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의대증원 갈등과 ‘럼즈펠드 행렬’
2025년 10월 20일, 정부는 보건의료 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해제했다. 2024년 2월 23일에 해당 경보를 발령한 지 1년 8개월 만이다. 2025년 7월 들어 대다수 의과대학생이 복학하고 하반기 모집을 통해 8월에 전공의가 복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그러나 이는 소위 ‘의정 갈등’이 일시적으로 잦아든 것일 뿐, 근본 문제들이 해소된 결과는 아니다. 2027년 증원의 규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데다, 그와 별개로 이재명 정부가 임기 내 추진을 예고한 전달체계와 지불제도 개편은 막대한 갈등의 잠재력을 갖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는 그간 학계 일부에서 얼마간 논의되었을 따름이고, 정책 이슈로 비중있게 다뤄져 왔다 고 말하기 어렵다.
이른바 저출생ㆍ고령화라는 인구학적 변동 및 의료비 증가라는 배경과 함께,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더 늘리려는 정부의 시도(의과대학 정원 확대[의대증원] 시도)가 촉발한 갈등은 그간 잠재되어 있던 보건의료 부문의 여러 이슈를 본격적으로 공론장에 진입시켰다. 그 목록의 범위는 중증, 응급, 분만, 소아 등의 의료서비스에 관한 접근성이 떨어지고 이 접근성의 지역별 격차가 늘어나는 현상에서부터, 소위 ‘3분 진료’에 대한 불만, 실손보험 의 폭발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물론 이런 쟁점들이 잠복해 있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평균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한국 의료체계의 주요 행위자들은 크고 작은 불만은 있지 만 그런대로 자신의 핵심 이해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부로서는 ‘가성비’ 뛰어난 의료, 즉 주요 건강결과 지표가 우수한 동시에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 ment (OECD) 평균을 크게 하회하는 의료비 지출 비율을 관리해 왔다. 의사 집단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가에도 불구하고 의사 개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진료의 박리다매와 비급여를 활용해 여전히 높은 소득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민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성이 높은 의료서비스를 극도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간의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2023년에 건강보험 지출 규모는 110조 원을 넘어섰고, 같은 해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대비 의료비 비율(9.9%)은 OECD 평균 (9.5%)을 상회했다. 가성비 의료를 지탱했던 핵심 축인 전공의의 상당수는 의대증원 갈등 국면에서 진료현장으로부터 이탈했다. 갈등의 원인과 전개 양상을 고려하면, 문제가 일단락된 이후에도 그 여파가 단기간에 그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1].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향후 의료개혁을 둘러싼 사회갈등의 가능성은 상수에 가깝다. 따라서 2024년에 이뤄진 의료계 대응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다시 직면하게 될 공산이 크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 미국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는 2002년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앎의 종류를 두 가지 기준에 근거해 구분한 바 있다. 한 가지 기준은 우리가 어떤 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느냐 (perceive) 여부다. 반면, 또 다른 기준은 앎을 우리가 이해하느냐(understand) 여부다. 예컨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앎(known knowns)이 있고, 반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우 리가 인지조차 못 하는 앎(unknown unknowns)이 존재한다. 검증된 통계적 사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검은 백조(black swan) 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건은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항으로서,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앎(known unknowns) 또한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모델링이나 시뮬레이션은 그런 앎을 이해하려는 대표적 시도다. ‘철학자’ 럼즈펠드의 이러한 정식화는 이후 큰 유명세를 얻었다. 그 결과, 정치인과 정책입안자는 물론이고, 학술 분야와 대중문화에도 소위 럼즈펠드 행렬(Rumsfeld matrix)이 널리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항이 있었다.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 못한 앎(unknown knowns)이 그것이다. 이는 간과되거나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또는 충분히 탐색하지 않거나 학제적 칸막이에 막혀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앎 이다. 그런 맹점은 한국의 의료정책 과정 및 관련 담론에서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의 자원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데서 뚜렷이 관찰된다. 이 글은 2024–2025년의 의대증원 갈등 역시 마찬가 지로 의료계가 그런 자원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이런 전문지식은 의료정책의 작동방식과 동학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이므로, 거꾸로 말한다면 그 부재에 대한 검토는 ‘왜 의료계의 정부 비판은 부정확하거나 무딘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데 반드시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한계는 한국의 의료체계 거버넌스(health system governance)에 대한 역사적ㆍ이론적 이해의 미비, 정책과정에 대한 단순한(naïve) 이해, 그리고 집합적 대응(전략)의 부재에 기인한다.
