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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nant Theology Reconsidered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Law and Grace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고찰한 언약신학

  • 제해종 (삼육대학교 신학과 조교수) ;
  • 김희준 (삼육대학교 신학대학원 연구조교)
  • Received : 2020.01.06
  • Accepted : 2020.01.21
  • Published : 2020.03.28

Abstract

This study reconsiders covenant theology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law and grace. In order to do this, it first evaluates whether the Sinaitic Covenant is a covenant of grace or a covenant of works. This has been in discussion for a long period of time among theologians, yet is far from settled. Traditional studies form a wide spectrum, which can be divided into at least four major branches. First, the Sinaitic Covenant is the same as the covenant of grace. Second, the Sinaitic Covenant is the same as the covenant of works. Third, the Sinaitic Covenant forms a third, independent category of covenant. Fourth, the Sinaitic Covenant exists in harmony with the covenant of grace. Each category is summarized along with its representative proponents. Also, even though the term covenant of works is not accepted as prevalently among modern theologians, observations is made on how each category connects to and continues in modern theological discussions regarding law. Special emphasis is given to the fourth category and the fourth perspective on law with respect to how they differ from the others in viewing the relationship between law and gospel. Moreover, recognizing that the unique understanding of the fourth view grows out of a careful observation of the Biblical text, the structural similarities between the Sinaitic Covenant and other Biblical covenants are compared based on the Biblical text. Based on this comparison, it is observed that God's grace and human duty coexist in several Bible covenants including the Sinaitic and New Testament covenants. From this observation, it is proved that conditionality regarding covenant fulfillment exists in them all. This conditionality does not entail from exclusiveness on the part of God, but from the weakness on the part of humans. However, some unconditional covenants, albeit few in number, can be found in the Bible. Therefore, the difference between unconditional covenants and conditional covenants is discussed. Lastly, the proper place and role of grace in covenants is studied.

본 연구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약 신학을 재고찰한다. 이를 위해 우선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인지, 행위 언약인지를 살펴보는데, 이 문제는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기존 연구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는데 큰 흐름의 줄기들은 최소한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과 동일하다는 견해, 둘째는 그것이 행위 언약이라는 견해, 셋째는 그것이 제3의 독자적인 언약이라는 견해, 넷째는 그것이 은혜 언약과 조화를 이룬다는 견해이다. 각 견해의 대표적 학자를 중심으로 핵심 내용을 살펴본다. 또한 비록 여러 현대 신학자들이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각 견해가 어떻게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 논의와 연결되는지 살펴본다. 그 중 특별히 네 번째 견해 및 율법관이 율법과 복음의 관련성에 관해 나머지 견해들과 어떻게 다른 이해를 갖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그리고 이 독특한 네 번째 견해가 성경 본문의 독법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시내 언약과 성경의 다른 언약들의 구조적 특징들을 비교 분석한다. 그리고 이 분석을 토대로 시내 언약과 신약의 언약들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언약들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가 공존하며, 따라서 성취의 조건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한다. 이 조건성은 하나님 편에서의 배타성으로 인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연약성으로 인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성을 갖지 않는 언약들도, 비록 소수이지만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 언약과 조건적 언약의 차이점을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언약에서 은혜가 차지하는 올바른 위치와 역할을 살펴본다.

Keywords

I.들어가는 말

언약은 성경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언약’(covenant, [히]베리트, [헬]디아데케)이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292회 반복해서 사용된다[1]. 언약이란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성경의 핵심 주제이고 “해석학의 중심되는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2].언약 사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적 흐름을 이루는 데, 이를 언약 신학 혹은 대표 신학(Federal Theology) 이라고 부른다[3]. 언약 신학의 본격적인 역사는 종교개혁 시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물론 종교개혁자들이 언약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신학자들은 아니다). 언약 사상을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올바른 구원관을 정립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언약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단순히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교리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많은 논의가 이어져왔다. 특별히 구원론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 되는 은혜, 믿음, 율법, 행위 등이 언약 신학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론적 요소들은 언약 신학 안에서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되는데, 행위 언약(또는 창조 언약, foedus naturae)과 은혜 언약(foedus gratiae)이 그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법은 성경에 명시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행위 언약 또는 은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사한 부분이라면 갈라디아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바울이 두 언약을 구분했다는 견해, 다른 하나는 단지 유대주의자들의 언약관을 비판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전자에 의해 옛 언약은 율법과 행위, 새 언약은 은혜와 믿음과 복음으로 풀이되곤 한다 [3][4]. 행위언약에서 약속된 상급은(promise) 생명이 며, 규정된 조건은(provisio) 아담의 순종이고, 실패의 결과는(penalty) 사망이다. 이 실패 즉 사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은혜 언약이다. 은혜 언약에서 약속된 상급은 구원과 영생이며, 규정된 조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는 순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5].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언약들은 이두 카테고리의 범주 내에 들어오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3].

