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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Mind of Joseon's Acupuncture and Moxibustion Technology

조선 침구(鍼灸)의 지향에 대한 소고(小考)

  • Jeon, Jongwook (The Korean Research Institute of Science, Technology and Civilization, Chonbuk National Univ.)
  • 전종욱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 Received : 2019.07.22
  • Accepted : 2019.08.05
  • Published : 2019.08.25

Abstract

Objectives : This paper looks at the history of East Asian acupuncture and moxibustion in the context of the general orientations of craft and art. It is understood that acupuncture and moxibustion was the ultimate integration of reason and craft in which text and experience mutually influenced each other throughout its development. In Joseon, the pursuit of integr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order of the Heaven and Earth was particularly prominent. Methods : As in the words of Zhunagzi(莊子), the state in which something that deeply touches the mind manifests in the hands has been understood as the ultimate state in modern and ancient art. Starting here, I examined the possibility that Korean acupuncture and art has evolved from such foundations step by step. Major acupuncture and moxibustion texts were examined historically, starting with "Shenyingjing(神應經)", leading to "Junggan-Shenyingjing (重刊神應經)", "Chimgu-Gyeongheombang(鍼灸經驗方)", "Chijongjinam(治腫指南)", "Chijongjinam-Joseonchambon治腫指南朝鮮?本", "Chimgutaegilpyeonjip(鍼灸擇日編集)", "Chimgu-Myeonggam(鍼灸明鑑)". Introductions and main contents of the texts were analyzed and presented appropriately. Results : East Asian acupuncture and moxibustion has developed based on the study of pathways that correspond to Shen, of the accordance and harmony between body and the order of Heaven and Earth together with theoretical refinement, technical development, and acceptance of new discoveries. In the perspective of craft, this was motivated by artistic passions such as '得於心 應於手' and '醫者意也'. In the case of refined acupuncture methods, due to their difficulty in education and transmission there has been some fluctuation. Conclusions : Korea, China, and Japan share a largely similar philosophical and cultural basis. Reason and craft, text and experience mutually influenced each other while the core of refined acupuncture was widely shared. However, a certain bifurcation point could be detected.

Keywords

1. 自然經을 그리며

“문헌이 먼저냐? 체험이 먼저냐?”

인간의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話頭일 것이다. 특히 침술과 같은 고도의 기예이자 의술과 같은 경우 정신적 신체적 역량의 궁극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졌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본고는 조선 침술의 지향과 특징을 기예와 예술의 추구라는 일반적 차원에서 이해해보고자 하였고, 한중일의 침술서의 흐름의 한 단면을 바라보면서 몇 가지 특징적 부분을 음미해보려 하였다.1) 먼저 우리 역사에서 독특한 개념을 형성한 自然經을 소개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다산 정약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로,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서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언술에서 이 같은 단초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이 처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문헌을 수집하고 인용하는 저술 작업 뿐만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農夫들과 匠人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중요한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특히 그는 만년에 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기술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당시의 노력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지식 습득 과정을 장편의 시로 묘사했다. 조금 길긴 하지만 본고의 성격을 분명히 알리는 의미에서 중요부분을 번역과 함께 옮긴다.2)

我時搘杖聽其語, 惆然太息復瞠然, 問君不曾讀古書, 焉從受來此眞詮

儂本生長郊野者, 耳聞目見于斯專, 用志不分凝於神, 何待一一古方傳

子欲學稼問老農, 子欲造車問長年, 手熟自然合規矩, 閉門造車出合轍

我聞斯言如夢覺, 一生悠悠誰巧拙, 從今以君爲石師, 束閣牀頭種藝訣

나는 지팡이 짚고 이야기 듣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대는 古書를 읽은 적도 없는데 어디서 그런 眞詮을 얻었는가?”

“나는 본시 시골에서 나고 자라, 견문이 온통 이런 것들이라. 한 곳에 뜻을 모아 정신을 집중한 결과일뿐, 일일이 古書를 찾을 일 있소? 농사를 배우려면 老農에게 묻고, 수레 제조법을 배우려면 匠人에게 가는 법. 손이 숙련되면 절로 規矩에 맞고, 실내에서 만든 수레 한길에서 규격이 맞네."

이 말 듣고 꿈에서 깨어난 듯, 사람 사는 넓은 세상 누가 더 낫다는 말인가?

이제부터 그대를 스승으로 삼아 東閣 평상에서 나무심기 배우고자.

