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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ndinavian Designs Based on the Anthropocene Discources

인류세 담론으로 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 박지민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 ;
  • 문정윤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사) ;
  • 이주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Received : 2020.03.10
  • Accepted : 2020.04.20
  • Published : 2020.04.28

Abstract

This study links the concept and implications of the anthropocene to the humanistic functionalism of Scandinavian design.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the direction of modern design has been centered on the standardization of mechanical products and functionalism aimed at standardization. This is based on the human-centered dual idea of human and nature. But Scandinavian countries have developed humanistic functionalist designs, with exceptions emphasizing human organic relationships to nature instead of dual thinking. This is believed to be in line with the anthropocene discourse, which envisions the emergence of a new level of humanity and the regeneration of the natural environment under the banner of equality for all species on Earth. In this paper, the discussion was embodied in a way that combines the wide range of anthropocene discourses with the major issues of posthuman and postnature, which are the latest human and natural views. And we have selected and analyzed examples of modern Scandinavian designs focused on the circulatory potential of materials, and have sought the direction of trends suitable for the anthropocene era.

본 연구는 인류세의 개념과 시사점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인문기능주의와 연결한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현대 디자인의 방향은 기계제품의 규격성과 표준화를 목표로 하는 기능주의가 주축을 이루었다. 이는 사용자로서의 인간과 자원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이원적 사고에 근거한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은 예외적으로 이원적 사고 대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며 인문기능주의 디자인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지구의 모든 종은 평등하다는 기치 아래 새로운 차원의 인류 출현과 자연환경의 재생성을 예기하는 인류세 담론에 부합하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는 인류세 담론을 최근의 인간관과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휴먼 및 포스트네이처의 주요 쟁점들과 접목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체화했다. 그리고 현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중 재료의 순환 가능성에 집중한 사례를 선별하여 분석하면서 인류세 시대에 적합한 트렌드의 방향을 모색했다.

Keywords

I. 서론

2019년 9월에 개막했던 제16회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7번째 대륙(The Seventh Continent)’이라는 주제를 선보였다. 프랑스 출신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 (Nicolas Bourriaud)가 총감독을 맡은 이 비엔날레는 인류학에 기반을 두고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예술적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인류의 힘이 지구 생태계를 변화시킬 만큼 강력해짐을 피력하는 인류세(Anthropocene)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anthropos에서 온 ‘anthropo’는 인간을 가리키며 ‘cene’은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kainos에서 유래했다[1].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Stoermer)가 제안하고 대기과학자 폴크루첸(Paul Crutzen)이 퍼트린 인류세 논의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온실가스의 증가, 생물 및 지질학권의 변화 등은 요즘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 대표 적인 환경위기 담론들이다. 오늘날 공론화된 환경문제 들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운 상태로, 다양한 국가적 갈등요소[3]까지 내포하고 있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환경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는 미래의 지구환경은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시사하는 인류세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류세는 인간 활동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여와 개입이 필연적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인 인류세는 앞으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본 연구는 인류세의 개념과 시사점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인문기능주의와 연결하고자 한다. 산업혁명 이래 현대 디자인의 방향은 기계제품의 규격성과 표준화를 목표로 하는 기능주의가 주축을 이루었다. 이는 사용자로서의 인간과 자원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이원적 사고에 근거한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은 예외적으로 이원적 사고 대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며 인문기능주의 디자인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지구의 모든 종은 평등하다는 기치 아래 새로운 차원의 인류 출현과 자연환경의 재생성을 예기하는 인류세 담론에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국내에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며, 2012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과 관련한 전시들이 다수 열렸다.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북유럽 제품의 대부분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중시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철학을 반영한다. 스칸디나비아 제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유해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한다는 의미로 자리 잡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인류세 시대를 살아갈 인간으로서 환경문제를 자각하고 실천을 행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인류세 담론들은 어느 분야에서 의미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우 광범위한 정의로 사용되지만, 디자인 영역에서 짚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인류세 논의는 인간의 능력이 자연을 능가하는 힘이 되었음을 기본전제로 삼고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다양한 서사들을 만들어낸다. 재료 그 자체를 중시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개인의 욕구를 채우면서도 환경과의 균형을 중시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사고를 반영한다. 자연에 대해 사회적 책임과 의식을 갖춘 북유럽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가공을 최소화하고 재료 그 자체의 질감과 색상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에 이미 인류세 시대에 적합한 소비문화를 주도해왔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는 인류세 담론을 최근의 인간관과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휴먼(Post-human) 및 포스트네이처(Post-nature)의 주요 쟁점들과 접목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체화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중 인간의 장인정신과 재료의 순환 가능성에 집중한 제품을 인문기능주의의 모범사례로 선별하여 분석하면서 인류세 시대에 적합한 트렌드의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인류세 담론의 주요 쟁점