이슈 1: 거버넌스
의료계 일반의 거버넌스 인식이 노정하는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의료계는 한국의 의료체계 거버넌스의 성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이는 종종 부정확한 비판으로 표출됐다. 지난 정부의 의대증원 추진과정을 “전체주의” 또는 “독재의 잔재”로 비판한 발언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정책과정의 난맥상을 환기하는 수사적 효과는 얼마간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학술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단적인 예로,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 Institute)는 매년 전 세계 민주주의의 상태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보고서를 출간한다. 2025년 보고서에서 한국은 2023년과 2024년에 연이어 권위주의화(autocratization)가 진행된 사례로 보고됐으나, 12개 국가와 더불어 여전히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그룹에 속한 사례로 평가됐다[2]. 그에 비춰보면, 앞선 발언들은 저널리즘 이상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2024년의 의대증원 시도에 관한 보다 적확한 비판은 정책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결손(democratic defi- cit)을 지적할 때 가능하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아콘 펑(Archon Fung)은 이런 결손이 다뤄지지 않는 경우 정부 정책이 어떻게 정당성을 담보하는 데 난항을 겪는지 보여준다. Fung [3]은 정책과정의 전체 흐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제시한다.
그의 논지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개별 시민의 이해관계(1)는 정책 선호의 형성(2)을 통해 구체화하며, 이는 투표에 의해 정치인들에게 주권자의 신호(3)로서 표명된다. 선거 결과로부터 정치체 구성원들의 권한을 부여 받은 정당은 새롭게 정부를 구성(4)하고, 입법활동을 통해 정책(5)을 만든다. 정부의 행정부처들이 해당 정책을 실행(6)하면, 시민의 당초 이해관계에 조응하는 정책 결과(7)가 산출된다.
이 과정에서 펑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고 식별하는 지점은 총 네 군데다. 첫 번째 결손(D1)은 유권자의 이해관계에서 도출되는 선호가 명료하지 않거나 불안정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이 선호를 명확하게 표명할(articulate)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요구된다. 두 번째 결손(D2)이 발생하는 지점은 투표를 통 해 정치체에 다시금 권한을 부여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대의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통상적인 비판 중 하나는 선거라는 신호가 유권자들의 선호를 정확히 반영하는 데 한계를 갖는 무딘 수단이 라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권한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그 선호가 대표자에게 제대로—또는 충분히—인지되고 있는지 확인되어 야 하며, 필요할 경우 재승인되어야(reauthorize) 한다. 세 번째 (D3) 결손은 이 정치체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때 일어날 수 있다.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후견 관계를 통해 자기 이익이나 여러 특수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고, 정책의 집행을 위임받은 행정관료 또한 그와 유사한 이슈에 직면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정치적 대표자와 유권자 간 유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성(accountability)을 제고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정책과정의 마지막 결손 가능성(D4)은 행정기관의 집행을 통해 정책 결과가 산출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국가의 정책역량이 취약하면 실제 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경우 대안적 거버넌스나 문제해결 역량을 구축해 대응해야 한다. 위 분석틀을 토대로 의대증원 이슈를 검토 해보면, D2와 D3에서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정부가 증원을 발표한 시점에 다음과 같이 썼다[4]: “정부는 초기 여론조사의 결과가 증원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들었지만, 보건의료 이슈는 통상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기술적으로 복잡한 사안일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해당 주제를 숙고할 기회를 가질 때 그 의견의 대표성을 얼마간 담보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결여한 평면적 조사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정책 결정의 정당성을 보장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의 권한 행사에서 대중의 선호가 제대로 발휘되는지 확인하는 과정(D2)에 결손이 존재한다. 또한 정책 입안에서 근거가 사용되는 방식이 쟁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D3 에서도 민주주의의 결손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책은 여러 제언(근거)에 기초해 정부가 결정”한다는 당시 보건복지부 제2차관의 발언은 그 자체로는 흠잡을 데 없는 진술이다. 이후 정책과정 이슈를 다루면서 상론하겠지만, 그에 관한 의료계의 비판이 효과적이지 않았던 데는 이런 결손의 과정을 지적하지 못한 한계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이상의 논의는 정부의 의대증원 시도의 문제점을 보다 적확하게 비판할 수 있는 개념적 토대를 제 공한다.