앞뒤를 좀 더 설명하고 요약하자면, 그는 집주변의 언덕과 비탈에 한 해 3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기르기를 가족들과 함께 노력했으나 9할 이상이 모두 실패하고 말라 죽어버려 한탄했다. 그런데 남쪽 마을의 老農이 와서 보고 나무 심고 가꾸는 각종 방법을 자세하게 일러주자3), 매우 놀라면서 그에 대한 古書를 읽어 본 적이 없는 촌로가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알 수 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노인이 위와 같이 이야기를 해 주고, 풍석은 이 말을 듣고 꿈에서 깨어난 듯 큰 깨우침을 얻고 “내가 앞으로 스승삼아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쾌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풍석의 이야기에는 古書와 眞詮, 生長과 聞見, 用志와 凝神, 熟手와 規矩 등의 개념이 모두 적용되어 있어, 그가 일생을 통해 생각해온 문제의식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곧 傳來의 방법론과 나의 뜻, 손의 숙련도와 神氣의 집중력, 현장에서의 새로운 적용과 기준의 창출 등에 대한 과정이 녹아있는 것이다.

풍석 스스로 자신의 堂號를 ‘自然經室’로 정하여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4), 그는 성현들의 말씀을 수록한 경전, 곧 聖經 역시 천지의 원래 그대로의 모습인 自然을 언어의 형태로 가공한 것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학자들은 늘 왜곡되게 이해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때로는 聖經을 통한 배움보다 자연 그 자체에 밀접한 생활을 하는 농부와 장인들 곧 노동 계층이야말로 자연 자체를 經典으로 보고, 더욱 독실하고 진실한 ‘自然經’ 탐구와 배움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풍석의 생각은 영역을 확장해서 기존 지식과 기술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고 발전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원형의 메커니즘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으로 이해된다. 풍석의 말은 經書와 書藝書, 醫書, 農書에까지 모두 통용되는 담론이요, 위로는 孟子, 莊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 許任을 위시한 의가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2. 조선 침구서의 일본 전파와 평가

1807년 文化 4년에 일본에서는 大石良輔이 『鍼灸明鑑』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이 책 제목을 『鍼灸明鑑』이라 했지만(그림 1), 사실 許任의 『鍼灸經驗方』의 이름을 달리 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경험방이 명감으로 명칭이 바뀐 데에 주목하여, 大石良輔이 쓴 序文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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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침구명감』과 서문(1807)

鍼法을 쓰는 이들이 종주로 삼는 것은 九卷(곧 『 黃帝內經 靈樞』)일 뿐인데, 그 문장이 오랜 古文이고 말이 隱微하기 때문에 뛰어난 匠人이나 이름난 醫家들도 깨달아 알기가 힘 드는데 하물며 저자거리의 어리석은 이들이겠는가? 그 외의 여러 醫書들은 혹 너무 繁多하고 혹은 너무 簡略하여 말뜻이 맹랑하므로 근거할 만한 책이 거의 없다. 한국의 許君은 鍼術에 달통하여 그 묘처를 얻어 마침내 그 典範이 되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後略)5)

여기서 보듯 일본 사람 大石良輔은 『鍼灸經驗方』이라는 책을 침구에 관한 최고의 저술로 평했다. 단지 許任 개인의 의술을 기록한 경험의서를 넘어, 『黃帝內經』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醫學의 歷史에서 가장 우뚝한 공을 이루었고 千古에 길이 남을 ‘典範(規則)’이 되었다는 것이다.6)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책을 뛰어난 鍼醫 한 사람의 단순한 經驗方이 아니라 不朽의 古典, 곧 ‘明鑑’이라는 題를 붙여 칭하고 있다. 이는 『東醫寶鑑』이 許浚 개인의 저술을 넘어 동아시아 의학의 대표 반열에 올라 세계의학에서 당당히 자기 위치를 확보한 것과 나란히 놓고 볼 만하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725년에 『鍼灸經驗方』이 이미 일본에 소개가 되었다. 일본에서 朝鮮으로 온 유학생 山川淳菴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그 底本을 가져가 『鍼灸經驗方』 일본판본을 간행했던 것이다.7)

나는 젊은 시절에 朝鮮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었다. ...치료방법은 한결같이 모두 許氏의 經驗方을 배워서 하는 것이었다. 그 저술된 책을 보니 핵심적이면서도 번거롭지 아니하고 간단하면서도 누락되는 것이 없었으니 이른바 ‘百家의 要諦를 뽑아내고 千古의 秘法을 밝힌 것’이었다. 그것을 배우는 자는 누구나 각각 그 術에 통달하고 묘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유독 朝鮮을 鍼刺 분야의 최고라고 하며, 평소 中國에까지 그 名聲이 자자하다는 말이 실로 거짓이 아니었다. (後略) 享保 10년(1725년) 乙巳년 늦은 봄 3월 山川淳菴8)이 쓰다.

