-national fascism pursued. This ideological pursuit was intended to unite the Japanese people for total war system and to restore a national dignity which had been fallen down due to Manchurian Incident(1931). Thus, on the hand, Kokusai Bunka Shinkokai(國際文化振興, The Society for International Cultural Relations) and the Nippon Kosaku Bunka Renmei(日本工作文化連盟, Japanese Werkbund) were supported financially by the Japanese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the government enacted regulations to opposing parties which would distract Japanese people's unification. As for the Japanese art world, the merge of art groups was carried out through remodeling of Teikoku Bijutsuin(帝國美術院, The Imperial Fine Arts Academy) in 1935. This brought out continuous dispute and disorder. Young artists who felt difficulty of entering an entry of Imperial Fine Arts Exhibition repeatedly grouped and disbanded for small art groups to build their standing, which they pursued Surrealism and Abstract art. Among them Constructivism was considered as the latest trend and was popular in craft, design, architecture as well as fine arts. In the year before he painted , Avant-garde theatres including Constructivism theatre were introduced in a feature article of September, 1936 in Atelier, which was dealing with mainly avant-garde arts. Books related with Constructivism were translated into Japanese, and Gestaltung Education had become active since the publication of A Compendium of Gestaltung Education("構成敎育大系"(1934)), Salvador Dali(1904-1989) was also introduced, so Surrealism was drawn more attention by young artists. reflected popular trends. Yoo analyzed the Japanese avant-gardists' archaic taste in the Independent Art Association that he submitted his painting to. And then he entitled 'Rhapsody' which derives from Ancient Greek's epic poetry and deliberately set up images in a scene. In chapter 3, I examined a theme which was planned carefully by sorting favorite images from the Japanese Surrealism. was a result that Yoo Young-kuk observed objectively the phenomenon that young artists dreamt of Utopia or longed for Nostalgia passively and lethargically under wars. And then he otherized himself from that circumstance. First of all, for he used the typical icons of Japanese Surrealism such as the horizon, flowing clouds, and vast plain that were considered stereotypes of Arcadia. He, however distinguished himself form those Japanese Surrealists. He made his own vision about Utopia by referring Lyubov Popova(1889-1924)'s stage design. His objective point of view was expressed by positive and dynamic images of structure and human's actions. Constructivism which was attempted in had an effect on other early constructive works, and the principles of Constructivism were sought hard in reliefs, paintings, and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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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풍의 변화와 이용휴의 글쓰기 (Changes in Literary Trend During the Late Joseon and Lee Yong-hyu's Writing)

  • 이은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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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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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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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글쓰기란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문풍은 그렇지 못했다.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는 복고주의 문장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문장의 법도를 무시한 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도그마에 빠져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성리학과 내용은 없이 껍데기만을 모의하는 의고적 글쓰기에 지친 문장가들은 익숙함과 전범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의 가운데에 있던 이용휴는 당시 수입된 최신의 중국 서적들을 통해 명말청초의 사조들을 익히며 자신만의 개성적인 글쓰기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적 사유체계를 거부하고 인간성 본래의 측면에 관심을 가지며 주체 회복을 강조하였으며, 반의고적 글쓰기를 통해 허위에 찬 당시의 풍토를 비판했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천리(天理)]를 회복하고, 이를 위해서는 마음[심(心)]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심즉리(心卽理)'를 내세우는 양명학과 비슷했다. 양명학은 마음[심(心)]을 윤리의 준칙[이(理)]으로 삼고 있어서, '이(理)는 외재적이고 초월적이며, 이것은 성인에 의해 언어화되고, 경전으로 문자화 되어 있다.'는 성리학과는 확연히 갈라졌다. 그는 이들처럼 이(理)의 외재성을 부정하고 내재성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의 경전 중심주의를 해체했다. 그가 내세운 전범의 부정과 주체 회복의 글쓰기는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때문에 그를 양명학자로 단정 짓거나, 그를 비롯한 반의고적 태도를 갖는 문인들의 사상적 근거를 양명학이라 확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을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단정 짓는 순간 그것이 또 전범이 되어 주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체의 전범을 부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고, 그것을 글로 남겼다. 우리가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익산 금마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 일대의 현황과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 (A Review of Current Status and Placeness on the Yusang-Goksu Ruins in Hwanggak-dong, Geumma, Iksan)