둘째, 흔히 의료계는 한국의 국가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의료를 통제해왔다는 주장을 펼쳐왔으며, 이는 비단 일부 인문의학 연구자에 국한하지 않고 임상의사 사이에 폭넓게 공유되는 인식이다. 예컨대, 최근의 한 연구는 한국 의료체계의 성격을 “국가 주도의 통제”로 규정한다[5]. 이에 따르면, 요양기관당연지정제의 수립 당시 의료계는 피보험자의 선택권과 보험 진료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의사의 권리를 핵심 근거로 들어 지정제를 반대하고 등록제를 지지했다. 또한 1976년 당시 대한의사협회는 이미 병원과 의원 간 과도한 경쟁을 방지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의료전달체계 확립의 요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의료계의 이런 시도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 추진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분명 이들의 입론은 의료 현안으로서 지정제와 수가 문제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사안이라 는 점을 드러내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의료통제라는 거버넌스 양식이 1942년의 국민의료법과 1944년의 조선의 료령을 중핵으로 하는 일본 식민통치에서 오늘날까지 연속성(경로의존성)을 갖는다는 결론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가지 논점을 지적해두자. 첫째, 의료서비스의 가격(수가) 통제라는 현상에 줌-인되어 있는 시야를 줌-아웃해 보면, 오히려 의료 부문에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정책영역을 찾기 어렵다는 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목록은 (의대증원으로 대표되는) 의료 인력 이슈는 물론이고, 전달체계, 지불제도, 서비스의 질 관리 등을 망라한다. 일례로, 적어도 민주화 이후를 살펴보면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정 의사 수의 규모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인력 관리 정책을 입안해 온 경험이 우리에게는 없다. 의료전달체계가 사실상 부재하므로 의료기관의 종별 역할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수가에 관한 정부의 강한 ‘집착’은 역으로 그것이 다른 정책 영역에 충분히 관여하지 못하는 현행 조건을 벌충하는 거의 유일한 정책수 단이라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일각의 주장처럼 한국의 국가가 정말 강하다면, 예컨대, 그동안 정부가 민간 우위의 건강보험 시장을 왜 공공 중심으로 재편하지 않았는지, 포괄수가제[diagnosis- related group]를 비롯해 다양한 비용통제 시도를 왜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가 활용하는 선택지에 협상과 숙의가 비어 있고 정책 시행의 상당수를 하향식 행정명령에 의존하는 이유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6]. 둘째, 정치경제학의 시각에서 보면 민간 부문이 압도적 비율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조건에서 한국의 국가는 국민건강 보험제도라는 ‘시장’을 통해 의료체계를 운용해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에 관한 국가의 관여는 극히 선별적이고 적은 수준으로 이뤄졌다[7]. 따라서 이론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한국 의료체계가 직면한 상당수 현안은 정부가 능동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주도한(steering) 산물이라기보다는 내ㆍ외적 환경의 변화에 조응 해 체계를 개선하려는(update) 시도를 하지 않은, 일종의 의도적 간과(deliberate neglect)가 초래한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8,9]. 전공의 수련 비용처럼 의료인력 생산에 관한 핵심 업무를 각 의료기관에 맡겨놓은 관행이나, 응급환자의 미수용 이슈(‘응급실 뺑뺑이’)를 해결하려면 배후 진료의 인프라를 확충해야 하는데도 그에 충분한 예산을 투입하지 않은 기조 등은 전형적 사례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유방임적’(laissez-faire)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조건에서 의료계가 해야 할 주장은 정부의 압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국가가 전국민 건강보장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그간 충분히 하지 않은 책무를 온전히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국 가 주도의 통제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주장은 논리상 일관적이지 않다.
요컨대, 의료체계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의대증원 이슈는 전체주의나 독재가 아니라 정책과정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의 결손이 표출된 결과이며, 거버넌스의 이러한 자유방임적 성격은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근원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집단 전체의 신뢰를 훼손한다.
이슈 2: 정책과정
정부의 의료개혁에 관한 의사들의 비판이 정확하지 못한 두 번째 원인은 정책과정(policy process)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 의료계 일반이 정책과정을 이해하는 방식은 근거기 반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에 기초한 일종의 ‘파이프라인’(pipeline) 모델이다. 예컨대,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원재료가 기계에 투입돼 사출 성형을 거치면 상품으로 생산된다. 이러한 이해에서 과학자(연구자)의 역할은 과학적 근거를 생산하는 것이며, 그들이 좋은 근거를 정책입안자에게 제공하면 이는 좋은 정책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더 많은 연구를 수행 할수록 연구의 질은 더 좋아지며, 그 정책적 효과도 더 커진다. 하지만 EBM의 이와 같은 무비판적 적용은 투입에서 산출에 이르는 과정은 정작 블랙박스(black box)로 남겨두며, 이는 실제 정책과정에 대한 이해를 크게 저해한다. 근거가 정책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비롯한 정책 동학(policy dynamics) 자체가 연구대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정책과정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없이 더 나은 정책 결과는 가능하지 않다.