이 序文을 보면 許任의 『鍼灸經驗方』은 당시 朝鮮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고, 그것이 간단하면서 누락된 것이 없어 ‘百家의 要諦를 뽑아내고 千古의 秘法을 밝힌 것’으로 大石良輔이 『鍼灸明鑑』을 내놓기 이전에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조선이 침구로 유명한 것이 許任의 『鍼灸經驗方』에 힘입은 것이리라는 판단과 함께 당시 朝鮮과 中國에서 널리 학습, 응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외의 평가 이전에 『鍼灸經驗方』은 朝鮮에서 이미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당대의 文章으로 이름을 떨친 재상 李景奭도 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 증명한다.

이 『鍼灸經驗方』은 太醫 許任이 지은 것이다. 태의 許任은 평소에 神術로 일컬어졌고 평생 동안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鍼灸의 宗主로 추앙되었다(刺家之流 推以爲宗). 이 경험방의 글은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得乎耳存乎心 試諸手)이다. (中略) 이것은 마땅히 세상이 공유하여 널리 전하여야 할 것이며 때가 窮하다고 비용을 아낄 수 없다.9)

李景奭에 의하면 內醫院의 太醫로 재직하던 許任은 이미 당대에 그 神術로 일컬어지고, 죽어가는 사람을 수없이 살려냈다고 한다. 때문에 丙子胡亂 직후의 어려운 시기에도 귀한 책을 널리 반포하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許任의 침술은 귀[耳]와 심(心)과 손[手]에 이미 최고의 숙련이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다. 어떤 技藝의 정점에 오른 상황을 묘사하는 기술방식이 드러나 있다.

이제 2008년 그 실체가 확인된 또 하나의 일본판 조선 의서를 보자. 『治腫指南』의 朝鮮槧本(日本京都大 所藏)에 丹波元簡의 序文에 나온 말을 보자.

“이상 『治腫指南』 2권은 養安院 越公이 소장하고 있던 朝鮮참본이다. 이는 文錄 연간(1592~1595)에 가져온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독특한 책(最絶世之異編)’이다. 任彦國은 嘉靖 연간(1522~1566) 사람으로 老僧에게 침법을 전수받았는데 특히 腫氣 치료에 탁월하여 ‘보통의 침의와는 차원이 달랐다(與尋常鍼醫之術 大不同矣)’. 천명 을사년(1785) 여름에 회선각에서 이 책을 보고 필사해 집안에 보관해 두었다. 丹波元簡 識.”10)

許任 이전 세대인 任彦國(中宗~明宗 연간)11)의 『治腫指南』 역시 日人들에 의해 최고의 평을 받았다. 당대의 명의 丹波元簡은 『治腫指南』 서문에 그를 보통의사와는 차원이 다른 의사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일본이 『鍼灸經驗方』이나 『東醫寶鑑』 이전부터 朝鮮 의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배우기를 갈구하는 모습을 담고있다. 일본의 대표적 한국의사학자 三木榮도 任彦國의 『治腫指南』을 평하기를, “비슷한 시기 明나라 薛己의 『外科樞要』나 陳實功의 『外科正宗』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했다.12)

山川淳菴이 『鍼灸經驗方』을 ‘百家의 요체를 뽑고 千古의 비법을 연 것[撮百家之要, 闢千古之秘]’이라고 한 評은 앞서 任彦國의 『治腫指南』에 대한 丹波元簡의 평가와도 대동소이하다. 이 두 醫家들 사이에 활동한 허준의 『東醫寶鑑』에 대한 일본의 평가는 굳이 언급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고 보면 朝鮮 中期100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분들(任彦國-許浚-許任)이 쏟아져 나온 셈이다.

任彦國의 『治腫指南』은 풍부한 그림 자료를 28도나 활용하고 있다. 특히 치료 부위에서 칼로 절개할 부분과 침을 놓을 부분을 구분해서 표시해 주고, 침을 수직으로 찌를지 비스듬하게 찌를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찌르는지도 상세히 표시해 주고 있어 실제 임상에서 매우 요긴하다. 조선에서 의서 속에 그림이 그다지 활용되지 않은 점에서 보면 그의 저술은 매우 이채를 띠고 있으며, 이 점이 일본에서 특히 각광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라는 추정도 해 볼 수 있겠다. 아래에 『治腫指南』에 나온 그림을 보인다.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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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치종지남』의 침구 지시도

여기서 잠시 해부와 그림에 대한 전통시대의 한일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을 살펴본다. 朝鮮 후기 通信使 來往 과정에서 일본 의사가 해부에 관심을 보이며,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의 배치 등을 자세히 살피고 책도 지었다”고 했다. 그러자 조선의 의원 南斗旻은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聖人만이 할 수 있으니 迷惑되지 말라”며 상대를 타박했다.13)

전통적 書道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그림 또한 자연의 생기를 붓끝으로 옮겨 전하는 ‘전신(傳神)’의 경지를 최고로 평하던 문화권에 있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한 활활발발한 생명력 자체를 포착하고 끄집어내어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 화가의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죽은 사람의 뱃속에 담긴 장기를 그리는 것은 그런 목표에 매우 배치되는 행위임이 분명했다. 명료한 시각적 감각에 의존하여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기능적 도구로서의 그림보다는, 더 깊은 곳의 隱微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남두민이 성인은 배를 가르지 않고도 안다고 했으니, 그 성현의 가르침이 곧 古經에 나온 그대로였음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象]을 넘어선 곳에 참된 진리[意]가 있다는 古經의 전통[得意忘象]이 조선 의학의 主流에서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醫者意也의 전통 역시 같은 맥락에 있었을 것이다14).