그런데 유독 논쟁이 계속되는 것은 시내 언약(또는 모세 언약)이다.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킬 것인가, 행위 언약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폭넓은 합의가 최종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언약 신학의 근본 개념 체계들이 태동되기 시작한 지 약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내(혹은 시내산) 언약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내 언약이 가진 이중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시내 언약은 성경 줄거리의 흐름으로 보면 이전의 아브라함 언약 및 이후의 다른 언약들 사이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들과 연속성 가운데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즉, 모세 언약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은혜 언약에 포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홀로 행위 언약으로 불쑥 등장하는 것은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내 언약에는 “이것을 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로 요약될 수 있는[6], “모든 이들이 동의한 율법적 특성”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7].

이러한 혼합적 특성으로 인해 시내 언약에 대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상충되는 견해들이 존재해왔다. 첫째는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며, 둘째는 행위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고, 셋째는 제3의 독자적인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며, 그리고 넷째는 은혜 언약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분류하는 견해이다[8]. 물론 D. 패트릭 램지(D. Patrick Ramsey)가 지적했듯이 이 분류가 칼로 자르듯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분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쪽의 면모와 저쪽의 면모를 혼합적으로 갖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르만 윗시우스(Herman Witsius)는 은혜 언약이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같은 본질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 속한 모세 언약은 행위 언약의 반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8]. 세바스찬 레만(Sebastian Rehman) 이 지적한 것처럼 “역사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교리 역사가들의 도식화에 들어맞지 않는다[7].” 하지만 램지는 이해와 분석의 목적을 위해 큰 흐름과 줄기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9].

시내 언약의 분류에 대한 논의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많이 희석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코넬리스 베네마 (Cornelis V. Venema)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행위 언약’에 대한 최근 비평들”(Recent Criticisms of the ‘Covenant of Works’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이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이 전통적 언약신학자와는 달리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부정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Karl Barth)가 그러하며, 그 외에 홈즈 롤스턴 3세(Holmes Rolston III), 제임스 토런스(James B. Torrance), S.G. 데그라프(S. G. DeGraaf), G. C. 베르카우어(G. C.Berkouwer), 존 머레이(John Murray)등도 모두 일관 되게 행위 언약을 부인한다[10].

그러나 이전의 언약 신학자들과 달리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이분법을 사용하진 않지만, 그러한 이분법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던 율법관은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논점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언약 신학자들을 율법관에 따라 네 가지 견해로 나누었던 그 분류의 틀이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관에서도 일정 부분 지속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칼 바르트(Karl Barth),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그리고 존 머레이(John Murray)와 같은 몇몇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은혜 논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수학적 정확성에 필적할 만큼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약 신학자들의 관점들을 분류한 틀의 특성이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관 분류에서 상당 부분 반복적으로 반영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본 연구는 이 네 가지 언약 신학적 관점들을 몇몇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관과 함께 통합적으로 비교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각각의 관점을 옹호하는 모든 언약신학자들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각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는 마지막 관점인 ‘율법과 은혜의 조화’라는 입장이 나온 배경이 독특한 성경 독법임을 고려하여, 언약 신학에 대한 성경 전반의 증거들을 통해 성서적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기반하여 은혜 언약의 조건성과 은혜의 올바른 의미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II.네 가지 언약 신학적 관점과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관

1. 은혜 언약으로서의 시내 언약 이해와 바르트의 율법관

시내 언약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은 그것을 은혜 언약의 일부로 것으로 보는 것인데, 이를 양분론자 (Dichotomist) 관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분론자라는 명칭은 시내 언약을 은혜와 행위언약 외에 세 번째의 독자적인 종류로 분류하는 삼분론자(Trichotomist) 와 대조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삼분론과 달리 양분론에 따르면 언약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두 가지만 존재하며, 시내 언약은 후자에 포함된다. 또한 이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진 관점이라는 뜻에서 다수 관점 (majority view)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가 이를 지지한다고 램지(Ramsey)는 어니스트 키번 (Ernest F. Kevan)을 인용해서 말한다: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는 점에 동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이 관점은 신앙 고백서[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5-6항을 언급한다]에 포함되었다”[9]. 그 외에 헤르만 윗시우스(Herman Witsius), 요한네스 브라우니우스 (Johannes Braunius) 등이 이 진영에 속하며, 오늘날에는 어니스트 키번(Ernest F. Kevan) 같은 학자가 이를 지지한다[11]. 이 관점은 시내 언약이 다른 언약과 본질(substance)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질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언약만 있고, 이들은 다른 세대에 걸쳐 나타난다”[12].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요소들, 즉 다른 세대(dispensation), 다른 적용(administration), 다른 차원(degree), 혹은 형태(form) 등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본질적인 동일성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다. 예를 들면,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7조 5항 및 6항과 유사하게[12]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내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나 형식에 있어서는 다소 다르다”[13]. 그리고 “시행의 형식은 변할지라도,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 동일성을 갖는다”[13]. 그런데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의 정의는 다음 문장을 읽을 때, 다소 흐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시내 언약은 일종의 막간(interlude)이다.[…] 은혜 언약의 참된 성격인 무조건적이고 은혜로운 성격이 약화되는 시대에 적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는 약속과 이에 부응하는 믿음이 강조 된다”[1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시대를 넘어서 신약 시대와 비교하면 동일성은 더 흐려지고 모호해진다: “신약 시대는 언약의 은혜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시내 언약보다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13]. 그렇다면 시대가 갈수록 시내 언약은 상대적으로 행위성이 짙어지고 동일성이 흐려지는 것이 되고, 동일하다는 말이 정하는 본질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확실하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모호성의 여지로 인해 아래의 여러 대안적 언약 관점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내 언약과 은혜 언약을 하나로 보면서도 역설적으로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려는 경향을 바르트의 율법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 율법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지닌다. 바르트는 “율법을 나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14]. 오히려 율법을 의로운 것이라고 말한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도 주장하는데, 이러한 역설적 모호성에 대한 설명 또한 제공한다. 바르트에게 율법이 부정하지 않은 것은 율법과 은혜의 결합이 전제될 때에 한해서이다. 은혜와 분리된 율법, 그 자체만으로 독립된 율법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바르트에게 은혜는 올바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15],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발걸음”으로 “신뢰를 가지고 순종하며 따라가” 게 한다[15]. 그러나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가 우선적으로 오지 않는 한, 율법의 ‘내용’을 볼 수 없” 고, 그러한 상태에서 “율법은 인간에게 복음이 아니고, 규례이고 명령일 뿐이다”[14]. 복음이 빠진 “단순한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인간에게 무의미”하기 때문에, “율법이 복음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복음과 분리되어 그 자체적으로 존재할 때, [···] 단지 하나의 규례이고 명령”일 뿐이다. 즉, 바르트에게 핵심 내용은 은혜이고, 율법은 그것을 담는 형식이다[14]. 바꾸어 말하면, 은혜는 주체이고 율법은 은혜와 분리된 그 자체만으로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2. 행위 언약으로서의 시내 언약 이해와 불트만의 율법관