정책과정 이해의 미비는 의대증원을 둘러싼 이번 갈등에서도 그대로 표출됐다. 의료계는 정부가 제시한 2,000명 증원의 근거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환기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증원의 적정 규모를 추계하는 작업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진행하는 과정은 더 나은 의료정책 입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한 절차다. 그러나 작년 이래 의료계가 의대증원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돌이켜보면, 모델링과 관련 이슈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추계의 “자의적 왜곡”은 이들의 비판을 요약한 캐치프레이즈다. 의료계에 따르면, 의대증원의 근거로 정부가 활용한 3편의 보고서 자체 가 “가정과 시나리오에 따라 의사 수 추계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추계 연구에 적용하는 가정과 시나리오에 따라 같은 연구모형 내에서도 추계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어, 극단적으로 1만 명 또는 2만 명 등 특정 결과가 나타나는 모형만 취사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비판했다[11]. ‘과학적 분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ㆍ서울대 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대안적인 추계 연구를 공모했다. 그 결과, 2025년 3월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의정연) 세 팀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그러나 이전의 보고서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연구는 각기 다른 전망을 내놓았다. 각 연구가 의사 근무일수, 1인당 의료이용량, 의사 1인당 생산성, 고령 의사의 활동 정도 같은 변수 값을 상이하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팀은 2035년을 기준으로 의사 1,375명이 초과 공급되다가 2050년에 16,241명의 의사가 부족해지는 것으로 추산한 반면, 의정연팀은 2035년에 의사 3,161명이 과잉 공급될 것이라고 보았다. 두 팀과 달리 서울대 보건대학원팀은 증원 없이는 2030년에 9,063명, 2040년에 21,345명, 2050년에 28,664명의 의사가 부족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결과는 더 나은 의료개혁의 열쇠는 ‘숫자’ 가 아니라 오히려 변수의 선택 자체와 설정방법에 관한 논의,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지향하는 의료체계의상을 토론해야 할 긴급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런 관심을 집약한 표현이 “사회적 합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의료계 내에서 대부분 반복적으로 선언되는 데 그쳤을 뿐, 정작 합의를 어떻게 형성하고 도출할 것인가에 관한 학술적ㆍ실무적 논의는 대단 히 미흡했다. 거버넌스 이슈와 마찬가지로, 적확한 비판에 긴요한 자원을 쓰지 못한 의료계의 맹점이다.
그러나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의 모델러 에리카 톰슨(Erica Thompson)이 지적하듯이, 이는 모델링과 그 사용에 관한 의료계의 기존 이해에 적극적 성찰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녀에 따르면, 예측은 사실(진리)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카메라”(camera)가 아니라 사실(진리) 자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엔진”(engine)이다[12]. 그렇다면, 모델은 그 결과에 따를 때 발생하는 어떤 손실이나 피해가 수용 가능한지, 서로 다른 지역에 해당 위험이 어떻게 분포하는지, 그리고 그에 관해 무엇을 할 때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관한 가치판단(value judgments)을 궁극적으로 요청한다[13,14]. 고전적 정의를 빌 린다면, 이처럼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who gets what, when, how)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일을 우리는 ‘정치’라 부른다[15]. 모델은 미래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담긴 서사가 작동하는 프레임워크(framework)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모델링 작업은 상이한 종류의 행위가 갖는 잠재력에 관한 이해당사자 간의 대화를 촉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도 설득력을 갖는다[12]. 모델의 활용에 관한 이런 이해가 이해당사자 사이에 착근돼 있지 않으면 정책 논의에서 모델링은 모델러의 판단과 유리되어 그 자체로 “일종의 준-자율적 주체”(a kind of semi-autonomous agency of their own)로 인식되고, 이는 또 다른 물신주의(fetishism)의 오류로 빠지기 쉽다[16]. 요컨대. 의료계의 모델링 이해에는 그것이 진리를 담지하고 확정하는 도구라는 암묵적 가정에 기대고 있으며, 이는 정책과정의 문제를 파악하는 걸림돌이다. 역으로 말하면, 효과적 비판을 위해서는 의료정책 입안과 시행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가치판단을 어떻게 정당성과 책임성을 담보한 방식으로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한 정책과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런던정 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 ence)의 보건정책학자 저스틴 파크허스트(Justin Parkhurst)는 이른바 ‘근거의 정치’(the politics of evidence) 분석틀을 통해 효과적이고 민주적인 정책과정이 이뤄지려면 좋은 근거뿐 아니 라 이 근거의 좋은 사용(good use)과 그런 관행의 제도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자가 과학적 충실성과 해당 문제에 관한 적합성의 충족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정당성(legiti- macy)이라는 개념과 직결된다. 즉 근거를 잘 쓰는 방법은 이 근거가 창출되고 선택되며 해석되는 과정이 정당한지에 달려있다 [17]. 의대증원 갈등 동안 의료계에서 절차적 정당성의 부족을 지 적하는 목소리는 일부 나왔지만, 정당성 이슈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당성은 (전문 가의 주장과 불편부당한 과학적 권위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들을 둘러싼 경합적 가치, 신념, 세계관, 사실을 관리하는 제도의 역량에 기초한다[18].