3. 중국 침구서의 조선 전파와 평가

1711년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의사들과 日人들의 대화를 기록한 『兩東唱和後錄』에서, 조선의사 奇斗文은 침구술의 요체로서 『神應經』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 책의 내용대로 잘 익히면 만병을 치료하여 일본의 편작이 될 것이라고 했다.15) 일본에 큰 영향을 준 『治腫指南』과 『鍼灸經驗方』을 가진 나라에서 이처럼 중요하게 언급한 『神應經』은 과연 어떤 책이었나?

『神應經』은 중국 明대 陳會가 자신의 책인 『廣愛書』(失傳) 12권을 간추려서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책은 그 제자인 劉瑾이 교정 보충하여 1425년에 간행하였고, 朱權(1378~1448)이 서문을 썼다. 본디 진회는 재상군(梓桑君: 곧 席宏)의 쟁쟁한 名醫 집안에서 의술을 배웠는데, 이 명의 집안의 계보가 「梓桑君鍼道傳宗圖)」에 잘 정리되어 있다(그림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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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신응경』의 재상군침도전종도

『神應經』은 글자 그대로 神이 應하는 經이다. 이 말은 동양의 침구의 원리를 잘 표현하는 제목으로 보인다. 사람의 생명은 經絡이 쉼 없이 운행하면서 天地의 기운과 서로 感應하는 것이라 해 왔으니, 그 本旨를 잘 드러낸 이 命名은 과감하고 적실하다.17)​​​​​​​

이 책은 그림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의학적 정보와 기술을 전달하는 데에 제약이 없었다. 取穴에서 기존의 360穴 가운데 중요한 119穴을 골라 한 눈에 혈위를 알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 넣었다.18)​​​​​​​ 뿐만 아니라, 기존의 침구법의 오류와 문제점을 들어 비판하면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實例로서 ①折量法 중 背腧穴 취혈 시 척추 자체의 뼈 크기는 제외하고 거리 계산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 등은 이후 朝鮮과 日本에서도 취혈의 모범으로 지위를 유지하였다. ②手技法에서도 經의 本旨를 잘못 알거나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는 時俗을 비판하면서 ‘補法은 엄지를 밖으로, 瀉法은 엄지를 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좌우에 따른 기혈의 순행에 의하여 補瀉 방법이 결정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부분도 그 형식과 내용에서 『鍼灸經驗方』을 위시한 이후 침구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19)​​​​​​​

朝鮮은 『神應經』이 나온 지 50년 만인 1474년에 朝鮮版 『神應經』을 간행한다. 이른바 『重刊神應經』이다. 더구나 이 책의 서문에서 제3국인 일본의 승려 良心이 가져다 준 것으로 朝鮮 판본의 底本을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조선에서는 『神應經』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음을 가늠케 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 전말은 朝鮮版 『重刊神應經』의 韓繼禧(1423∼1482)의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成宗 임금께서는 즉위 6년에 醫員 교육 안에 鍼灸를 전문으로 하는 분야를 설치하여 장려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때 마침 일본 승려인 良心이 『神應經』을 가져와 바치면서 일본의 神醫인 和介氏와 丹波氏의 ‘治雝疽八穴法’을 함께 전하였다.20) 그 ‘八穴法’은 아직 써 보지 않았지만, 『神應經』은 유래가 오랜 책이고 折量法과 補瀉法은 모두 옛 사람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부분이다. 取穴法 또한 옛사람들이 쓰지 못한 자리들을 많이 밝혀내었으니, 내용은 간략하지만 쓰임새가 광범위하여 잠깐만 읽어보아도 증상과 치료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21)

위와 같이 한계희는 성종이 침구전문과와 전문의를 육성하고자 한 침구장려책을 언급하면서, 마침 일본에서 온 승려가 『神應經』을 가지고 와서 바친 사실을 전한다. 朝鮮에서는 『神應經』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데, 특히 기존의 침술서를 뛰어넘는 부분이 바로 折量法, 補瀉法이라고 摘示하고, 取穴法도 매우 정확하여 따를만하고 내용이 간결하게 잘 정리되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앞에서 일본 사람이 조선의 침구서에 대해 찬탄한 것과 유사한 평가를 조선 사람이 중국의 『神應經』에 대해서 내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重刊神應經』은 중국의 원본 『神應經』에 더하여 日本 名醫의 치료법인 「治雝疽八穴法」22)을 함께 수록했고, 또 여기에 朝鮮에서 만든 ‘擇日法’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추가 정리된 朝鮮의 『重刊神應經』은 朝鮮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재차 간행되었다.