시내 언약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그것을 행위 언약과 동일시하는 것인데(마이클 맥기퍼트[Michael McGiffert] 는 쯔빙글리[Zwingli], 불링거[Bullinger], 칼빈[Calvin]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모세의 도덕법을 행위 언약과 동일시했다고 말한다[6]), 대표적인 인물로는 로버트 롤록 (Robert Rollock)이 있다[16]. 그 외에도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이 진영에 포함될 수 있는 인물로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존 코튼(John Cotton) 등이 있고[6], 재세례파 (Anabaptists), 소키누스주의자들(Socinians), 알미니 우스주의자들(Arminians)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11]. 이들은 시내 언약과 은혜 언약 사이의 대립을 분명히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롤록은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이해했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드러났다.”고 주장했다[7]. 그는 죄 이전 아담과 맺었던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 아담의 죄와 타락 이후 하나님이 돌판에 새기신 십계명,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고 기록한 모세에 의해서 반복되고 갱신되었다고 말한다. 이 행위 언약은 “출애굽기 19장과 20 장”의 “시내산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만일 네가 내 언약(곧 내 율법)을 지키면”이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갱신되었다고 롤록은 주장한다[17]. 그러므로 롤록은 시내산의 언약을 행위 언약과 동일시한다.

이 견해는 다음에 언급될 세 번째 관점과는 달리 시내 언약과 은혜 언약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존재함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즉, 두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틈이 있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애써 메우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상혁은 이렇게 말한다: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부인했다. 특히 모세의 법은 은혜와 대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 폐지되었고 따라서 새 언약 안에는 설 자리가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11]. 또한 소키누스 주의자들과 재세례파는 둘 사이의 연속성을 배제할 뿐 아니라 “모세 언약 에는 성령과 영생이 약속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크게 강조”했다[11]. 나아가서 해리스 퍼킨스(Harris Perkins)에 따르면, 행위 언약을 율법과 동일시하고, 은혜 언약을 믿음과 동일시한 롤록은 “율법은 믿음이 아니며, 실제로, 율법 언약의 공식은 율법의 어떤 면모도 믿음과 공통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18].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유사하게 불트만은 은혜와 분리된 율법을 적대적인 것으로 본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은혜는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데, 그 이유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 안에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19]. 이 “신앙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포기하고 생명을 얻은 자”이다[20]. 그러나 은혜가 오기 이전의 인간, 즉 “신앙 이전의 인간에게서 율법은 심지어 도덕적 요구들 안에서도 죽이는 ‘문자’”이며, “절망적인 것” 이다[19]. 은혜로 말미암은 신앙을 갖기 이전의 인간에게 율법은 단지 “윤리”일 뿐이며[19], “유대인들이 집착하던 ‘의’에 대한 노력,” 즉 신앙 없는 “실천과 선한 행위들”에 불과한 것이다[20]. 불트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노력이 죄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이런 죄를 짓도록 “유혹” 하는 것, 곧 “인간을 죄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의 특성이자 “본래의 의도” 라고 주장한다[20]. 불트만의 율법관은 바르트의 율법관, 즉 은혜로부터 분리된 율법 무용론에서 한 걸음 더나아가 율법이 비록 은혜라는 틀 안에서는 필요한 것일 지언정(바르트, 불트만, 브루너, 그리고 머레이는 공통적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14][15]. 불트만은 “규칙,” “규정” 등의 필요성을 역설 한다[19]. 브루너도 율법의 “의도”는 복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며, 율법은 “폐기”되지 않고 복음을 위한 “적 절한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21]. 그리고 누구보다도 율법의 중요성과 유효성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은 머레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양심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사람의 삶을 규제해야 하는 명령들, 한마디로 말해서 도덕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변함없는 거룩과 공의와 권위가 존재한다”[22].)그 자체만으로는 적대적이고 해로운 요소로 간주한다.