1. 인류세의 개념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원인이 되는 시대를 뜻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성장해왔지만, 환경적인 측면에 큰 피해를 주었다. 기후변화가 점차 심해지자 1988년 정부 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설립되었는데, 이 기관은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 환경계획(UNEP)이 함께 만든 국제기구로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주목적으로 한다. 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발간하는 IPCC 평가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 간 협상의 근거자료로 활용되는데 현재까지는 5차례 발행되었으며 6차 보고서(2015년∼2022년)는 현재 진행 중이다[4].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가 발행하는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인간이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며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제5차 보고서는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이 인간이라는 것에 95%의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인간 활동이 많아질수록 위험성은 높아지며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가져올 변화가 상당히 큼을 역설하고 있다.

인류세는 과학, 철학, 사회과학, 문학 등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지질학적 측면에서는 인류세와 홀로세를 구분하는데, 인류세가 등장하기 전 지질시대인 홀로세(Holocene)는 인류의 역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때를 지칭한다. 반면 인류세는 인위적 작용이 지질층에 미치는 영향이 강해지기 시작한 시기를 시작으로 본다.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하는 시작점은 학자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신대륙 발견, 1945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등)을 보이지만 크게 보면 산업혁명을 주된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보는 학자들은 인간이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고 그 속에서 공존하다가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생존과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본다[5]. 이현걸도 인간을 ‘기후를 만드는 존재’로 보고 인류세의 시작지점을 산업혁명 이후로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기후 변화에 영향을 준 시점인 온실가스를 대기 중에 본격적으로 배출한 때가 산업혁명 이후임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기후를 바꾸고 생태계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역설했다. 인류세 담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세계화 현상도 결국 산업혁명이 낳은 산물 이기 때문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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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온실가스 배출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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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산화탄소 배출량 대비 온난화정도[7]

위의 두 가지 표는 온실가스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증가에 따른 온난화 정도를 예측한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살펴보면 2000년∼2010년에 대폭 증가하였고 그 이후에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화석연료와 산업공장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전 세계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온실가스의 증가는 지구 평균 표면 온도를 높였고 북극 빙하가 계속 녹으면서 평균 해수면 상승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림 2]를 보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을수록 온난화 정도는 올라감을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표면 온도가 갈수록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수의 지역에서는 폭염과 폭설 발생 빈도가 늘어날 것이며, 강수 현상과 그 강도 또한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표를 통해 지구 온난화와 산성화는 지속할 것이며, 지구의 평균 해수면은 계속 상승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이 있으며, 인류의 힘이 지구 시스템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 원인임을 인정하는것이 인류세 담론에서는 중요하다. 인류세는 인간중심 주의(Anthropocentrism) 또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안하는데,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간주하였던 근현대와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8]. 인류세 시대의 인본주의는 인간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강한 책임감을 권유한다. 사유체계의 근원으로서 인간의 존재만을 최고로 여기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강한 힘을 가진 존재로서 바람직한 환경을 유지하고 생성하기 위한 책임감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류세 시대의 인본주의인 것이다.

새로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는 대표적으로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인류세 시대에 들어맞는 인식론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신인간중심주의(New-Anthropocentrism)를 주장했다. 해밀턴은 지질 및 환경이 변한 이유가 인류에 있음을 지적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간은 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이를 보살펴야 함을 강조한다[9]. 캐서린 라레르(Catherine Larrère) 역시 기술적 발전은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고 이것이 기후 변화에 대한 주된 원인임을 주장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는 필요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이 필요함을 내세웠다. 라레르의 쟁점은 인류도 생물 공동체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현재 인간의 발전과 진화는 다른 종과 상호작용했기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10].