파크허스트는 이 논점을 투입, 과정, 산출의 차원으로 나누어 검토한다. 산출 정당성은 좋은 근거와 관련되는 반면, 투입 정당성과 과정 정당성은 이런 근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특히 과정 정당성은 숙의(deliberation)의 질과 직결 된다[19]. 일차적인 숙의의 당사자는 물론 전문가들 자신이다. 이들이 의제 설정이나 정책 입안을 둘러싼 의사결정의 전 과정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논의하고 의견을 조율해 합의에 이르는 절차가 보장되지 않거나 누락된 경우, 그 결과를 정당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회의실 바깥에 있는, 따라서 해당 숙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대중이 이 논의를 확인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지 않은 경우에도 정책의 정당성은 확보되기 힘들다. 대중이 전문가의 인식론적 권위를 정당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추계의 자의성보다는 의료정책의 정당성 미비에 초점을 두었다면 의료계의 정부 비판은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렇 다면, 적어도 추계 연구와 같은 무게로 정책과정, 의사결정, 거버넌스, 조직에 관한 의료체계(health systems and policy) 연구를 촉구했어야 했다. 구체적으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같은 중앙정부의 주요 의결기구, 그리고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정부 보건의료 관련 위원회의 거버넌스 개편에 관한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의 역할이 2027년 정원 규모의 결정이 아니라 모델링의 핵심 전제들에 관한 가치판단과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명확히 요구했어야 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의료계 내에 폭넓게 공유되지 않는다면, 국민 참여 의료혁신위원회의 경우에도 동일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슈 3: 집합행동
의대증원 갈등 국면에서 의료계 대응의 마지막 문제점을 집약하는 키워드는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이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관찰됐다. 첫째, 의료계 내부의 의견이 일관된 형태로 표출되지 못했다. 유일한 법정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물론이고, 대한 의학회(학계), 한국의과대학ㆍ의학전문대학원협회(대학), 전국의 과대학교수협의회(교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등 주요 대학의 비상대책위원회 중 어느 곳도 의료계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사실이 그 방증이다. 둘째, 의료계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폭넓은 정책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두 가지 모두 체계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지만, 정부 정책에 대한 대응을 검토하는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보는 문제는 후자다.
그간 의료정책에 관한 의료계의 통상적인 정부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시각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책 대안이나 담론 제시는 의사가 아니라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정부가 할 일이라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정책입안자들이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의료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이미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하고 주장해 왔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의사가 원하는 대로 정책을 만드는 정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료정책은 의료계가 국가-의사 관계에 관여하는 수준을 비롯해 해당 체계를 형성하는 역학적 관계망의 함수일 따름이다[20].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처럼 혼자 하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상 정치는 복수가 관여하는 집합적 활동이다. 하지만 의대증원 갈등을 경유하면서 의료계가 이런 이해를 체득했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산적한 과제 가운데, 필수적인 고려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의사 개인과 개별 의사회 및 의학회 차원을 넘어, 의료계 전체(organized medicine)를 대표하는 조직의 역할과 책무성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2) 집단 내, 그리고 집단 간 협력과 조정 메커니즘을 어떻게 마련하고 유지할 것인가?
(3) 정부 정책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의 정책연구 역량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가?
(4) 의사 집단의 집합적 주장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피력하 고 설득할 것인가?