조선에서 任彦國의 『治腫指南』은 앞서 말한 바대로 『神應經』의 풍부한 그림 자료 활용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으며, 특정 임상부분에서는 『神應經』의 그림 활용을 훨씬 뛰어 넘는 바가 있다. 許任은 『鍼灸經驗方』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와 편제에 대해 명료하고도 포괄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神應經』이 折量法(곧 取穴法), 補瀉法(곧 手技法)을 재정립한 것과 비견되는 企圖이다. 다시 말해 ①기존에 잘못 짚고 있는 혈자리를 바로 잡고[訛穴] ②內外, 腹背, 左右의 음양 분류 문제를 정리하고, ③여러 종류의 補瀉法을 명료하게 정립하였다. 許任은 『神應經』이 행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전까지 밝히지 못한 부분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23)​​​​​​​

구체적 질병 치료법에서도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들어가는 ‘怪疾’ 항목에서 급히 『神應經』의 ‘治鬼邪法’에 따라 반드시 순서에 맞게 施鍼하라고 했듯이 허임이 『神應經』을 매우 중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24)​​​​​​​

4. 보이는 糟粕, 보이지 않는 意

앞서 언급했듯이 『治腫指南』과 『鍼灸經驗方』이 나온 이후에도 『神應經』은 朝鮮에서 재차 간행되었다. 1643년에 간행된 癸未년 『重刊神應經』에는 재상 金堉(1580∼1658)이 그 동안 『神應經』이 유실되고 사라진 事情과 함께 다시 발간하게 된 연유를 그 跋文에 수록하고 있다.

“『神應經』은 침법의 妙旨를 가장 잘 정리한 책이지만 병란이 끝난 뒤 이 책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內局에는 반드시 이 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책임 관원에게 물었으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결국 후대로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이에 여러 제조들과 의논하여 활자를 모아 인쇄하고 책의 말미에는 택일법(擇日法)을 덧붙였다. 책 속의 지식은 기껏 껍데기뿐이지만, 그마저 없어진다면 梓桑君의 오묘한 뜻을 무슨 근거로 찾아볼 수 있겠는가?(求之於書者, 固其糟粕, 而並與其書而亡之, 則梓桑君之妙指, 何所據而尋之哉.)”

大同法의 실시로 이름이 높은 재상 김육은 『神應經』의 내력과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47권 30책 규모의 類書 『類苑叢寶』를 저술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유학자이기도 했다. 『神應經』을 재간하는 이유에 대해 그가 한 말은 언어로 된 책의 존재와 그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침술(곧 심득의 경지)’ 사이의 간극과 긴장감을 또 한 번 표출해 보이고 있다. 침술의 원조격인 재상군의 경지는 어차피 醫師의 心得으로 얻어야 할 바이지만, 그가 남긴 책[糟粕]마저도 남아있지 않으면 그 心得의 경지를 따라갈 최소한의 근거라도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를 염려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書는 곧 糟粕일 뿐이지만, 心得의 妙指를 얻는 든든한 근거로서 책과 문자의 가치를 다분히 인정한 것이다. 사실 김육의 이런 말이 있기 전에 『鍼灸經驗方』의 저자 허임 역시도 본인의 평생의 경험의 결과를 책으로 남기는 이유에 대해 “감히 옛사람의 著述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 苦心하여 얻은 것을 차마 그냥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을 著述하게 되었다”25)고 말했다. 아무리 조박이라 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조박을 조박이라 하면서도 그것을 心得 (또는 意)으로 나아가는 근거로, 또는 디딤돌로 받아들이는 적극적 태도는 조선 침술의 든든한 내면을 말해 주는 듯하다. 책 자체의 긍정은 그와 대립적으로 설정된 妙指(혹은 예술과 기예의 목표로서의 神氣, 生氣) 역시도 동반 성취가 가능한 무엇으로 다가온다. 풍석 서유구의 自然經 개념을 빌어 보자면, 성인의 조박이라고도 치부되는 聖經을 공부를 하면서도 스스로 몸이라는 감응 주체를 통해 自然을 탐구하고 해석한 결과가 自然經으로 통섭되는 모습과 유사성을 가진다.