인류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철학자와 인류학자의 공통된 주장은 자연과 문화를 둘로 나눠서 보는 세계관의 탈피이다. 즉 자연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인식에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세계관을 만들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자연의 현상이 인류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인류세 시대의 흐름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인류세 담론의 목적은 인간 스스로가 현 지구의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작은 것에서부터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실천을 행함에 있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가구와 소품의 소비는 인간의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다. 따라서 이와 같은 대중의 행동은 인류세 시대에 인간이 환경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실천하는 하나의 대처 방안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2. 인류세의 포스트휴먼적 쟁점

인류세 담론과 더불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포스트휴먼에 대한 제반적인 논의다. 포스트휴먼론은 현대의 과학적 진보와 지구적 경계, 환경문제에 있어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재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술적 비인간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담론 중 하나다. 포스트휴먼은 아랍계 미국인 이합 핫산(Ihab Hassan)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는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인간과 인간의 형상과 인간의 개념을 변화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핫산은 20세기 중반에 휴머니즘과 인간중심주의 시각에 갇혀 있던 근대성을 반성하고 해체하려는 맥락에서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1]. 포스트휴먼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포스트휴먼에서 포스트(Post)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하는 ‘반(反)휴머니즘’적 의미와 ‘∼이후 에’를 뜻하는 인간 이후 세대를 뜻한다. 포스트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이후’나 ‘반’ 혹은 ‘탈’로 해석할 수 있어 용어 자체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포스트휴먼은 인간에 대한 해체와 계승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담론이라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에 담겨있는 반휴머니즘적 성격은 로지 브라이도티(Rosie Braidotti)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녀는 휴머니즘 시대에 내재되어 있던 문제를 포스트휴먼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1960∼70년대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은 모두 반휴머니 즘적 흐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덧붙여 그녀는 성차화된 타자(여성), 인종화된 타자(토착인), 자연화된 타자(동물, 환경)로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유를 거부하고 위계질서에서 맨 꼭대기에 있는 인간 즉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포스트휴먼의 성격으로 간주한다[12].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의 오만함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회적 지지를 받는 지배적 가치 체제들에 대해 지적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공존을 주장한다. 즉 ‘인간’을 특권화하는 위계적 관계에서 벗어나 탈-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인간의 위치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12].

인간은 발전을 위해 자원을 무분별하게 활용했으며 동식물에 대해서도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무차별적으로 사용했다.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해 소리 없는 희생을 해왔다. 따라서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의 핵심개념으로 관계들의 횡단성(Transversality of relations)을 제안하는데, 이는 인간과 인간 외의 존재 들에 대한 복잡성, 동물과의 새로운 근접성, 지구행성적 차원과 기술적 매개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하는 평등주의를 뜻한다. 모든 종을 가로 지르는 횡단적 연대는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공동체를 재조직하며 휴머니티 개념 자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데 브라이도티는 이를 조에중심평등주의 (Zoe-centered egalitarianism)로 지칭하고 있다 [12].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의 중요한 쟁점으로서 모든 생명체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평등하고 횡단적인 관계를 꼽는다. 특히 포스트휴먼의 관계들은 ‘종의 우월성’에서 벗어나 상호 협력적 관계로서 공생해야 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그녀가 휴머니즘에 대한 절대적 반대항으로 포스트휴먼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휴먼을 절대적 반휴머니즘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를 부정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장은 인간 외의 모든 존재자는 동등하다는 것으로만 봐야 할 것이다.

브라이도티가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넘어 모든 종과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듯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 역시 유사한 경향을 띤다. 포스트휴먼에 대해 ‘인간 이후의 세대’로 이해하는 헤일스는 그녀의 저서인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서 포스트휴 먼을 지능과 신체를 가진 인간의 기본조건에 대해 물리적으로 확장하는 모든 것이라 정의한다. 그녀에게 포스트휴먼이란 인간의 종말 이후 등장하는 신인류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 개념의 종말이며, 이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관을 탈피하는 시도라고 지적할 수 있다. 헤일스의 주장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틀을 타파한다는 점에서도 브라이도티와 계보를 같이 한다. 하지만 헤일스는 기계, 인공지능, 사이보그 등까지 포괄하고 있어 조금 더 넓은 범주로서의 포스트휴먼을 다루고 있다.

브라이도티와 헤일스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포스트휴먼은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모든 종과의 공존을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인간 외의 모든 존재와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려는 인류세 담론과 직결되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인류세의 포스트네이처적 쟁점

자연에 대한 잦은 언급과 함께 등장한 최근 몇 년간의 포스트네이처 논의들은 ‘환경위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인류세 시대에 필수적인 방책이 될 수도 있다.