여기서는 글의 목적을 고려해, 위의 질문 모두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대신 두 가지 차원의 정책제언에 초점을 둔다. 한국과의 뚜렷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료계의 경험은 이러한 집합적 대응전략에 관해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 첫째, 의사 집단 자체의 정책역량을 제고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보통 의료계는 의사의 의과학 연구역량 강화를 위해 의사-과학 자(physician-scientist)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복잡한 의료정책 이슈에 관한 의료계의 집합적 대응 역량을 제고하려면, 의료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의사-사회과학자(physician-social scientist)의 양성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의료관리학이나 보건행정학 같은 기존 학제를 확장하는 보다 폭넓은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며,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의사결정, 집합행동, 조직 등의 이슈를 다 룬다는 점에서 보건정치학의 자원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지역 의료 이슈는 이에 관한 시의적절한 사례다. 의사가 지방에 가지 않는 이유를 강변하고 의사가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정부가 마련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는 전략 대신, 지역의료 거버넌스 구축에 관한 생산적 담론을 창출하는 데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일례로, ‘진료권’ 아이디어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활성화하고 민간 연구자의 관련 작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 공공-민간 의료 기관 네트워크를 비롯해 거버넌스 운용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 부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언하는 일, 광역지자체 단위 의 의사회가 주도해 지역의료에 관한 대안적 사업모델을 제시하 고 실제 운영 경험을 축적하는 일 등은 가장 확실한 ‘정책 개입’이 될 수 있다.
의사-정책가(physician-policymaker)의 체계적 육성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단지 의사 출신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는 데 국한하지 않으며, 학제적 전문성을 발휘해 의료정책 입안에 관여 할 수 있는 인력자원의 육성을 통칭한다. 미국의 백악관 펠로우 십(White House Fellowship) 제도는 이런 시도에 참고할 만한 사례다[21,22]. 물론 이는 공공과 민간, 군에서 대학, 민간기업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의 리더를 선발하므로 의료정책에 국한된 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연방정부 각 부처에 배치되어 자신의 전문성에 기초해 자문에 응함으로써 실제 정책과정에 관여한다. 따라서 전일제로 일하며 보수를 받는 직위다. 또한 펠로우 는 일련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다양한 인사들과 토론 할 기회를 갖는다. 이런 선례를 고려한다면, 대한의사협회와 같은 공식기관이 대통령실과 협약을 체결해 젊고 유능한 임상의사와 의료정책 연구자들을 매년 ‘대통령실 의료정책 펠로우’로 선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펠로우십 제도는 향후 의료 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폭넓은 인적 교류와 네트워킹을 추구할 장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축적된 인적 풀은 향후 더 많은 갈등이 수반될 것으로 예상되는 의료 현안을 다룰 때 정부와 의료계 모두가 활용할 수 있는 조정 자산으로서 분명한 잠재력을 가진다. 의사-정책가, 의사-사회과학자, 그리고 의료체계의 핵심 이슈를 정확히 이해하는 정책연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수록, 전체 의료계의 정책역량은 성숙해질 것이다.
둘째, 정책연합을 구축하려는 노력에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전환이 필요하다. 더 나은 정책대응이 가능하려면 의료계가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 어떻게 협력하고 연대할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어떤 이슈든 대중의 주목은 무한하지 않으며, 정책과정에서는 우선순위의 결정(prioritization) 자체가 경쟁적이다. 따라서 의제 설정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사회적 후생의 증대가 특수 이익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간 집중해 온 좁은 의미의 ‘직역 수호’ 논리에서 탈피해, 사회균열(social cleavages)을 가로지르는 정책연합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시도에 훨씬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 tion, AMA)는 조직 차원에서 건강형평성(health equity) 이슈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대변하고 있다. 2021년에 최초로 발표된 ‘건강형평성 전략계획’(health equity strategic plan)의 기원은 2018년의 대의원 연례회의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이듬해 협회 내 건강형평성센터의 설치로 이어졌다. 엘리타 메이뱅크(Ale- tha Maybank) 박사는 AMA의 수석부회장이자 초대 건강형평성 최고책임자(chief health equity officer)로서 지침 개발을 비롯해 5년간 협회의 관련 정책을 주도했다[23]. 이런 노력은 2023년 2월 이래 2025년 11월 현재까지 AMA가 총 일곱 차례 개최한 ‘전국 건강형평성 그랜드라운드’(National Health Equity Grand Rounds)로 이어졌다[24].