  • 노재현;한민순;서윤미;박율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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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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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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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옛지도 및 항공사진의 분석, 현장 관찰과 드론 사진 촬영과 고저측량 그리고 주민인터뷰를 통해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에 소재한 '유상곡수(流觴曲水)' 암각서 유적의 입지성과 장소성을 추적하여 이곳에서의 유상곡수 수계(修禊) 등의 향유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이곳의 장소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내 유상곡수로 정원 유적의 조명과 보존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유상곡수 유적이 존재하는 황각동 일대는 여러 문헌에서 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경(佳景)으로 손꼽혀왔다. 황각동의 유래는 의정부(議政府)의 별칭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그의 태생지와 인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별서인 태허정(太虛亭), 은거당인 퇴휴당(退休堂)과 묘소 그리고 사후 배향 서원 등이 인근에 다수 분포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밭일 후 바위에 호미를 걸어 놓는 넓은 바위인 하서대(荷鋤臺)는 중국과 한국의 한시의 용례로 볼 때 한가로운 전원생활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소박하고 은자적인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 유적의 핵심이 되는 '유상곡수' 바위글씨가 있는 수석바위 상부의 암혈(巖穴)은 수계를 지원하기 위한 차일공(遮日孔)으로 파악되며 인근의 일간정과 모정은 유상곡수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등잔바위 전면에 새겨진 '황각동(黃閣洞)'바위글씨는 황각동천(黃閣洞天)에 이르는 관문으로, 향촌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관념화한 표식으로 파악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황각동'과 '하서대' 바위글씨는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인 1901년 3월 29일에 익산군수 오횡묵과 지인인 김인길(金寅吉)이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봉구의 「황각동운(黃閣洞韻)」과 양곡의 후손인 소진덕의 「황각동시회(黃閣洞詩會)」란 시제로 볼 때 황각동에서 곡수연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 모임이 최소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현재 곡수로의 최대폭은 11.3m, 횡단구배는 15.04%로 계상되었으며 곡수로로 추정되는 수로 구간의 연장거리는 약 27.6m, 종단구배는 3.51%로 측정되었으나 현재 양안이 석축으로 처리된 점을 감안한다면 곡수로의 폭원과 연장거리는 훨씬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과 관련된 봄(삼월삼짇날) 모춘(暮春) 이용, 음주와 시 짓기, 시제 「황각동시회」, 유상곡수 바위글씨 그리고 인근 유상정으로 추정되는 일간정이라는 정자의 존재 등으로 볼 때 최소한 조선 말기까지 유상곡수연이 펼쳐진 공간이었음이 확인된다. 아쉽게도 '유상곡수'바위글씨에 대한 암각 주체와 조선 말기 이전의 향유자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함은 연구 한계로 남는다. 이는 향후 이에 대한 꾸준한 자료 발굴 노력을 통해 구명해야 할 부분이다.

'아유르베다'($\bar{A}yurveda$)의 의경(醫經)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Medical Classics in the '$\bar{A}yurveda$')

  • 김기욱;박현국;서지영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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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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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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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Through a simple study of the medical classics in the '$\bar{A}yurveda$', we have summarized them as follows. 1) Traditional Indian medicine started in the Ganges river area at about 1500 B. C. E. and traces of medical science can be found in the "Rigveda" and "Atharvaveda". 2) The "Charaka" and "$Su\acute{s}hruta$(妙聞集)", ancient texts from India, are not the work of one person, but the result of the work and errors of different doctors and philosophers. Due to the lack of historical records, the time of Charaka or $Su\acute{s}hruta$(妙聞)s' lives are not exactly known. So the completion of the "Charaka" is estimated at 1st${\sim}$2nd century C. E. in northwestern India, and the "$Su\acute{s}hruta$" is estimated to have been completed in 3rd${\sim}$4th century C. E. in central India. Also, the "Charaka" contains details on internal medicine, while the "$Su\acute{s}hruta$" contains more details on surgery by comparison. 3) '$V\bar{a}gbhata$', one of the revered Vriddha Trayi(triad of the ancients, 三醫聖) of the '$\bar{A}yurveda$', lived and worked in about the 7th century and wrote the "$A\d{s}\d{t}\bar{a}nga$ $A\d{s}\d{t}\bar{a}nga$ $h\d{r}daya$ $sa\d{m}hit\bar{a}$ $samhit\bar{a}$(八支集)" and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八心集)", where he tried to compromise and unify the "Charaka" and "$Su\acute{s}hruta$".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 was translated into Tibetan and Arabic at about the 8th${\sim}$9th century, and if we generalize the medicinal plants recorded in each the "Charaka", "$Su\acute{s}hruta$" and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 there are 240, 370, 240 types each. 4) The 'Madhava' focused on one of the subjects of Indian medicine, '$Nid\bar{a}na$' ie meaning "the cause of diseases(病因論)", and in one of the copies found by Bower in 4th century C. E. we can see that it uses prescriptions from the "BuHaLaJi(布哈拉集)", "Charaka", "$Su\acute{s}hruta$". 5) According to the "Charaka", there were 8 branches of ancient medicine in India : treatment of the body(kayacikitsa), special surgery(salakya), removal of alien substances(salyapahartka), treatment of poison or mis-combined medicines(visagaravairodhikaprasamana), the study of ghosts(bhutavidya), pediatrics(kaumarabhrtya), perennial youth and long life(rasayana), and the strengthening of the essence of the body(vajikarana). 6) The '$\bar{A}yurveda$', which originated from ancient experience, was recorded in Sanskrit, which was a theorization of knowledge, and also was written in verses to make memorizing easy, and made medicine the exclusive possession of the Brahmin. The first annotations were 1060 for the "Charaka", 1200 for the "$Su\acute{s}hruta$", 1150 for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 and 1100 for the "$Nid\bar{a}na$", The use of various mineral medicines in the "Charaka" or the use of mercury as internal medicine in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 and the palpation of the pulse for diagnosing in the '$\bar{A}yurveda$' and 'XiZhang(西藏)' medicine are similar to TCM's pulse diagnostics. The coexistence with Arabian 'Unani' medicine, compromise with western medicine and the reactionism trend restored the '$\bar{A}yurveda$' today. 7) The "Charaka" is a book inclined to internal medicine that investigates the origin of human disease which used the dualism of the 'Samkhya', the natural philosophy of the 'Vaisesika' and the logic of the 'Nyaya' in medical theories, and its structure has 16 syllables per line, 2 lines per poem and is recorded in poetry and prose. Also, the "Charaka" can be summarized into the introduction, cause, judgement, body, sensory organs, treatment, pharmaceuticals, and end, and can be seen as a work that strongly reflects the moral code of Brahmin and Aryans. 8) In extracting bloody pus, the "Charaka" introduces a 'sharp tool' bloodletting treatment, while the "$Su\scute{s}hruta$" introduces many surgical methods such as the use of gourd dippers, horns, sucking the blood with leeches. Also the "$Su\acute{s}hruta$" has 19 chapters specializing in ophthalmology, and shows 76 types of eye diseases and their treatments. 9) Since anatomy did not develop in Indian medicine, the inner structure of the human body was not well known. The only exception is 'GuXiangXue(骨相學)' which developed from 'Atharvaveda' times and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 In the "$A\d{s}\d{t}\bar{a}nga$ Sangraha $samhit\bar{a}$"'s 'ShenTiLun(身體論)' there is a thorough listing of the development of a child from pregnancy to birth. The '$\bar{A}yurveda$' is not just an ancient traditional medical system but is being called alternative medicine in the west because of its ability to supplement western medicine and, as its effects are being proved scientifically it is gaining attention worldwide. We would like to say that what we have researched is just a small fragment and a limited view, and would like to correct and supplement any insufficient parts through more research of new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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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한중(韓中) 묵연(墨緣)의 상징, 매감도(梅龕圖) (Maegamdo(梅龕圖), Symbol of Chinese and Korean Scholary Comespondence in the 19th Century)