자연(自然, Nature)이 인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그대로의 현상으로 인간을 제외한 자연물 모두를 뜻하는 것에 반해, 포스트네이처란 인위적이고 변형된 자연을 일컫는다[13]. 리처드 펠(Richard Pell)에 따르면 포스트네이처라는 용어는 인간에 의해 길들고 달라진 것을 뜻하는데 유전자 변형된 동식물을 포함하여 인공적인 존재들 모두에 해당한다. 즉 문화가 자연에 개입하는 순간 모두가 포스트네이처라고 볼 수 있다[14]. 존재 그자체로서의 생명과 달리 포스트네이처의 존재들은 만들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욕망, 권력, 공포를 보여주는 체현물(Embodiments)이다[15].

포스트휴먼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이념을 재고하고 기계를 포함한 모든 종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포스트네이처는 단순히 자연과 기술이 합쳐진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 자본, 정치 등이 얽혀 있는 복잡한 개념이다. 포스트네이처에 대해 전혜숙은 대표적인 예시로서 ‘정원도시(Garden City)’의 대표적인 나라인 싱가포르를 든다[16]. 싱가포르는 관광명소를 만들어 국민 일인당의 탄소량을 줄이기 위해 가든스 바이 더 베이(The Garden by the Bay)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첨단기술로 구현된 이 정원에는 최대 50m에 달하는 커다란 나무 모형이 있다. 이는 실제 나무처럼 열을 흡수하거나 빗물을 저장하고, 태양 에너지를 비축 한다[17]. 웅장한 크기의 이 나무는 밤에는 라이트 쇼를 선보이며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이 프로젝트는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고, 다양한 동식물들의 생태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으며, 관광도시로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하지만 환경보호 전문가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부정 적인 견해를 보이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 침범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든스 바이 더 베이 프로젝트에 대한 피드백 보고서를 언급하면서 이 프로젝트가 실행되기 전에는 다양한 야생 동물들을 볼 수 있었지만, 정원이 건설된 후에 동물들이 감소한 것을 지적했다[18]. 이 프로젝트가 다양한 동식물들의 생태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밤에는 불을 밝히는 등의 행위로 다양한 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없앤 것이다. 이 정원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인공자연과 관련된 주제들로 작업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아이슬란드계 북유럽인인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을 들 수 있다. 엘리아슨의 성장 배경 중 북유럽의 광활한 자연은 그의 작품에 기초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그는 빛, 물, 이끼, 안개, 습도, 그림자, 바람 등의 자연요소와 과학적 기술을 결합하여 이를 실내 혹은 실외의 공간에 구현함으로써 인공자연의 모습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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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2013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계기는 2003년 테이 트모던(Tate Modern) 미술관에 설치했던 <날씨 프로 젝트(Weather Project)>[그림 3]이다. 커다란 규모의 미술관 공간을 꽉 채운 이 작품은 노란색 빛을 강하게 빛내며 설치되었는데 이는 태양을 표현한 것이다. 지름 15m가 넘는 반원형의 프레임 안에는 수백 개가 넘는 램프가 들어가 있었고 천장과 벽에는 거울이 설치되어 있어 반원형이 원형으로 보이게 제작되었다. 극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해 이 공간에는 빛과 동시에 수증기가 함께 채워진다.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책을 읽거나 누워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내 공간인 미술관 안에서 관객들은 마치 일광욕을 즐기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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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올라퍼 엘리아슨, <중재된 움직임, 물>, 2001

<중재된 움직임, 물> [그림 4]은 자연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물, 흙, 버섯, 개구리밥, 스모그 등을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관객들은 물 위를 걸어 다니거나 땅을 밟으며 거닐어 다닐 수 있게 제작되었다. 물이나 흙 등 자연요소가 실내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자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물속을 들여다보거나 땅을 밟고 만져볼 수도 있다.

태양, 무지개, 안개, 물 등의 자연요소는 관객들이 실내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경험을 갖도록 만든다. 엘리아슨은 실내 공간 속에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재현하여 낯선 경험을 유도한다. 그는 실내/실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익숙한 풍경이나 소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간 속에 옮겨 놓는 그는 관람자가 공간이나 사물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포스트네이처란 친환경시스템은 아닐지라도 핵심적으로는 ‘재생(Regeneration)’에 대한 시도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넘쳐나는 정보의 힘은 자본주의와 합세하여 자연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자연의 상품화를 심화시켰다. 자본과 자연에 대한 시각은 최병두의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논해진다. 그는 자연은 늘 인간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연은 끊임없이 상품화·시장화·금융화되는데 자연의 구성물들은 그 자체로서 상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생산되고 소비되게 됨에 따라 시장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최병두는 환경 보존과 효율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자원에 시장제도가 적용된 시장환경주의 (Market Environmentalism)를 언급한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통제권이 공적에서 사적으로 넘어가면서 환경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던 기업들은 생태적 논리가 아니라 기업의 논리에 따라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19]. 싱가포르의 사례 역시 환경문제를 해결하거나 자연의 생태적 보전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적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함이다.