민간비영리단체 Vot-ER의 활동도 한국의 의료계가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선례다. 매사추세츠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의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앨리스터 마틴(Alister Mar- tin)—그는 2021–2022년의 백악관 펠로우로 선정돼 당시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의 건강형평성 자문으로 일했다—이 2020년에 창립한 이 단체는 레지던트 시절 그의 응급실 당직 경험에서 비롯됐다. 평일 새벽 응급실을 찾은 가난한 세 모 녀가 의료를 비롯한 복지서비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의 합법적 거주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주에서 매사추세츠주로 넘어온 그들에게 이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시행착오를 거쳐 선거권이 거주에 관한 증빙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유사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유권자로 등록하는 작업에 나섰다.2) 그의 시도는 널리 확산되었고, Vot-ER은 현재 미 전역에 걸쳐 900개 이상의 의료기관과 5만 명에 이르는 의료인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다[25].
이상의 경험들이 시사하는 바는 간명하다. 건강불평등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중대한 의료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의제로 삼고 이를 풀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일 때, 의료계가 바라는 변화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도서산간 벽지로의 의료봉사나 팬데믹과 같은 공중보건 위기 시의 의료 지원은 그 자체로 중요하고, 이미 의료계가 해온 일이다. 그러나 조직 차원에서 건강형평성이나 의료접근성의 제고를 의료정책의 명시적 의제로 설정하고 관련 활동을 수행한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다시금 강조한다면, 일 반 이익의 증대가 곧 특수 이익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 대중의 폭넓은 지지 획득은 정부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 임상적 탁월성 에 관한 평판 유지와 더불어 의료계가 향후 의료개혁에 성공적으 로 관여하는 데 필수적 요소이며,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26].
결론: ‘더 나은’ 개혁을 위하여
주지하듯이 의대증원 이슈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소위 지역ㆍ필수ㆍ공공 의료개혁은 ‘필수의료혁신 전략’과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에서 개진된 전달체계와 지불제도 개편의 요지를 대부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혁 시도는 인구학적 변동, 의료비 상승, 감염병 팬데믹의 도래 가능성과 같은 구조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면서 의료정치의 동학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그럴수록 의료체계 내의 행위자들이 체계적으로 논의를 다루고 숙의할 수 있는 공간의 창출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이런 돌파구는 “왜 의료계의 정부 비판은 부정확하거나 무딘가?”라는 글머리에서 제기한 질문에 충실히 답변하지 않는 한 확보하기 어렵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 과제의 해소는 의료계가 그간 맹점으로 남아있던 자원들(unknown knowns)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거버넌스 이해의 미비, 정책과정의 단순한 이 해, 집합적 대응의 부재라는 세 가지 문제점을 타개할 때 가능하다. 건정심이든 보정심이든 수급추계위든 의료혁신위든, 각 이슈에 대한 더 정교한 논의만큼이나 그 제도를 생산적으로 작동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27]. 일찍이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립만(Walter Lippmann)이 간명히 지적한 것처럼, 정치의 목표는 “모든 사람 의 생각을 같게 만드는 게 아니라,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 함께 행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그것이다[28].
이해상충
이 연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나 이해당사자로부터 재정적, 인적 지원을 포함한 일체의 지원을 받은 바 없으며,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이해상충이 없음을 선언한다.
ORCID
Ungki Jung: https://orcid.org/0000-0003-1621-1702
References
- Jung U. Health care reform and democratic expertise in South Korea. Korean J Med Ethics 2025;28(4):257-277. DOI: https://doi.org/10.35301/ksme.2025.28.4.257
- Nord M, Altman D, Angiolillo F, Fernandes T, God AG, Lindberg SI. Democracy report 2025: 25 years of autocratization–democracy trumped? Gothenburg: The V-Dem Institute at the University of Gothenburg; 2025.
- Fung A. Democratizing the policy process. In: Moran M, Rein M, Goodin RE, editors. The Oxford Handbook of Public Polic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pp. 669-685.
- Kim SJ, Jung U. How has the government decided the medical school quota expansion?: a critique from the politics of evidence perspective. Hankyoreh [Internet]. 2024 Feb 28 [cited 2025 Nov 18]. Available from: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30238.html
- Kwon I, Kim CJ, Yoon JH. Historical analysis of the origins of state-led medical care. Seoul: Korean Medical Association, Research Institute for Healthcare Policy; 2022.
- Jung U. Where's the beef?: the politics of health care reform in South Korea. J Korean Med Assoc 2024;67(5):366-370. DOI: https://doi.org/10.5124/jkma.2024.67.5.366
- Jung U. Understanding the dynamics of the health system governance in South Korea. Proceedings of the Special Symposium at the 75th Fall Conference of the Korean Society for Preventive Medicine; 2023 Nov 22-24; Incheon, Korea. Seoul: Korean Society for Preventive Medicine; 2023.