3. 제3의 언약으로서의 시내 언약 이해와 브루너의 율법관

시내 언약에 대한 세 번째 관점은 그것을 은혜도, 행위도 아닌 제3의 언약으로 보는 것으로서[9], 이는 보조 적(subservient view) 관점 혹은 소수 관점(minority view)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 이를 최초로 표명한 학자 중 하나가 존 캐머론(John Cameron)이며[9], 그의 사상을 발전시킨 모제 아미로(Moyse Amyraut)와 소뮈르(Saumur) 학파가 이 관점에 대한 대표성을 지닌다 [7]. 그 외에 존 오웬(John Owen), 사무엘 볼튼 (Samuel Bolton) 등이 이 진영에 속해 있다[7]. 오늘 날에는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 마크 칼버 그(Mark Karlberg)가 이 입장을 지지한다[11]. 이 관점은 첫 번째 관점과 달리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과 비교해서 세대, 정도, 차원, 형태 뿐 아니라 본질 (substance)에 있어서도 상당히 다르다고 평가한다. 열등 관점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는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내 언약은 그 목적에 있어서 보조적(subservient)이 고, 예비적(preparatory)이며, 교육적(pedagogical) 이다. 시내 언약은 은혜 언약이 더 효율적으로 확립되기 위해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영원하고(eternal), 내세적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이고 현세적인(temporal) 요소로 이루어진다 [23]. 여기서 현세적인 요소라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 얻을 축복을 가리킨다[9]. 이 현세적 축복들, 또는 언약에 미치지 못했을 때 이르러 오는 현세적 저주들의 주요 목적은 “구속하는 은혜와 진리,” 즉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데 있었다[24]. 이러한 언약은 오직 상징적(symbolic)이고 모형적(typical)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24].

17세기의 대표적 언약 신학자인 요한네스 코세이우스(Johannes Cocceius) 역시 이 견해를 부분적으로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이해한 세 가지 언약, 혹은 세 “시대(epochs)” 내지는 “경륜(dispensations)” 들은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 모세와 그리고 모세를 통해 맺어진 은혜 언약, 그리스도와 맺어진 새 언약”이 다[23]. 그는 죄의 용서에 대해 구약과 신약 시대가 다르다는 점을 피력했다. 또한 그는 시내 언약이 포함된 구약 시대에는 죄가 단지 “간과(parēsis)”되었고, 신약에 이르러서야 “온전하게 용서(aphēsis)”되었다고 주장 했다[25]. 비록 구약과 신약의 언약을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지칭하기는 했으나, 동등한 은혜 언약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같은 용어이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분리해서 본다는 점에서 코세이우스는 시내 언약 역시 신약의 중심인 은혜 언약과 다른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윗시우스의 예에서 보았듯이 모든 분류가 수학 공식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을 위해 보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견해처럼 브루너 역시 율법은 은혜와 복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데런 썸너 (Darren O. Sumner)에 따르면, 브루너는 율법이 “복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그것만의 적절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21]. 그러나 이 말은 곧 율법은 복음과 은혜라는 더 높은 목표에 종속된 기능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된다. “(변증법의 ‘율법’ 부분에서 있는) 일반 계시”는 “임시적인(provisional), 그리고 최종적으로 불충분한(insufficient)” 위치에 있다[21]. 그리고 브루너에게서는 율법 대 복음이라는 패턴과 유사한 자연 대 은혜, 철학 대 신학, 인간의 지식 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 이성 대 계시 등과 같은 일련의 대조 목록을 발견할 수 있다[21]. “율법 항목”과 “복음 항목” 사이의 평행적 대조는 율법 및 그것에 상응하는 요소들이 그 자체만으로 분리해서 따로 평가할 때, 은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요소들에 비해 열등함을 부각시킨다.

4. 은혜와 율법의 조화로서의 시내 언약 이해와 머레이의 율법관

시내 언약에 대한 네 번째 관점은 그 안에 은혜와 율법이 조화롭게 공존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이며, 그 외에 에드워드 피셔(Edward Fisher),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 등이 있다. 투레틴은 17세기의 신학자로서 위에서 열거한 언약 신학자들과 동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인물이었지만, 독특하게도 율법과 은혜 사이에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는 시내 언약을 포함하는 은혜 언약 내부의 통일성을 확고히 주장함으로써, 첫 번째 견해와 결을 같이한다. 하지만 첫 번째 견해가 시내 언약을 마지못해 포함시키는 인상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투레틴은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간주하였다”[11]. 즉, 시내 언약은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은혜적 요소와 율법적 요소가 함께 만나고 어우러지는 지점이며, “율법과 복음 사이의 혼합(mixture)”이라는 것이다[26].