주어진 자연으로서가 아닌 문화적 구성물이 된 포스트네이처의 실현체들은 자연에 대한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지구상의 모든 종은 평등하다는 포스트휴먼론과 달리 포스트네이처는 인간을 위한 인공자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포스트네이처는 자연과 기술이 융합된 형상이며 공존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의 지위를 견고히 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문화적 구성물이 된 포스트네이처의 실현체들은 자연과 기술이 융합된 형상이며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기 보다는 ‘인간’의 지위를 견고히 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포스트네이처론은 인간을 위한 인공자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인간/자연의 이원적 개념을 탈피하려는 흐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원적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기술이 개입된 자연의 양상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자연을 인간의 부속물로써 여기기 때문에 과연 인류세 담론과 부합하는 동향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Ⅲ. 스칸디나비아의 인문기능주의

1. 인문기능주의의 유래 및 특징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지구의 북쪽에 위치하여 역사나 기후, 환경, 문화 등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제작된 가구나 디자인 제품들은 다른 말로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라고도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파리 만국 박람회를 통해서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당시 ‘스칸디나비안 그레이스 (Scandinavian Grace)’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들만의 디자인 이념을 확고히 만들었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는 스웨덴 디자인과 덴마크 가구 디자인이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54년부터 3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개최한 《스칸디나비아디자인 순회전(Design in Scandinavia)》을 통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경쟁력 있는 디자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또한 1951년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부터 북유럽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이 발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각 국가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배경과 생활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북유럽의 경우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변방에 위치하여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고 겨울이 긴 기후적인 요인 때문에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3∼4주에 해당하는 짧은 여름에만 태양을 즐길 수 있으며 나머지 11개월은 어둡고 짧은 일조시간을 가진다. 이 때문에 춥고 넓은 땅 위에 만든 집은 거주민 들에게 휴식의 공간이자 관계 형성의 장이며 책을 읽고 음악을 즐기는 여가의 공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보금자 리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북유럽의 기후적 특성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발달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북유럽의 생활양식은 롤라 오케르스트룀(Lola AkinmadeÅkerström)의 책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책 『라곰: 스웨덴식 행복의 비밀(LAGOM: The Swedish secret of living well)』(2017)은 북유럽 국가 중 스웨덴 사람들의 삶에 대해 관찰한다. 저자는 스웨덴 사람 들이 주거공간을 꾸밀 때 과소비를 절제하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라곰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개인 욕구를 채우면서도 환경을 지키는 균형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삶에서 특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환경 의식을 갖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함께 생활하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내포한다[20].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자는 스웨덴 생활의 기본 방식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북유럽 국가들의 공통된 가치관인데, 그 흐름은 과거에서부터 찾을수 있다. 북유럽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생계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취락 형태가 유목적인 동시에 정주 (亭主)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물품은 단순한 형태에 가볍고 다기능적인 것을 추구했고 사물을 축적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의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습관이 있어 제품을 만들 때 정성을 담아 만들었고, 물건에는 대부분 소유주의 표식(이름, 날짜, 문구 등)이 새겨져 있다. 이는 물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반증하며 인간과 사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21].

가볍고 간결하며 기본에 충실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표준화에도 용이했으며 대량생산을 촉진할 수 있었다. 표준화는 대량생산의 기본요건으로서 비용 절감, 생산 시간의 단축 및 생산성의 증대 그리고 이용자의 만족도로 이어졌다.