- Streeck W, Thelen K. Beyond continuity: institutional change in advanced political econom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Chapter 1, Introduction: institutional change in advanced political economies; pp. 1-39.
- Hacker JS, Pierson P, Thelen K. Drift and conversion: hidden faces of institutional change. In: Mahoney J, Thelen K, editors. Advances in comparative-historical analysi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pp. 180-208. DOI: https://doi.org/10.1017/CBO9781316273104.008
- Cairney P, Oliver K. Evidence-based policymaking is not like evidence-based medicine, so how far should you go to bridge the divide between evidence and policy? Health Res Policy Syst 2017;15(1):35. DOI: https://doi.org/10.1186/s12961-017-0192-x
- The Emergency Committee of SNUCM-SNUH Faculty Council. The Emergency Committee's Commentary: three reports on the medical workforce (physicians) modeling. Seoul: The Emergency Committee of SNUCM-SNUH Faculty Council; 2025.
- Thompson E. Escape from Model Land: how mathematical models can lead us astray and what we can do about it. New York (NY): Basic Books; 2022. Chapter 5, Fiction, prediction, and conviction; pp. 74-92.
- Thompson E. Escape from Model Land: how mathematical models can lead us astray and what we can do about it. New York (NY): Basic Books; 2022. Chapter 1, Locating model land; pp. 1-12.
- Hu L. How to lie with (political) statistics. Boston Review [Internet]. 2025 [cited 2025 Oct 7]. Available from: https://www.bostonreview.net/articles/how-to-lie-with-political-statistics/
- Lasswell HD. Politics: who gets what, when, how. New York (NY): Peter Smith; 1950.
- Thompson E. Escape from Model Land: how mathematical models can lead us astray and what we can do about it. New York (NY): Basic Books; 2022. Chapter 6, The accountability gap; pp. 93-113.
- Parkhurst J. The politics of evidence: from evidence-based policy to the good governance of evidence. London: Routledge; 2017.
- Rayner S, Sarewitz D. Policy making in the post-truth world: on the limits of science and the rise of inappropriate expertise. Breakthr J [Internet] 2021 [cited 2025 Oct 7];13:15-43. Available from: https://thebreakthrough.org/journal/no-13-winter-2021/policy-making-inthe-post-truth-world
- Parkhurst J. The politics of evidence: from evidence-based policy to the good governance of evidence. London: Routledge; 2017. Chapter 6, What is the 'good use of evidence' for policy?; pp. 128-146.
- Moe TM. The politics of bureaucratic structure. In: Chubb JE, Peterson PE, editors. Can the government govern? Washington (DC): The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89. pp. 267-329.
- White House Fellows Foundation and Association. What is the White House Fellowship? [Internet]. Washington (DC): White House Fellows Foundation and Association; 2024 [cited 2025 Oct 7]. Available from: https://whff.org/the-program/
- Garcia CP. Leadership lessons of the White House Fellows: learn how to inspire others, achieve greatness and find success in any organization. New York (NY): McGraw Hill; 2008.
-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The AMA's 2024—2025 strategic plan to advance health equity [Internet]. Chicago (IL):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024 [cited 2025 Nov 20]. Available from: https://www.ama-assn.org/about/leadership/ama-s-2024-2025-strategic-plan-advance-health-equity
-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National Health Equity Grand Rounds [Internet]. Chicago (IL):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c2025 [cited 2025 Nov 20]. Available from: https://www.ama-assn.org/series/national-health-equity-grand-rounds
- The SNF Agora Institute at Johns Hopkins University. SNF Agora Symposium on Civic Health [Internet]. Baltimore (MD): The SNF Agora Institute at Johns Hopkins University; 2022 [cited 2025 Nov 20]. Available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DQk_RNbsYTE
- Patashnik EM, Gerber AS, Dowling CM. Unhealthy politics: the battle over evidence-based medicin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
- Goddard SE, Krebs RR, Kreuder-Sonnen C, Rittberger B. Liberalism doomed the liberal international order: a less legalistic system would help protect democracies [Internet]. New York (NY): Foreign Affairs; 2025 [cited 2025 Jul 31]. Available from: https://www.foreignaffairs.com/united-states/liberalism-doomed-liberal-international-order
- Lippmann W. Public opinion. New York (NY): Harcourt, Brace & Co.;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