투레틴의 입장과 관련하여 난해한 점은 그가 이 시내 언약을 다시 “내면적인 본질과 외면적인 경륜”으로 분리시킨다는 사실이다[26]. 본질과 형식, 즉 “숨겨져 있으나 본질에 해당하는 주요부(principal part)”와 “겉으로 드러난(conspicuous)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다 [11]. 이는 다시 시내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전의 견해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시내 언약의 “몽학 선생”적 역할, 즉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하는 보조적인 기능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세 번째 견해와 유사하다는 인상을 준다[26]. 투레틴 역시 율법과 은혜를 명확히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투레틴의 견해는 첫 번째 견해나 세 번째 견해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투레틴의 관점이 그것들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율법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율법을 바울의 표현과 같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으로 본다(롬 7:12). 이는 율법을 야훼의 고소를 위한 기능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적 기능과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세 번째 견해와 다르다[24]. 세 번째 견해 또한 율법이 복음과 구원에 유용한 도구임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유용한 도구로 보는 것과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27]. 첫 번째 견해를 가진 이들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대체로 율법의 중요성을 부정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투레틴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율법과 복음은 달콤한 조화 가운데서 서로 만난다. 율법은 복음 없이 시행되지 않으며, 복음 또한 율법 없이 시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적 복음(legal-gospel)이며 복음적 율법 (evangelical-law) 이다; 순종으로 가득 찬 복음이요, 믿음으로 가득 찬 율법이다”[26]. 즉, 그는 율법을 단지 선한 것이라고 마지못해 공언하는 것이 아니라(“[Paul] affirmed no intrinsic evil in God’s righteous requirements as expressed in the law”와 같은 표현이 곧 이런 주저함의 예이다. 본질적인 악을 부정하되 본질적인 선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물론, 위에서 첫 번째 견해로 분류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서는 율법이 유익하며 (19장 6항), “복음의 은혜와[…] 순조롭게 상응한다” (19장 7항)고 설명한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다른 곳에서는 비록 “한 개의 동일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경륜 아래” 있다고 함으로써 (7장 6항),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미묘한 긴장의 여지를 남긴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순조롭게 상응”한다는 것에 대해 (신앙 고백서의 간결한 특성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증명되지 않은 공언으로 남을 여지가 있다[28]), 복음을 위한 율법의 선하고 필수불가 결한 기능을 인식하고 확신하는 신념으로부터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공언하면서도, 시내 언약 속에 분명히 내재하는 율법성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분명한 설명을 제공하기를 주저 하던 첫 번째 견해의 수호자들과 차이가 있다[7]. 그래서 첫 번째 견해를 수호하는 많은 이들이 율법을 은혜나 믿음으로부터 분리시킨 것과 달리, 투레틴은 율법을 은혜와의 온전한 조화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확신을 갖고 두 요소를 조합해서 “복음적 율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1]. 심지어 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수여한 장본인도 그리스도 자신이었다.”고 믿는다 [11]. 이 견해는 율법과 은혜 사이의 이분법적 이해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서 둘 사이의 한층 더 온전하고 밀접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해한 율법과, 개신교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한 바울의 율법은 차이가 있다[29]. 신약, 특별히 사도 바울이 헬라어 νόμ ος(율법)를 사용하는 용례는 적어도 3~4가지 이상이 된다고 파머 로버트슨(Palmer O. Robertson)은 지적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 3:21에서 “율법(νόμου)과 선지자들”의 율법은 모세 오경, 즉 율법서 기록물을 가리킨다. 하지만 로마서 3:27에서 “무슨 법(νόμου)으로 냐”의 법은 믿음-칭의라는 일반적인 원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전의 로마서 2:23에서 “율법(νόμῳ)을 자랑 […]율법(νόμου)을 범함”의 율법은 모세의 십계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21의 “율법(νόμον) 아래”의 율법은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 중에서 바울이 “너희가 법(νόμον) 아래 있지 아니하고”(롬 6:14)라고 말할 때의 율법은 4번째 의미인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자세,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학적 율법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계명 아래에, 또는 모세 오경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오늘날의 신자의 삶 가운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축복의 근원이 되는 율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6:1-3에서 다섯 번째 십계명인 부모 공경이 약속된 축복을 성취할 것이라고 말할 때, 율법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자세, 또는 율법의 표상학적 기능 등과는 달리) 십계명으로서는 폐하지 않았고 전과 다름없이 유효하며 심대히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30]).

율법과 은혜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이 견해는 율법과 은혜에 각각 정당한 독립적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머레이도 율법에 그 자체만의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 바르트, 불트만, 그리고 브루너의 경우 각각 은혜에 의한 인식, 은혜에 의한 신앙, 은혜를 향한 목적을 율법으로부터 분리해버리면 율법은 그 가치를 다분히 상실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머레이에게 율법의 특성과 가치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특성과 가치에 상응하는 것임을 다음의 진술은 보여준다: “도덕 법은 결국 하나님의 도덕적 본질의 반영 또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시다. 따라서 또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상관되는 것이다”[22]. 그는 율법 고유의 특성인 거룩함이 은혜의 최고 절정인 십자가에서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이 그 자체로 서도 은혜에 보조적이거나 의존적이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등한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22]. 따라서 율법은 은혜와 독립적으로 그 나름의 높은 가치와 필수불가결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위에서 본 네 가지 관점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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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성서의 내러티브에 기초한 언약 신학 재고찰