  • 김현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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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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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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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매화나무는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군자의 덕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역시 매화와 관련된 주요한 회화 형식이다. 이 논문은 구리매화촌사도(九里梅花村舍圖)류의 구성상 기원과 해당 그림들이 조선에 알려지는 과정을 밝히고 매감도(梅龕圖)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 특징을 논의하고자 하였기에 이들 작품이 속한 매화서옥도의 발생부터 검토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매화서옥도를 임포고사(林逋故事)와 연결시키고 있다. 물론 매화서옥도와 임포고사 간의 관계가 문인의 은거라는 의미로 연결되지만 작품의 구성 방식에 있어서는 임포고사에 기초한 회화류와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다. 방학도(放鶴圖)나 관매도(觀梅圖) 같은 임포 관련 회화에는 대개 한 두 그루의 매화나무와 학이 그려지고 이에 조응하는 문인이 표현된 반면, 매화서옥도는 문인의 은거가 묘사되면서도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구성이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화서옥도는 매화 애호경향의 발생 이후에 그려진 관련 회화처럼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매화와 관련된 회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내지 사군자 일종의 매화도를 비롯해 탐매도(探梅圖) 같은 맹호연(孟浩然)고사에 기초한 산수화가 고려 이후 전 시기에 걸쳐 골고루 제작되었다. 그러나 매화서옥도만은 19세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조선보다 빠른 17세기부터 성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매화서옥도라는 유형의 회화가 특정 시기의 문화현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19세기에 매화서옥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원인은 바로 김정희가(金正喜家) 및 신위(申緯)와 오숭량(吳嵩梁)을 비롯해 그의 회화 제작 주문을 전담하여 받았던 장심(張深) 간의 교유 때문이다. 이 교류 속에는 두 종류의 매화서옥도류가 제작되어 오고갔다. 청에서는 부춘산(富春山)아래 동강(桐江)가의 구리주(九里洲) 풍광을 담은 구리매화촌사도가 그려졌다. 구리주는 오숭량이 은거하려고 했던 곳으로, 수십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오숭량의 매벽(梅癖)과 그의 시를 기념하는 '매감공양(梅龕供養)' 행위가 일어났고 그 모습을 담은 매감도가 제작되었는데, 이 매감도는 구리매화촌사도류에 보인 '만매(萬梅)형식'을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신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매감시불도(梅龕詩佛圖)>이다. 이 그림은 북경에 소개되어 장심이 그린 매감도들의 구성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매감도류는 19세기에 조희룡 등에 의해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라고 별칭되는 매화서옥도의 유행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만매서옥도의 발생을 파악하기 위한 선행단계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