1643년 간행된 김육의 『重刊神應經』은 앞서 조선판 『神應經』에서 택일법을 추가하였다고 명기했다.26) 조선의 택일법은 1447년에 나온 朝鮮의 『鍼灸擇日編輯』을 지칭하는데, 현재의 『神應經』과 『鍼灸經驗方』에는 모두 이 택일법이 도표의 형식으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수록되어 있다. 朝鮮의 『鍼灸擇日編輯』의 서문에 나온 다음의 기록으로 침구술에서 擇日의 중요성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살필 수 있다.

“사람의 몸은 天地간의 음양의 기운을 품부 받은 것으로, 甲膽, 乙肝처럼 사람의 장부는 天干에 배속되고, 春井, 夏滎처럼 사람의 경락은 四時에 통해 있습니다. 그러한 즉, 자연의 時日의 干支는 사람의 몸에서와 더불어 운행하고, 그 결과 吉凶悔吝 역시 사람이 행하는 바에 따라 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針經》에서도 말하기를, ‘때에 맞추어 [得時] 침을 놓으면 반드시 병이 없어지지만 때에 맞지 않게 놓으며 병이 낫기 어렵다.’고 하였은즉, 침구의 이치에서 ‘擇日’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막막하여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도 길흉을 가려내 주고, 어쩔 방도가 없어 손을 놓아버린 지경에서도 고질병을 치료해 냄으로써(辨吉凶於遏眼之頃, 療膏肓於投手之餘)...”27)

앞에서 『神應經』은 ‘신이 응하는 길’을 탐구하여 침술의 운용원리를 담은 책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鍼灸擇日編輯』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때에 맞추어 침을 놓으면 반드시 병이 없어지지만 때에 맞지 않게 찌르면 병이 낫기 어렵다”고 한 경전의 말을 들어, 침구에서 ‘擇日’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했다. 擇日은 天地의 기운이 때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추적하여 그에 질병의 치료를 합치시키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몸의 기운과 天地의 기운의 一致와 均衡에 관한 신묘한 길을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그때까지 침구 기술은 여러 곳에 나와 있었지만, 택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28)​​​​​​​

몸의 臟腑와 經絡이 天干과 地支를 통해 드디어 四時와 연계된 길을 만나게 되니, 그런 점에서 『침구택일편집』은 『神應經』의 지향을 공유한 위에, 내몸을 넘어 天地와 四時의 기운까지 연계시키는 일을 정밀하게 수행하면서 실제로 치료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노력이었다. 朝鮮版 『重刊神應經』과 『鍼灸經驗方』이 택일법을 편입시킨 이유가 이런 방식의 의의와 효과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침구명감』에는 이 택일법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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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침구명감』 마지막 면(1807)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몸 속의 해부학적 구조에 더 관심을 보였던 일본의사들 모습과 거기에 반대 의견을 내었던 조선통신사와의 대화를 상기해본다. 침술의 차원을 한 단계 더 높이려는 발전의 노력이, 조선에서는 몸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몸 밖으로, 天地와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규명하려는 방향에 더 무게를 실었던 것이 아닐까? 내 몸[小我]을 넘어 더 큰 몸[大我, 天地 自然]과의 연계를 탐구하는 쪽에 나이 神氣와, 意를 더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런 작은 분기에서 침구 발전의 방향이 갈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5. 창조의 순간, 心得의 주체로서의 ‘나’

허임은 『鍼灸經驗方』 序文에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목공과 수레바퀴장도 規矩를 줄 수는 있어도 技巧를 전해줄 수는 없다.” 29)​​​​​​​

같은 맥락으로 침술의 궁극을 『장자』를 인용하며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손에 그대로 반응해는(得之於心, 應之於手)’ 경지를 말하고 있다.30) 기예와 예술의 수준 높은 경지를 지칭하는 방식이 의술과 침술의 요체를 정리한 글에도 妙旨, 心得, 醫者意也 등과 같이 원용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허임은 침술이 가져야할 요건에 걸맞게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이론적이면서 느낌에 와 닿게 醫術과 藝術의 渾然一體의 모습을 그렸다31).

이러한 사유는 先秦 시대에서부터 예술 각 분야에 무수히 반복되어 나타난다. 당(唐)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32)는 서예의 훈련 과정을 표현한 구절도 음미할 만하다.

“생각은 정밀함을 싫어하지 않고, 손은 숙련됨을 싫어하지 않는다. 정밀함과 숙련됨의 궁극에 이르면 規矩는 마음 속에서 사라진다.”33)​​​​​​​

다시 말해 생각(思), 곧 머리의 사유(思惟)는 정밀함을 極할 때까지 그만두지 말고 정진하며, 손(手)의 기술은 숙련의 궁극에 神技를 드러낼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뜻이다.34) 書道에서 정밀함과 숙련됨의 궁극에는 規矩가 胸襟에서, 곧 마음속에서 사라진다고 했다. 앞서 서유구의 自然經에서 말한 規矩와 書道에서 말한 規矩가 이와 같이 내면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하나는 老農의 가슴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원래 가진 法式이 사라지는 방식으로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작동하고 기능하는 역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머리의 사유는 만물보편의 이치와 원리를 궁리하며, 손의 숙련은 의식이 간여하지 않는 경지를 지향한다는, 기예와 예술이 추구한 어떤 공통적 경지를 말하​​​​​​​고 있다. 침술이 추구한 최고의 경지는 心과 手가 합일되는 순간, 곧 中樞와 末端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酬應하는 경지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見地에서 볼 때 頭腦神經과 手指 感覺神經의 긴밀한 연계를 말하는 것으로 볼만하다.