율법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언약 관련 성경 구절에 대한 독법(讀法) 이다. 예를 들면 보스톤은 시내 언약이 선포되는 형식에 주목한다. 그는 그것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관찰한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둘째 부분은 인간의 의무이다. 전자는 십계명의 서문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낸 그들의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는” 내용이며[11], 그리고 후자는 십계명으로서 인간의 의무를 규정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 복음과 율법이 나란히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도 서문에 해당하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11]. 그리고 “서론적 선언에 이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라고 명령하시는데, 이것은 언약의 두 번째 부분, 곧 인간의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11](로버트슨 또한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은 그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아브라함 편에서의 헌신과 순종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아브라함 언약의 독특성이 의무 조항의 부재에 있다는 G.E. 멘덴홀(G. E. Mendenhall)의 주장은 잘못된 관찰이라고 언급한다[30]). 이러한 형식적 패턴은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서론적 계시에 뒤를 이어 10개의 의무 조항이 나열되는 십계명의 이중구조를 연상케 한다”[11].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 언약의 형식적·구조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전자가 은혜 언약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 언약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구조적 형태는 “은혜 언약이 속성상 도덕법과 결코 양립 불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언약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가 양립 불가한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한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인간은 의무를 수행하는 “상호성”과 “쌍방성”이 은혜 언약의 전제이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언약의 요소이다[11]. 이 상호성과 쌍방성 안에서 “율법과 복음, 은혜와 믿음, 그리고 약속과 의무”는 조화롭게 공존한다[11].

1. 성서 언약의 구조적 특징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스톤은 시내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을 이중 구조로 보았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고, 둘째 부분은 인간의 의무이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은 이중 구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소개,’ ‘인간의 의무,’ ‘약속의 성취’라는 삼중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허버트 리빙스턴(G. Herbert Livingston)은 성경의 언약 형식이 힛타이트(Hittite) 언약 형태와 유사하게 주관자를 소개하는 서문(preamble), 역사적 프롤로그 (historical prologue), 조항들(stipulations), 그리고 축복과 저주(blessings and curses)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외에도 문서를 성전 안에 비치함, 연례적인 공중 낭독, 증인들의 목록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연구자는 서문과 역사적 프롤로그를 언약의 첫째 부분, 조항들을 둘째 부분, 축복과 저주를 셋째 부분으로 정리했다 [31]).

예를 들면,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

2)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3) “내가[···]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 17:2)

이러한 언약의 “삼중 구조”가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에서도 반복된다.

1)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창 19:4-5)

2)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창 19:5)

3)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창 19:6)

두 언약 모두 첫째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선언하고, 둘째 부분이 사람의 의무를 설명하며, 셋째 부분이 마침내 약속의 성취를 표명한다. 이는 투레틴이 한 가지로 이해했던 은혜와 약속을 각각 첫째 부분과 셋째 부분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이러한 삼중 구조는 성경의 예레미야 31장과 같이 다른 언약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포로들과의 언약을 예언하신다. 여기서도 삼중 구조의 요소들이 여러 절에 분산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장 전체의 흐름은 귀환하는 포로와의 언약이라는 중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렘 31:3, 11)

2)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마음에 법이 기록되는 것은 곧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 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 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렘 31:12-14)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삼중 구조적 언약이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약 교회와의 언약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1)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또한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이와 같은 언약의 형식으로 기록된다[32].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2-6절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지적하신 후, 잘한 것은 계속 하라고 장려하시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1)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계 2:1)

2)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3)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후 이어지는 나머지 여섯 교회인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모두 하나같이 위와 같은 형식을 취한다. 이를 통해서 시내 언약은 형식에 있어서 구약의 다른 언약들뿐 아니라, 신약의 언약과도 통일성과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2. 성서 언약의 조건성

이러한 삼중 구조를 이해할 때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의무 뒤에 오기 때문에 그것이 조건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약속의 조건성을 인정한다면 은혜 언약이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주장에도, 심지어는 신약의 언약들이 무조건적이라는 주장에도 수정이 필요하다. 즉, 은혜 언약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의무 수행 여부가 약속의 성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 언약에서 하나님 뿐 아니라 인간도 성취의 주체가 된다. 여기서 약속이 조건적이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약속의 성취 여부에 관한 것이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조건적이고 변화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약속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조건성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다르게 전능하지 않고 죄에서 비롯된 불완전성과 연약성을 지녔고[13], 또한 언약을 잊어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제프리 니하우스[Jefferey Niehaus] 또한 무조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조건성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됨을 설명 한다[33]).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서약의 이행 과정은 변동적일 수 있으며, 타협의 여지가 있고, 불안하다. 그러므로 이 언약의 성취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실패의 가능성을 지닌다. 즉, 이 언약은 체결 시점에서는 최종성이 담보되지 않으며, 언약의 약속의 성취도 조건적이다. 여기에는 삼중 구조를 취하는 모든 언약들, 즉시 내 언약을 비롯해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바벨론 포로 귀환 언약, 심지어는 신약 교회 언약이 모두 포함 된다. 삼중 구조적 언약들은 모두 조건적이고, 쌍방적이다. (칼빈은 비록 “삼중 구조적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언약이 상호적이고 조건적이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언약은 “인간에게 의존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무조건적”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 편에서, “현세적 관점으로 보면 언약은 조건적”인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으로 보면 언약은 무조건적”이라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동시에 조건적이고 무조건적이라는 얼핏 보면 모순되는 점을 그 역시 조화시킨다[34]. 라일 비에르마[Lyle Bierma]는 칼빈이 언약을 인간의 편에서 아무런 의무를 가짐이 없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견해는 레오나드 J. 트린테루드 [Leonard J. Trinterud] 등의 학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35]. 일방적[unilateral] 언약에서 의무[obligation]는 오직 한 편에게만 있지만, 쌍방적/ 양방적[bilateral] 언약에서는 두 편 모두에게 있다 [36].)

