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is study intends to captu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tudents and farmers who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by focusing on their statements in the interrogatories retrieved from the Source Book on the History of the Korean Liberation Movements, publish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First, this study examines the interrogatories in order to identify the people subject to the investigation. Through this research, this study confirms that the majority of those who were investigated were students in Seoul and farmers in Gyeonggi-do. Then, this study traces why they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This study compiles their complaints and checked how their "discontent" could be connected to "liberation." While students were mostly interested in "education," and clearly expressed their discontent, the farmers were discontent with their livelihoods and tax under the rule of the Governor-general of Joseon and were not as clear at expressing their discontent. The interrogatories also confirms that some Koreans had no complaints but thought that liberation was needed. It is difficult to classify such people, but some people cried out for liberation without knowing the meaning of the term, only to understand its meaning later in prison. The significance of the March $1^{st}$ movement was at times imparted after the movement ex post facto.
본 논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3.1운동편을 통해, 신문조서에 드러난 학생과 농민들의 진술에 드러나는 특징을 포착하려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에 어떤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는지를 우선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주로 경성의 학생, 경기도의 농민들이 조사받은 기록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들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추적하였다. 신문조서에서 말한 불만사항들을 정리하고, 그러한 불만이 '독립'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주로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불만을 명확하게 표현하였던 데 비하여, 농민들은 총독정치 하에서의 생활 및 세금 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스스로의 불만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중에서도 처벌을 경감받고자 하는 태도를 뛰어 넘어, 불만은 없지만 독립은 필요하다는 방식의 사고를 하는 조선인들이 확인된다. 이들은 우선 독립 만세를 외친 이후에 감옥에서 독립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였다. 3.1운동의 의미는 행위 이후에 사후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