스칸디나비아의 인문기능주의는 생존을 위한 용도로 만든 도구에서 비롯되었다. 생존 전략을 위해서는 기후, 지형, 식물, 동물에 대한 지식이 중요했으며, 주변의 자원으로 만들어진 도구는 주위 환경과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였다. 생존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칸디나비아인은 자연의 재생과 순환에 따라 상응하는 전략을 짜게 되었고 자연이 영속해야 인간도 영속하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도구는 지식처럼 세습되며 사용되었고 도구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다루는 기술을 보유했다는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았다. 장인으로 불리는 이들의 기술은 하나의 지식체계로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것이었으며 물질을 다루는데 있어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장인 정신의 전통이 강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발생한 산업혁명은 북유럽에 늦게 파급되었기 때문에 산업의 상대적 빈곤 속에서 만들어진 산업 제품들은 광범위한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수공예적 특징을 강화했다. 산업화와 분업화는 장인들의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형태를 해석하고 재료의 변화와 관련된 다양한 변수를 디자이너 에게 전달하며 협업을 통해 새로운 형태적 가능성을 추구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

개인을 위해 만들었던 도구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규격화·표준화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상품으로 전환되었다. 도구에서 제품으로 전환되면서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북유럽의 국가들은 수입품에 대해 규제를 걸어 국내 생산품의 디자인적 측면이 발달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도구는 상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문기술로 간주하였고 산업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북유럽 국가의 장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를 기능주의와 통합하여 인문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인문기능주의는 인간과 자연환경이 연결된 디자인 이념을 가리키는데 인간과 자연의 공생(共生)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유럽 사람들은 모든 생명, 형상, 사물에는 신비한 힘을 뜻하는 마나(mana)가 들어있다고 여겼다[21]. 그들은 자연에서 얻거나 인간이 만든 물건 모두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자연에 대한 숭배와 탐구는 자원의 활용 및 도구의 발달로 이어졌으며 인문기능주의적 디자인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핀란드의 경우 땅의 69%가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림과 수자원은 북유럽 국가들에 엄청난 자연 에너지원이었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북유럽의 산업발달은 자연자원(수력)에 의존하여 시작되었다. 제재소, 선박 건조, 나무의 천연수지는 삼림자원에 기반한 가장 중요한 산업이자 수출 분야였다. 이렇게 삼림 생태계를 이용하는 북유럽의 삶에서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가 나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는 생필품, 연료, 건축물, 영양제 등이 되었으며, 자원의 풍부함과 자생력의 원천으로 간주되어 숭배 받는 존재였다. 자연 재료의 특성을 살리는 디자인은 북유럽의 오래된 전통으로 귀결된다. 국목인 자작나무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 중 하나인데 가구나 생필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북유럽의 토착 사미(sami) 문화에는 사물이 그 연료가 나왔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순환’의 과정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21]. 있는 그대로의 자원을 이용한 디자인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산물을 뜻하며 사용 후에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작함으로써 자연의 순환구조와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어우러져서 생활하는 그들은 재료 자체가 가진 질감이나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선호한다. 북유럽 디자이너들은 가구에 인체공학[22]을 결합하여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환경과의 공존을 일찍부터 실현하고 있어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디자인 방향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현대의 스칸디나비아 브랜드 중에는 인간의 장인정신과 수공예적 전통을 존중하고 자연으로의 순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원재료로 작업하기를 선호하는 인문기능주의 추종자들이 있다. 본고에서는 인문기능주의의 특성에 잘 부합하는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한스 웨그너 (Hans Wegner), 카이 보예센(Kay Bojesen), 그리고 디자인 그룹 럭키보이선데이(Luckyboysunday)을 선별하여 인류세의 이념과 연결지어보았다.

2. 인문기능주의 디자인의 사례

2.1 한스 웨그너

한스 웨그너(1914∼2007)는 나무나 종이와 같은 원자재를 이용하여 간결하면서도 안정감 있고 50년 이상의 사용 가능한 가구를 제작했다. 그는 전통적인 장인 기술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곡선의 미학을 의자에 투영 했으며 완성도 높은 가구를 만들었다. 그의 디자인은 ‘유기적 기능성(Organic Functionality)’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가볍고 편안함을 표방하여 생활에 밀접한 디자인을 목표로 삼는다. 재료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웨그너는 먼저 제품 스케치를 하고 1/5 축소된 모형과 시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본인이 한 달 동안 사용하여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검토한 후 적합한 경우에만 생산에 들어갈 만큼 의자의 구조와 사용자가 앉았을 때 느끼는 안정감,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는 의자를 단순히 가구로만 본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의자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도록 고려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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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Round Chair, 1949

