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칼럼 - 졸탁동시(啐啄同時)

  • 발행 : 2019.01.01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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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가 품에 안은 알 속에서 조금씩 자란 병아리가 있다.

이제 세상 구경을 해야 하는데 알은 단단하기만 하다. 병아리는 나름대로 공략 부위를 정해 쪼기 시작하나 힘이 부친다. 이때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기다려온 어미닭은그 부위를 밖에서 쪼아 준다. 답답한 알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병아리는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처럼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졸 」이라 하고, 밖에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화답하는 것을「탁 啄」이다. 그리고 이 일이 동시에 발생해야 어떤 일이 완성된다는 것이 「졸탁동시 啄同時」이다.

병아리와 어미닭이 동시에 알을 쪼지만, 그렇다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나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미닭은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데 작은 도움만 줄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자신이다. 만약 어미닭이 깨어주게 되면, 병아리는 건강을 잃고 얼마 후 죽게 된다.

이 말은 송(宋)나라 때《벽암록(碧巖錄)》에 공안(公案) 화두가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알려주는 스승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안과 밖에서 쪼는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깨우쳐 주는 것은 이와 같다. 제자는 수양을 통해 쪼아 나오고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피고 관찰하다가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우침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이 시점이 일치해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졸탁동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전혀 없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 내몰려 자신의 “졸”만 외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탁”이라는 사자성어가 정말 절실한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중순 AI 방역교육에서 도청 방역과장이 양계농가에 강조한 “졸탁동시”. 결국 방역의 주체는 가금농가들이고, 지자체에서는 도움만 줄 뿐이란다. 이 말은 양계농가에 겨울철 되면 찾아오는 AI를 막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고, 양계농가와 정부에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조화롭게 잘 이루어져야만 AI를 막아낼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잘된 법령과 매뉴얼(SOP(표준운영절차))을 정부가 만들어도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요, 소귀에 경 읽기다. 하루가 멀다 않게 야외 하천변에서 다양한 혈청형으로 검출되고 있어, 가금류 사육농가들은 이번 겨울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농장을 경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졸탁동시”의 사자성어는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가르침이자 매력적인 이치가 아닐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졸탁동시”할 때 이루어지고 훌륭한 인재는 선생님과 제자가 “졸탁동시”할 때 탄생하며, 세계적인 기업은 경영자와 노동자가 “졸탁동시”할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국가의 번영이나 남북관계 그리고 국제관계에도 “졸탁동시”의 이치를 공유하고 함께 노력할 때 성공과 발전이라는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지식경영센터 강신장 상무는 “졸탁동시”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는「내가 먼저 변화」하여야 한다. 어느 방송국의 로고송에 있듯이 세상의 이치는 “기쁨 주고 사랑 받는”순서이지 “사랑 받고 기쁨 주는”순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로부터 화답이라는 선물을 받으려면 고뇌와 헌신이 듬뿍 담긴 변화와 혁신을 통해 기뻐할 일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가정이라면 배우자가 기뻐할 일을 준비하여야하고 기업이라면 새로운 혁신 가치를 먼저 만들어 내야 시장의 열광이 따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의 말을 잘 듣는「경청」이다. 어미닭이 아기 병아리가 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또 어느 부위를 두드릴 것인지를 먼저 시그널(signal)을 잘 듣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병아리에게 필살의 도움을 줄 수가 있고 함께 기쁨을 만들 수 있다. 가족의 소리, 고객의 소리,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으면 위대함이란 없다. “남의 말에귀 기울이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과 같다.” 말이 있다. 경청하지 않는 것은 받은 선물을 아무렇게나 뜯어 던져두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에게 누가 다시 선물을 주겠는가?

세 번째는 적절한「타이밍」이다. 아무리 좋은 변화와 혁신이라도 상대방이 갈망하고 있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일은 낭패를 본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고객가치에 소비자들이 목말라할 때, 혁신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시장과 고객이 보내오는 열광과 감동의 화답을 받을 것이다. 위대한 조직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객과 함께 손을 맞춰 박수를 칠 수 있는 기업"일 것이다.

네 번째는「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이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의 노력이 항상 인정을 받아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의 안쪽을 쪼았다고 반드시 상대방이 바깥쪽을 쪼아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고 상대방의 묵묵부답으로 온갖 노력이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 기업의 경우, 필살의 노력으로 새로운 제품을 내었다 해도 늘 히트상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객과 함께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만들기 위해 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안과 밖, 명과 암, 나와 너…

이 두 가지가 만나 새로운 열정과 에너지를 창조하는 원리. “졸탁동시”로 세상사는 법을 더 생각해 봐야겠다.

위 네 가지 외에 나는 한 가지를 더 붙이고 싶다. 상호 간의「신뢰와 신용」이다. 신뢰와 신용이 없다면 “졸탁동시”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신뢰란 굳게 믿고 의지함이라면, 신용은 사람이나 사물이 틀림이 없다고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 신뢰는 어떤 대상을 감정적으로 믿는 것이라면, 신용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라 생각한다. 병아리가 안에서 “졸”할 때 밖에서 “탁”해줄거라는 신뢰보다는 신용을 가지고 “졸”할 때 확실한 “졸탁동시”가 이루어질 것이다.

정부도 가금농가들을 믿고, 가금농가들도 정부의 정책을 신뢰보다는 신용으로 믿고 따라 줄 때 그 정책은 제대로 작동될 것이다.

우리 가금 농가들도 이제는 변화되어야 한다. 내 농장은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을 갖고 차단 방역에 임하여야 하고, 그렇게 차단방역을 해야 한다고 중요성을 외치면 왜 하여야 하는지 잘 듣고 실천하며, AI가 오기 전에 철저히 방역하여야 한다. 일단 발병이 되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정부에서도 지금까지 여러 번 AI를 겪었으면 모든 책임을 농가에게만 돌리지 말고 백신 도입 여부, 살처분 방법과 적절성 등 다각도로 깊이 생각해볼 필요성 있다. 수시로 바뀌는 법령, SOP, 해마다 보강되는 정책에 가금농가들 생각은 큰 죄를 지은 죄인들을 더는 죄를 지지 못하도록 옭아맨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 모든 가금농가 들이 마치 큰 죄인인 것처럼.

가장 최근에 AI 관련 정책 중 AI 방역 실시요령을 보면 산란계 농장은 살처분 보상금 평가 증거라는 이유로 1주일간 평균대비 폐사율 2배 이상 늘거나, 산란율이 3% 이상 저하 시 지자체에 신고 의무화와 이를 위해서는 일지 작성을 하여야 하며, 2019년 7월부터는 가금농가 CCTV 설치도 의무화가 된다. 이렇게 해서라도 AI가 발생이 안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래도 AI가 발생이 된다면 또 무슨 정책으로 양계농가 들을 감시하고 강력한 정책으로 나올지 겁이 나는 것이 가금농가의 현실이다. 이는 모두가 정부와 가금농가 간의 신뢰와 신용이 상실됨에서 오는 결과이다. 결국 가금농가는 “졸탁동시”에서 말하는 “졸”이다. AI를 막아내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방역이고, 정부는 “탁”이므로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졸탁동시”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원리를 우리 가금농가들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이번 겨울 하루에도 몇 건씩 하천에서 검출되는 AI 항체에 불안하지만, “졸탁동시” 뜻과 같이 정부와 가금 농가들이 힘을 합쳐 철저한 차단방역으로 AI가 발생하지 않고, 겨울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2019년 황금돼지띠라고 하는 기해년(己亥年)이 시작된다. 올 한해도 양계농가가 걱정이 없고 번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