이런 예술적 충일감이 의학에서 창의적 의론으로 뻗어가는 훌륭한 모멘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본고의 기본 착상이다. 여기에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우리 의학사의 중요한 장면으로서 그 의의를 부각하고자 한다. 먼저 의서에서 자기 의견의 분명한 開陳전통에 주목해 보았다. 필자는 이를 得之於手 應之 於心 단계에서 藝術的 合一로 자신감을 얻고, 그것이 醫者意也로 이어져 확신 있는 자기주장을 제출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앞의 문헌 중에서 특히 극적인 사례가 조선의 任彦國의 『治腫指南』 속에 보인다. 바로 縷疔이다. 여러 종기(瘡腫)를 분류한 곳에 본인이 직접 발견하여 이름까지 짓고 있다. 任彦國 스스로 ‘나’라는 표현을 써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높다. 이 의학적 발견은 이후 許任의 『鍼灸經驗方』에 전승된 사례이기도 하여 침술 발전의 한 계기를 살피는 좋은 착안점이다.

“옛날에는 누정에 대한 설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신묘한 모양을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余, 任彦國)는 신해년(1551) 이후 치료한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지만 ‘縷疔’ 환자는 1년에 한두 명만 볼 수 있었다. 이 종기를 살펴보면 실가닥이 사물을 뚫고 나온 것 같고 떨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치를 마음으로 얻어(心得其所以然) 이름을 짓기를 ‘縷疔(실같은 모양의 종기)’이라고 했다.”

任彦國은 스스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병명을 창안해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당당하게 ‘나’를 내세워 기록으로 남겼다. 기존의 질병에 대한 새로운 처방이나 치료법을 하나 추가하는 것을 넘어 병명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짓게 된 연유와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서 마음으로 얻고 손에 익은 것[得於心, 應於手]으로 표현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본인의 창작물에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을 넣고, 스스로 발견한 결과물에 ‘나’를 실어 표현하였으며 그 과정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바로 뒤 세대인 許任 역시 任彦國의 발견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鍼灸經驗方』에도 중요한 치료항목으로 넣어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증상의 표현 등에서는 또 자신의 방식대로 개정한 부분도 많다.

모양이 볏짚으로 싼 달걀 꾸러미 속의 계란처럼 낱낱이 틈새를 두고 묶어 둔 것 같은데 길고 붉은 색이다. 팔꿈치 안쪽에 생기고 몹시 아프다. 오래되면 고름이 생기는데 고름이 생긴 후에 침으로 찔러 터뜨려 고름을 뺀다. 곪기 전에는 騎竹馬穴35)에 각각 뜸을 7장 뜨면 곧 낫는다. 손과 발에 생긴 것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한다. (‘瘡腫’ 중 ‘縷疔’)36)​​​​​​​

任彦國이 ‘실이 뚫고 나온 모양’이라고 한 것을 ‘계란 꾸러미 모양’으로 달리 비유했다. 동시에 이 누정의 증상과 부위를 꼼꼼히 밝히고, 치료법 또한 任彦國과는 상당 부분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許任은 許任대로의 ‘나’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縷疔의 예는 朝鮮에서 처음 명명한 병증과 그 계승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후의 醫書에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朝鮮의 外科鍼灸學이 한 시기에서나마 세대를 걸쳐 전승되어 간 측면을 보인 實例이며, 任彦國과 許任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하는 대목이기도 하다.37)​​​​​​​

任彦國이 縷疔 항목에서 ‘나’를 드러낸 것처럼, 許任의 『鍼灸經驗方』에서도 ‘나’를 의미하는 ‘愚’라는 표현이 나온다. 序文에서 두 번, 本文 중에 ‘부종과 고창’ 항목에서 한 번 나온다. ‘浮腫과 鼓脹’을 치료하는 법에서 許任이 소리 높여 내고 있는 자기목소리를 살펴보자.