웨그너는 편안하면서도 대량생산에도 적합한 가볍고 간결하게 디자인의 의자로 미국 잡지 『인테리어 (Interiors)』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자로 선정되기도 했다[23]. 라운드 체어는 의자의 기본인 좌판과 4개의 다리, 팔걸이로 구성된 장식적인 요소가 최소화된 디자인 이다. 등판과 다리는 참나무(Oak)로 좌판에는 가죽(Leather)으로 제작되었는데 좌판은 등나무 껍질 케인 (Cane)으로 엮어 단단함을 자아낸다. 다리, 팔걸이, 앉는 자리가 하나로 이어져 선의 유려함이 돋보이는 의자이다. 등판은 우아한 곡면으로 디자인되었으며 불필요한 요소는 모두 제거한 심플한 디자인으로 웨그너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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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Wishbone Chair, 1949

위시본 체어(Wishbone Chair, 1949)는 중국 웨그너와 칼 한센(Carl Hansen)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덴마크 무역상의 초상화에 삽입된 명나라풍 의자 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등받이가 없고 Y자 모양의 형태가 등판 역할을 하는 의자로, 새의 가슴뼈를 닮았다고 해서 위시본 체어라 불린다[24]. 반원에 가까운 곡선은 원목에 스팀을 쬐어 만들기 때문에 원자재에대한 이해가 동반되며 동시에 기술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어깨를 감싸는 듯한 둥근 원목은 등판과 팔걸이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등판과 팔걸이를 유기적 형태로 디자인함으로써 편안함을 추구하고 단순하지만 실용적이 다. 등판은 너도밤나무(Beech), 다리는 참나무(Oak)를 사용했고 앉는 부분은 종이 끈인 페이퍼코드 (papercord)로 장인들이 한 줄 한 줄 엮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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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Peacock Chair, 1949

웨그너의 의자 중에서 가장 장식적으로 느껴지는 디자인은 피코크 체어(Peacock Chair, 1947)이다. 다른 의자와 달리 좌판이 낮고 과장스럽게 높은 등판은 마치 공작새의 깃털을 연상시킨다. 등판은 아치형 프레임에 나무살을 붙여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나무살은 복잡해 보이지만 이 의자는 매우 단순한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곡선과 직선의 적절한 배치는 어떤 가구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실현했다. 피코크 체어는 편안함에 충실하면서 가볍고 이동성 또한 뛰어나다. 등판과 다리는 참나무와 물푸레나무(Ash), 좌판은 페이퍼코드로 제작되었다.

웨그너는 자연소재인 나무를 사용하여 인간의 손에서 직접 마감할 수 있는 가구를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의 디자인에는 기계만으로 완성할 수 없는 유기적인 형태가 존재한다. 그는 부품을 최소화하여 각 부재의 조립과 결합에는 못이나 스크루를 자제하고 맞춤으로 각연결고리를 결합하는 구조를 선호했다[25]. 마감 부분에도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거나 배색된 색상을 배치하는 등 디테일까지 섬세하다.

2.2 카이 보예센과 럭키보이선데이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카이 보예센(1886∼1958)은 은세공사이자 디자이너이다. 초창기 작업에 있어서 그는 은세공사 일을 하면서 게오르그 옌센(Georg Jensen)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는 1920년대 이후 현대 도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 목재 장난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북유럽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의 재질은 플라스틱보다 나무가 많은데 이는 주변 환경의 영향이 다[25]. 추운 지역에서 자란 나무는 단단한 성질을 띠기 때문에 이런 나무로 만든 제품은 우수한 품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예센은 북유럽에서 자란 나무로 장식품을 만들고 있으며 원숭이, 코끼리, 새, 얼룩말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으로 장난감을 만들어오고 있다. 원목 장난감은 나무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따뜻한 감성을 자아내며 자연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이 반영한다.

럭키보이선데이는 카밀라 코르센(Carmilla Koerschen)과 카밀라 에드럽(Camilla Ebdrup)이 2007년에 만든 덴마크 브랜드이다. 패션과 미술을 전공한 텍스트디자이너인 두 사람은 일상과 비일상적인 것, 어른과 아이의 세계에 예술적인 감성을 제공하기 위해 럭키보이선데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럭키보이선 데이는 장난감에서부터 가구, 인테리어 소품, 의류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부분 니트로 제작된다. 이곳의 모든 디자인은 볼리비아(Bolivia)에서 만들어지는데 볼리비아는 알파카(Alpaca) 털의 주요 생산국이며 수 세기 동안 품질 좋은 양모를 생산해왔다. 알파카는 주로 모직물 원료를 목적으로 사육되는 가축인데, 럭키 보이선데이의 제품은 100% 알파카로 만들어졌으며 최상의 품질을 내기 위해 볼리비아의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제품은 공정무역을 통해 숙련된 장인들에 의해 창조되며 최고급 재질의 울인 부드러운 캐시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의 설립자는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필요하며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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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Kay Boj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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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Luckyboysunday

