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s the influence and implications of the supervised process of production of flower vessels (花器) in 1411. The type, the production method, and the purpose of flower vessels (花器) were determined based on the workshops appearing in King Sejong-Sillok, Chiriji ("世宗實錄" "地理志") and Gyeongsang-do Chiriji ("慶尙道地理志"), considering articles excavated from Sangju kiln sites. In addition, the implications and the starting point of production of flower vessels (花器) in the Joseon Dynasty were identifi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n effort was made to reorganize the government offices, to align ritual systems in the early 15th century. Preparation for rituals, preparation of supplemental utensils used in ancestral rites (祭器), the construction of architecture related to the Royal Family, and the production of weaponry (武器) were supervised. In 1411, flower vessels (花器) had a preferred supervised process of production as well, which means being recognized as a subject of maintenance for the Joseon Dynasty's aims. Flower vessels (花器) had been produced using grayish-blue powdered celadon (粉靑沙器) as flower pots (花盆), and as celadon flower pot-support (花臺), at Sangju kiln sites in particular, since 1411. Interestingly, products had been manufactured in royal kilns as well as in a few other kilns similar to the supervised process of production of flower vessels (花器) in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It means that this effected the Gyeon-yang (見樣) supervised process of flower vessel (花器) production in 1411. At that time, the Joseon Dynasty used Gyeon-yang (見樣) for imperial gifts for the Ming Dynasty and on separate manufactured articles to ensure the standards of production. Gyeon-yang (見樣) affected the production of ceramic utensils used in ancestral rites (祭器), and government officials in Saongwon (司饔院) supervised the production of ceramics for the Royal Family year after year. In sum, it was flower vessels (花器) using Gyeon-yang (見樣) that provided precise production rules to supervise the process of production in 1411.
본 논문은 1411년 감조된 화기의 실체에 주목하여 화기가 감조된 배경과 견양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규명을 시도한 글이다. 이를 위해 상림원에 진공된 화기의 용도와 성격 규명을 필두로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 상주 일대 자기 가마터의 실물자료에 주목하여 화기의 종류와 제작 양상을 유추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화기의 제작 시점을 추정하고, 화기의 제작에 관여한 조선 왕실의 상황과 의중을 밝히며 이후 화기 제작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15세기 초반 조선 왕실은 관제를 개편하고 예제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과 관련한 건축물이나 구조물 축조, 의례 절차 및 준비에 별도 감독관을 두어 관여하였고, 제기와 무기 제작 시 별도의 감조를 명하였다. 1411년 화기가 감조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자, 왕조가 지향하는 이념에 적합한 대상으로 화기가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화기의 제작은 자기소가 군집하였던 상주목에서 1411년의 감조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어 상림원에 진공될 화기로 분청사기상감화분 및 청자화분받침이 제작되었다. 15세기 중반 가마를 비롯해 관요에서는 상주목 일대에서 제작된 화기와 매우 흡사한 예가 제작되었다. 즉 1411년 감조된 화기가 이후 견양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 왕실은 명 황실로부터 전해 받은 기물을 그대로 견양으로 삼거나, 별도 제작한 그림이나 실물을 검토하여 견양을 정하였고, 이를 전국 각지에 보내어 제작의 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일찍이 견양은 자기 제기 제작에 영향을 미쳤고, 매년 사옹원 관원이 어용 자기를 감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견양'이 자기의 명문으로 별도 표기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러한 여건 하에서 1411년 내수에 의해 감조된 화기 또한 정밀한 제작 규범을 제시한 화기의 견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