위의 언약들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는 삼중 구조를 취하지 않는 언약들이 있다(무조건적 언약을 grant-Covenant, 조건적 언약을 treaty-Covenant 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37]). 그들 중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는 약속의 성취가 선포되지만, 아담 편에서 수행해야할 의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원수가 되게”하는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아담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없다. 아담이 아무런 조건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아담 에게 하신 하나님의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다. (두 번째 예는 노아와 맺은 언약이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 노아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다. 노아가 아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다.)

이 아담 언약과 그것의 최종적 성취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삼중 구조 언약들이다. 그 언약들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해 최종적으로 선언되고, 확정된 아담 언약의 성취라는 필연적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변화무쌍하고 모험적인 과정에 종속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항상 갱신이나 발전의 여지가 존재한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서는 인간 특유의 연약성으로 인해 언약을 반복해서 깨뜨리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갱신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이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계속해서 앞에 놓인 푯대, 즉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하신 무조건적, 일방적 언약의 필연적인 성취를 향해 전진하도록 보장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한 예는 출애굽기 33장에서 시내 언약을 즉각적으로 갱신하여 주는 장면이다.

3. 성서 언약의 두 가지 은혜

조건성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약속의 성취는 조건적인 반면 은혜는 조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언약이 조건적일지라도 그 속에는 은혜가 항상 무조건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상태와 무관하게 언약을 필연적으로 성취시키는 맹목적인 자비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악으로부터 돌아서고, 언약의 두 번째 부분인 요구 사항을 실행에 옮기도록 만드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은혜 이다.(애굽으로부터의 구출은 이후 열거되는 규정들을 순종하는 기초가 된다[38].) 이 은혜는 인간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된다(롬 2:4).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속성(출 34:6)은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공의(출 34:7) 및 능력(출 20:2)과 함께 통합 되어 은혜롭고 공의롭고 능하신 행적으로서 언약 체결식 언어에 나타난다(출 19:6).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그것에 대한 기술 (description)이 바로 언약의 세 부분 중 첫째 부분에서 제시되는데, 이는 둘째 부분인 인간의 의무 이행에 앞서서 나타나는 것이다. 언약에 항상 내재된 이 은혜를 기술적(descriptive) 은혜라 할 수 있다.(언약의 조건이 순종이며, “언약 순종에 의하여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책임으로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 칼빈은, “인간이 언약의 조건인 순종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으며, 곧 “믿는 자,” “성령의 축복 안에서” 있는 자에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함으로 그의 주께 맹세를 서약하는 믿는 자 안에서 볼 수 있다”는 의미다[34]).

추가로 이러한 언약 내재적 은혜 외에도 언약 외재적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적인 은혜가 아니라 기능적(functional) 은혜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잘못에 대한 용서를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능적 은혜는 조건적 언약이 깨어질 때마다 그것을 갱신하고 복구하는 데 필요하고 사용되는 은혜이다. 이 은혜는 내재적, 기술적 은혜와 달리 언약의 삼중 구조 내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언약이 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언약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 되는 시기, 즉 언약이 깨어져서 그것을 갱신하고 복구하기 위해 개입할 시기를 기다린 다. 물론 언약이 항상 깨어져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나, 성경에서 인간의 역사는 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은혜는 언약이 깨어지지 않는 한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이 은혜가 언약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른 연약성으로 현실에서 그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즉, 언약 외재적 은혜는 기능적인 것으로서 언약 내재적, 기술적 은혜와는 시간적으로도 구분된다. 후자는 언약 체결의 시점으로부터 필요성이 대두되지만, 전자는 언약 체결 이후 언약의 시행 과정 속에서 언약이 깨어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은혜는 크게 내재적, 기술적, 선재적(intrinsic, descriptive, prevenient) 은혜와 외재적, 기능적, 후속적(extrinsic, functional, subsequent) 은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4. 재고찰한 언약 신학과 기존 견해와의 차이

이 장에서 고찰한 시내 언약은 처음 세 견해보다는 네 번째 견해와 유사하다. 율법과 복음의 조화라는 입장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번째 견해와의 차이점은 시내 언약을 이중 구조가 아닌 삼중 구조로 이해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 구조적 차이의 귀결점은 언약의 조건성이다. 조건성은 처음 세 견해들이 율법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과 은혜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성의 여지도 이에 대한 침해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번째 견해는 율법과 은혜의 조화를 주장함으로써 이전 세 견해와 차이를 피력하면서도, 그 차이의 중심에 있는 조건성이라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 고찰에서는 조건성이 시내 언약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은혜 언약 속에도 내재되어 있음을 성경 본문의 구조적 특징을 들어 지적했다.