럭키보이선데이의 디자인이 커다란 호응을 얻는 이유는 좋은 감촉을 선사하는 ‘알파카’라는 재료에 있다. 의류에 있어서 알파카나 캐시미어의 사용은 흔하지만 인테리어 소품에 활용하는 것은 이 브랜드의 독특한 점이다. 니트로 만들어진 디자인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촉감을 주고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했을 때 따스한 감성을 자아낸다는 점이 럭키보이선데이의 장점이다. 어린이들의 애착 인형으로 많이 사용되는 럭키보이선데이의 인형들은 아이들이 만졌을 때 온기가 느껴지고 사람의 살처럼 부드러우며 가벼우므로 어디를 가든 늘 함께 다닌다.

이곳의 디자인으로 활용되는 모티프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시작된다. 마치 아이가 그린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인형의 모습은 장난감, 옷의 문양, 쿠션 등으로 활용된다. 일괄적으로 생산된 공산품이나 완벽히 떨어지는 그림이나 디자인이 아닌 어딘가 부족해 보이고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니트 조직의 성격을 잘 활용하여 일률적으로 생산된 제품이라 하더라도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속성이 있어 기계로 찍어낸 느낌이 덜 든다. 아이들의 시선이 기본 출발점이므로 어른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서투름과 어설픔이 있고 이는 럭키보이선데이의 성격으로 자리매김했다.

보예센과 럭키보이선데이는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수용할 수 있는 디자인이자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성격을 잘 대변해준다. 두 브랜드는 있는 그대로의 원자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재료 간의 접합 부분에서 불필요한 부자재의 사용을 줄이는 노력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공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색을 입혀야 할 경우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는 화학 안료의 사용이 불가피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브랜드의 제품들은 원자재를 최대한 활용하되 환경에 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제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 기계로 찍어낸 느낌보다는 수공예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인문기능주의에 충실한 예시로 볼 수 있다.

Ⅳ. 결론

여러 학자가 인류세의 시작을 산업혁명으로 보는 것처럼 산업혁명은 사회, 문화, 경제, 철학, 예술, 환경 등 제반 분야에 기계공학적인 사고를 개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기계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20세기는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서도 기계공 학이 접목된 시기였다. 대표적인 예로 미래파(Futurism) 작가들은 속도를 예찬하고 기계인간의 도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당시 기계인간은 20 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합리성으로 무장한 기계가 가지고 올 유토피아 사회의 주인공을 뜻했다.

산업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는 독일공작연맹 (Deutscher Werkbund)이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규격화와 표준화를 내세웠으며, 이를 계승한 바우하우스(Bauhaus)에 이르러서는 산업재료를 미학적으로 수용하면서 기계미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0세기의 기능주의는 당연히 기술의 발달과 기계의 개입을 전제한 것으로, 장식을 죄악시하며 오로지 합리적 용도만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던 사고방식이었다.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고 말했던 루이 설리반(Louis Henri Sullivan)이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로 표현했던 르 코르비지에(Le Corbusier)의 주장은 기능주의의 성격을 잘 대변해준다.

이에 비해 스칸디나비아 고유의 인문기능주의는 생산부터 사용 후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계미학적 기능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대량생산 시스템에서도 수공예적인 성격을 제거하지 않고 장인정신을 강조하며 원재료의 특성 자체에 집중하는 스칸디나비아의 인문기능주의는 21세기에 들어 전면 재평가되고 있다. 인류세의 이념에 근접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관이기 때문이다.

홍수와 폭염, 폭설로 인해 등장하는 인명피해의 기사들은 단순히 이산화탄소의 배출량과 지구온난화와 같은 과학적인 진단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인류세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융합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류세에 대한 개념을 짚어보고 시사점을 검토해보는 것은 미래를 위한 거시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연구의 방식은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태도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검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문기능주의를 지향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인간과 주변 생명체 및 자연환경의 평등한 공존을 실천하는 주된 흐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문화가 되듯이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자연과 어우러짐을 실천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과 그 소비는 인류세에 걸맞은 트렌드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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