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홍광표 사장(전 천호부화장 & 영육농산 상무)

  • Published : 2017.07.01

Abstract

이 코너는 그 동안 양계산업을 위해 헌신해 온 양계인(관련인)들을 만나 최근의 근황을 들어보고 과거의 추억(업적)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하였다. 이번 호는 40여년간 양계관련업에 종사해온 전 천호부화장과 영육농산에서 상무를 지낸 홍광표 사장(73세)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Keywords

줄탁동시 ( 啄同時)의 의미를 되새기자

40년 양계업을 뒤로하고

1970년 국내 양계산업이 터를 닦기 시작할 무렵 양계산업에 발을 들여 약 40여년간 양계분야의 모든 일들을 섭력하면서 양계산업과 동고동락해 온 인물이 있다. 만년 상무라는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홍 상무라고 하면 바로 이분을 떠올리게 된다. 요 몇 년까지 영육영농조합(주)에서 고문으로 일해 왔던 홍광표 사장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갈미동에서 도시계획으로 인해 기존에 살던 지역에 오피스텔을 지어 부인 김복희 여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주중에는 주변분들 만나느라 분주하고 토요일은 산악회, 일요일은 테니스를 하면서 레저활동을 즐기고 있다. 그 중 테니스는 고려대학교에서 대학교 체육시설을 동문들에게 개방하기 때문에 일요일은 반드시 테니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 홍광표 사장

홍 사장은 직접 양계업에 뛰어들어 실무를 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역사속에서 사라진 천호부화장과 영육농산에서 종계·부화 생산은 물론 축사 설계, 건축, 닭고기 생산·가공, 인력관리 등 다방면에 능력자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양계 역사를 써내려 왔다.

홍 사장은 상업고등학교(선린상고)를 나왔으나 축산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고 고려대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이재근 박사로부터 학업을 배우고 추천을 받아 들어간 곳이 천호부화장이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은 갈 곳이 많았다. 주로 선호한 곳이 사료회사였으며, 홍 사장은 개인적으로 동신부화장(현 한협축산)에 가길 원했었다. 집안 여건만 좋았으면 대학원에 들어가 교수의 길로 갔을 지도 모르지만 형제들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취업이 급선무였다.

양계산업 과도기를 경험하다

20여년간 천호부화장에 근무하면서 부화장관리와 종계장 관리 등 일반 양계관리에 대해 상당부분의 실무를 경험했다.

천호부화장은 당시 국내 최대규모의 종계장과 부화장을 운영하면서 전국의 40% 병아리 시장을 점유하였으며, 1984년 천호인티그레이션이라는 닭계열화사업을 처음 도입한 양계업의 선두주자였다. 경기도 포천, 양주 등 종계장 10여개소에서 100여개 동 계사에서 70만수가 사육 되었으며, 주간 170만개를 생산할 수 있는 4개의 부화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재직 당시 홍 상무는 경영진과 의견충돌이 많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만큼 사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고 일선에서 책임자로 일했기 때문이다. 생산부장 시절 월급이 너무 적어 직원들을 대표해 월급인상을 요구했다가 회사와 갈등을 빚어 업을 그만 두었을 정도였다. 천호부화장에 근무하면서 초창기에 개인농장을 하느라 잠시 외도(?)를 했었고, 월급인상에 항의하다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는 친척이 운영하는 면류생산업체에 이사로 근무하였으나 그 곳도 12.6사태 이후 부도를 맞으면서 다시 양계업계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실력 만큼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시 천호부화장에 임원으로 재 복귀해 회사에 도움을 주었으나 1993년 천호인티그레이션의 경영이 원만치 못하여 부득이 (주)미원 회사로 귀속되어 사직을 하게 되었고, 다음해인 1994년 영육농산(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홍 사장은 축산사업본부장(상무이사)를 맡아 신규사업으로 종계 7만수(12개동)를 경기도 양평에 신축하였고, 경기도 양주군에 3만5천수 종계, 주간 2만5천개의 부화장을 인수하여 경영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였다. 당시 20개 계열농가를 60개 농가로 확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마저도 1998년 신동방에 합병되면서 일을 접어야 했고, 2004년 AI발생으로 친구인 풍전부화장 사장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7년간 CEO로 들어가 일을 봐주고 그의 아들에게 업을 넘기고 나오게 되었다. 영육농산에 근무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상주도계장(현 올품)을 만들어 계열화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한다. 이 도계장은 나중에 하림에 흡수되면서 한 업체의 몸집만 키워주는 꼴이 되었다. 이후에도 영육영농조합(주)에서 고문으로 있으면서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농장을 시설(16만수 사육농장)을 하는 등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계분야에 헌신해 왔다.

서로 도와야 살 수 있다

홍 사장은 기회가 된다면 부화발전사를 정리하여 기록으 로남겨두고 싶다는 바램을 얘기했다. 국내 처음 선을 보인 큐크릭 부화기부터 마스터피스, 마스터 혼, 칙마스터 등 과거의 부화기부터 현대의 우수한 국내외 부화기까지 모든 부화 역사를 알기에 역사를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홍 사장은 평소에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사자성어를 양계인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설명한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의미로 서로 합심해야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현재의 계열사와 계열농가들을 비유하면서 들려준 말이다. 홍 사장은 처음 계열화가 이루어질 때 수평적인 계열화를 원했다. 전문분야의 일을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기 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생산원가를 줄이는데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홍 사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양계협회가 세력을 잃고 약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과거 협회, 정부와 같이 국가경쟁력 제고사업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3년간 전국을 다닌게 협회와 인연이 되어 더욱 협회에 정이 간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무조건 적인 힘(무력시위 등)보다 실력으로 일을 풀어가는 지혜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닭경쟁력제고사업 심사위원 위촉장

▲ 1990년 미국 아틀란타 폴추리쇼 참관시 봉명부화장 故 이건일 사장, 천호부화장 김호섭 씨, 퓨리나사료 이흥기 씨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