율법 및 조건성에 대한 고찰 외에도, 은혜의 특징에 대해 추가로 연구한 것이 네 번째 견해와의 차이이다. 비록 은혜 언약 속에 조건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조건성은 약속의 조건성이지 은혜의 조건성이 아님을 제시하여 조건성의 범주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러나 은혜의 무조건성이 은혜의 맹목적성은 아님을 지적했다. 은혜에는 두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첫째는 율법의 순종이고, 둘째는 깨어진 언약의 복구이다. 특별히 첫째 목적을 간과하여 은혜를 목적 없이 주어지는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향은 은혜와 율법 사이의 관련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그 조화 또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은혜의 특징인 목적성에 대한 고찰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조화를 옹호하는 네 번째 견해에 추가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IV.나가는 말

전통적으로 언약 신학은 성경의 언약들을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시내 언약은 두드러진 ‘율법적 특성’과 성경 내용의 전개 상 ‘은혜 언약’ 사이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두 종류의 언약 가운데 어느 편에 두어야 할지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언약 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시내 언약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네 가지의 견해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시내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고, 둘째는 행위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며, 셋째는 제3의 독자적인 언약으로 분류하는 견해이고, 넷째는 은혜 언약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분류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이 분류의 틀은 현대 신학자들의 율법 논의에서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견해에 나타난 모세 언약의 율법성에 대해 불편함 또는 미묘한 배척을 바르트의 율법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견해에 나타난 모세 언약의 율법성에 대한 부정적 의견 및 은혜 언약과의 분명한 대립을 불트만의 율법관에서 볼 수 있다. 셋째 견해에 나타난 모세 언약의 율법성으로 인한 열등성을 브루너의 율법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넷째 견해에 나타난 율법의 전적인 선함과 필수불가 결성은 머레이의 율법관에서 관찰된다.

이 가운데 네 번째 견해는 나머지 세 견해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것이 율법에 대해 전혀 다른 이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견해들이 율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온전하게 떨쳐내지 못하거나, 그것과 은혜 또는 복음과의 조화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혹은 심지어는 그것을 적대시 하는 반면, 네 번째 견해는 율법을 은혜 및 복음과 조화 시키고 통합시킨다.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조화시키는 이해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내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에 관련된 성경 본문들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관찰했고, 덕분에 율법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기존의 선입관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이 성경 본문에 대한 관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구조가 시내 언약 외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다른 언약들은 물론, 심지어는 신약의 언약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관찰한다. 이는 시내 언약과 신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다른 언약 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더 강하게 지지해준다. 본 연구에서 추론하기에 이 구조적 특징이 함축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은혜 언약 안에도 조건성과 상호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조건성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 편에서 볼 때의 조건성이라는 점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본 연구에서 언약의 은혜에 관해 추가적으로 강조하는 사실은 은혜가 무조건적인 것은 맞지만,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은혜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는데, 첫째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는 용서를 수여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 두 특징을 구분한다. 전자는 언약의 의무 수행에 앞서 능력을 제공하기 위해 언약의 첫 번째 부분에서 기술되므로 기술적 은혜라 할 수 있으며, 후자는 언약의 파기 시에 그것을 복구하고 용서를 제공하기 위해 기능하기 때문에 기능적 은혜라 할 수 있다. 물론 본 연구의 이러한 결론과 분류 역시 언약 신학 안에서 존재해왔던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구분과 정의에 불과하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인위적인 구분들은 언제나 성경 본문에 대한 보다 면밀한 관찰과 이해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고 개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언약 신학에서 사용하는 표현들, 예를 들면 시내 언약, 행위 언약, 은혜 언약과 같은 용어들은 성경 자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다른 신학적 용어들이 그렇듯이 이 표현들과 분류는 성경보다는 신학적 사고의 결과물로서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내 언약이 은혜 언약인지 행위 언약인지에 관한 논의가 오랜 세월 명확한 결론 없이 다양하게 난립해 온 모습은 인위적 분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원래 공존해야 할 율법과 복음, 은혜와 행위를 인위적으로 나눔으로써 혼란과 논쟁이 반복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네 번째 견해이자 머레이의 율법관이 말하는 시내 언약과 은혜 언약, 그리고 율법과 복음 사이에 조화의 가능성은 충분한 고려의 가치가 있다. 기존의 인위적 틀의 한계를 벗어날 때, 대립이 아닌 공존을, 모순이 아닌 조화를 발견하고, 구약과 신약의 언약들 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내 언약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의들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네 번째 견해의 경우처럼, 성경 본문에 대한 보다 면밀한 관찰에 의해 모순과 대립 대신 조화를 발견했더라면 필요 이상의 신학적 논쟁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행위 언약, 은혜 언약 등의 신학적 용어들은 성경의 방대한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단순화하여 성경적 사상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용어들이 신학적 설명이라는 본연의 의무를 넘어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받은 나머지 성경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가려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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