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Woodam Jeong Si-Han(愚潭 丁時翰)'s "Siqibianzheng (「四七辨證」)"

우담 정시한의 「사칠변증(四七辨證)」에 관한 연구

  • 서근식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 Received : 2018.09.28
  • Accepted : 2018.11.08
  • Published : 2018.11.15

Abstract

Jeong Si-Han(丁時翰) completed "Siqibianzheng"("四七辨證") at the age of 72, and later had the argument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with his disciple, Lee Sik(李?). Jeong Si-Han(丁時翰) had the position of Runwuxingyilun(人物性異論) and Lee Sik(李?) Runwuxingtonglun(人物性同論). Yet, the argument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had been forgotten and "Siqibianzheng"("四七辨證") could be acknowledged because Toegye school(退溪學派) and Yulgok school(栗谷學派) were conflicting and criticizing each other's stance at that time. It seems like Lee Hyeon-Il(李玄逸)'s "Liqulishilunsiduanqiqingshubian"("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ompletion of "Siqibianzheng" ("四七辨證"). Lee Yi(李珥)'s thought of Siduan(四端) and Qiqing(七情) was 'the position of Hunlun(渾淪)' that 'Qiqing(七情) includes Siduan(四端)', and Lee Hwang(李滉) had the 'position of Fenkai(分開)' that Siduan(四端) and Qiqing(七情) should be interpreted differently. Jeong Si-Han(丁時翰) criticized the stance of Hunlun(渾淪) from the position of Fenkai(分開). What did Jeong Si-Han(丁時翰) try to pursue through "Siqibianzheng"("四七辨證")? This fact tends to make us forget the controversy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between Jeong Si-Han(丁時翰) and disciple Lee Sik(李?). Now we know the fact that Jeong Si-Han(丁時翰) criticized Lee Yi(李珥) in "Siqibianzheng"("四七辨證"), but don't care much about the fact that Jeong Si-Han(丁時翰) caused the controversy over Runwuxingtongyilun(人物性同異論). Why "Siqibianzheng"("四七辨證") has remained in our memory even though it was an important one? It might be because "Siqibianzheng"("四七辨證") had an impact on Lee Sik(李?), Shin Hu-Dam(愼後聃), and even Jeong Yak-Yong(丁若鏞) in the process of summarizing the arguments over Siduanqiqinglunzheng(四端七情論爭) since Jeong Si-Han(丁時翰) regardless of whether Jeong Si-Han(丁時翰) had hoped it or not.

정시한은 72세에 "사칠변증"을 완성하고 이후에 제자 이식과 인물성동 이논변을 벌인다. 정시한의 입장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었고 이식은 인물 성동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인물성동이논변은 잊혀지고 "사칠변증"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대립점에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칠변증"을 완성하게 되는 데에는 이현일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이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생각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라는 '혼륜(渾淪)의 입장'이었고, 이황은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분개(分開)의 입장'이었다. 정시한은 분개의 입장에서 혼륜의 입장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사칠변증"을 통해 정시한은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였는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정시한이 제자 이식과 벌였던 인물성동이논변을 잊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재 정시한의 "사칠변증"에서 이이를 비판한 사실은 알지만 정시한이 인물성동이논변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논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칠변증"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시한이 희망했던 희망하지 않았던 것과 상관없이 정시한 이후에 사단칠정논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익과 신후담, 정약용에게까지 "사칠변증"이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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