浮腫과 鼓脹은 脾胃 기능이 순조롭지 못해 음식

소화물이 피부 표면에 마구 돌아다니고 대소변이 시원치 않아 생긴다. 『方書』38)에 이르기를 “水分에 침을 놓아 물이 다 빠지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창이 심하면 먹고 마실 수가 없으니 배가 북을 안은 것 같고, 숨 쉬는 것은 곧 끊어질 듯 하고, 心身은 괴롭고 어지러워 죽음이 경각에 있다. 만약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내 생각(愚)에는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니,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치료를 하는 게 나을 것이다(愚自臆料以謂等死莫如救急). 『鍼灸經驗方』 ‘浮腫及皷脹’

浮腫이 심한 위급 환자의 경우 몸에 찬 물을 빼는 치료를 지체 없이 수행하고 있다. 부작용에 대한 경고는 또한 그에 따라 적당한 조치를 취하면 그만인 것이다. 기존에 전해지는 권위 있는 의서라 할지라도 본인의 ‘經驗’에 비추어 보아 실제적 가치와 효과가 있는 것만 뽑았음은 물론, 그를 뛰어넘어 치료법에 문제가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자기 의견을 수록하여 의술의 흐름을 새롭게 형성하려 했다. 許任이 구사한 鍼灸術이 어디에 기반해 있는지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許任은 “내 생각(愚)에는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니 구급 치료라도 하는 게 낫다.”고 했다.39)​​​​​​​

許任의 이 말은 침술의 발전이 어떻게 추동되고 있는지에 대해 실마리를 주고 있다. 새로운 醫論을 만들어가는 가는 힘은 살아있는 ‘나’의 통찰과 판단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任彦國의 나와 許任의 나는 전통의술의 흐름에서 새로운 발견과 치법의 전통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며, 그 주체에 대한 省察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는 醫者醫也의 구체적 적용 과정으로 이해하여도 大差가 없을 것이다.40) 任彦國과 許任의 저술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경험적 근거와 함께 분명한 자기 확신이 주는 공감과 잇닿아 있지 않을까?

이상의 논의를 아래 와 같이 도식으로 정리해 보았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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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조선 침구의 지향 모식도

6. 나오며

이상 풍석의 自然經과 規矩 개념에서 시작하여, 한중일의 『神應經』에서부터 『重刊神應經』, 「八穴灸法」, 『鍼灸經驗方』, 『治腫指南』, 『治腫指南朝鮮槧本』, 『鍼灸擇日編集』, 『鍼灸明鑑』, 『鍼灸集成』, 『重刻鍼灸擇日編集』 등의 내력을 일별해 보았다. 여기에 더해 朝鮮通信使를 수행한 醫官과 日人 醫師 간의 대화기록인 『桑韓醫問答』, 『雞壇嚶鳴』을 참고하였고, 조선의 類書 『星湖僿說』에 나타난 의학적 기록, 조선의 醫案 『歷試漫筆』에서 보이는 진료 상황 등도 직간접적으로 참고하여 침술 發展의 動因과 함께 退潮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다. 한중일의 침술이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서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의가로 또는 의서로 평가하고 인정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서문을 중심으로 그 대강을 살펴보았다. 특히 침술에서 동아시아 삼국이 어떤 중핵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 공통점으로 여길만한 기예의 특징에 主眼을 두고 서술해 보았다.

莊子를 인용한 허임의 말처럼 기술 자체의 傳受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불가능한 것으로, 오로지 사물의 본성과 자신의 마음 사이의 회로를 형성하면서 스스로 攄得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는 “감히 옛사람의 著述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 苦心하여 얻은 것을 차마 그냥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을 著述하게 되었다”고 했다.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성취는 언어로 책에 담아 전달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재상 김육이 『神應經』을 재간행한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헌을 통해 전달하는 것과 그 妙指를 깨치는 것이 상호변증법적으로 함께 발전해 가야만 한다는 언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서유구의 自然經과 老農의 이야기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손에 익숙해지고 마음에서 얻는’ 각 개인의 內面의 完成은 또한 바깥 세상에 그 效用을 드러내고자하는 自體 動力을 구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그 中核은 몸의 질서와 天地의 질서의 상호 照應과 調和를 추구한 것이며, 그 과정은 思惟와 技藝의 窮極的 合一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전통의학에서 언급되는 醫者意也와 같은 명구로도 표현되던 것이었다. 앞에서 본 한· 중·일 침술의 상호 전승과 영향에서 본 이런 특질은 우리 침술의 역사를 동아시아로 확대하여 전반적으로 이해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되며, 침술의 바탕이 되는 技藝나 藝術의 철학적 共通分母를 음미하는 특별한 계기도 될 수 있다. 예술의 본질에서 보는 것처럼, 통합된 전체의 核心을 파악한 다음 매우 간결한 처치로 신속히 몸의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침술의 本質은 여전히 魅力的이고 未來指向的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하여 전체를 단번에 장악하는 예술적 영감과 같이 우리 역사의 여정과 함께하고 있다.

감사의 말씀

이 논문은 2018년도 전북대학교 신임교수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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