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재식 전 계유농원 대표(전 본회 부회장)

  • Published : 2016.11.01

Abstract

이 코너는 그 동안 양계산업을 위해 허신해 온 양계인들을 만나 최근의 근황을 들어보고 과거의 추억(업적)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하였다. 이번호는 계유농원을 운영해 왔고 전 본회 부회장을 지낸 이재식(74세) 사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Keywords

생산성은 양계장 주인의 발자국 수에 비례한다

▲ 이재식 전 계유농원 대표(전 본회 부회장)

벌써 월간양계 창간 47주년이라니~~

“오랫동안 양계업계를 떠나 다른길을 열심히 달려오다보니 양계업은 물론 선후배들을 챙길 겨를이 없었네요. 이렇게 찾아와주니 과거의 양계산업에 몸담아 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인천시 서구 당하동... 옛 종계장을 운영하던 자리에 골프연습장을 건설하고 연습장 주변에 파 3~9홀로 구성된 미니골프장을 만들어 검단지역 주민들에게 건전한 문화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10년이 넘은 골프연습장이지만 인테리어가 최신식이고 커피숍에서부터 다양한 휴식공간과 함께 300야드까지 길게 펼쳐져 있는 골프연습장이 골퍼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날려 버릴 듯하다.

“벌써 월간양계가 창간 47주년이 되었나요? 한국가금협회(대한양계협회 전신)에 입사하여 월간양계 원고 받으러 다니고, 광고료 수금하고, 책 배본하던 시절이 언제였나 기억이 아득하네요.”1968년 입사당시 한국가금협회 직원은 겨우 두명이었다. 오봉국 박사가 월간양계 창간을 기획하고 군대를 마치고 갓 졸업한 김영옥 초대 편집장(전 하림 부회장)을 영입하면서 직원이 늘어났고 매일 함께 야간작업을 하면서 동거동락했던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렸다.

협회 재직 당시 잊지못할 추억

당시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한참 하계강습회를 준비하던 1969년 6월 여름... 마포 종점 달동네에 신접살림을 하고 있던 부인(홍옥)이 짐을 싸들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산달이 좀 남았는줄 알았는데 부산 친정엘 급히 가야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사무실이 서울역 근처라 늦은 밤 열차표를 겨우 구해 함께 내려가는 중 산통이 온 것이다. 열차내 여객전무는 다급한 산모를 위해 방송을 하여 해산에 경험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의사와 할머니 두분이 옷을 이용해 산모주변을 가리고 아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열차내에는 환호성이 울렸고 여객전무는 모자를 벗어 승객들로부터 축하금을 받아주기까지 하였다. 20대 청년 이재식 씨는 “감사합니다. 잘키우겠습니다.”라고 답을 주고 부인을 처가에 데려다준 후 곧바로 올라와 하계강습회 준비와 행사진행에 여념이 없었던 그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게 성장한 딸은 의사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외할아버지가 다녔던 건국대 축산대학에 재학중에 있다.

양계에 발을 들이다

이재식 사장은 고향 김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보성고)를 다니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대학진학을 고민하던중 마침 건국대학교에서 학비전액지원제도가 운영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축산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대학졸업후 다행히 일본 축산연수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대학 초청으로 1년간 일본의 선진종계장에 근무하게 되면서 양계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귀국후 은사인 故 오세정 교수의 추천으로 당시 양계업계 원로분들과 학자들중심의 기술교류를 위한 친목모임 형태인 한국가금협회에 취직하게 되었다. 협회에 근무하며 양계강습회를 개최하고, 월간양계 창간에 참여하여 9호까지 발행하며 월간양계와 뗄수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협회를 떠나 현장경험을 쌓기위해 잠시 인산농원(대표 김재춘)에서 근무하다 1972년초 드디어 꿈을 펼치기 위해 인천 만수동에 450평의 땅을 확보하여 부화장을 짓고 부화기 3대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다행히도 부화장 인근에 육계사육단지가 많아 병아리 수요가 많았으며 병아리 품질이 양호하고 일본에서 배운 신기술로 육추 초기에 철저한 AS로 주변 양계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타 부화장보다 비싸게 병아리를 팔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시련기와 새로운 인생설계

양계업 중에서도 부침이 특히 심했던 육계부화업계에서 흔들림 없이 승승장구하던 중 농장이 인천시 도시계획 구획정리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부득이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깨끗한 병아리 생산을 위해 청정지역을 찾아 현재의 검단골프장 자리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 당시엔 땅을 매입하여 땅값보다 비싼 돈을 주고 길을 낼 정도로 산골이었다.

그 곳에서 종계장을 운영하며 일본에서 최신식 자동부하기를 도입·설치했고, 1984년에는 대한양계협회 검정소를 인수하여 종계장으로 활용하는 등 한때는 직원이 40여명까지 둘 정도로 사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로 인한 인력난으로 농장 종업원을 구하는 것이 주 업무가 될 정도로 인력난이 심했다. 자연히 양계업 종사자들의 자질저하로 생산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적은 규모 일때는 새벽에 농장에 들러 닭의 숨소리를 20~30분씩 듣고 다녔다. 즉 “생산성은 양계장 주인의 발자국 수에 비례한다”는 신념을 갖고 업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인력의 확대로 육계종계 한 마리에서 120수 정도 병아리를 생산하던 것이 90수, 80수까지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업영위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양계 선진국의 채란계 완전 자동화 시설을 보게되어, 채란업으로 사업을 변화시키게 된다. 4~5명의 인력으로 6만수의 산란계를 사육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양계업의 선구자란 자부심을 갖고 김포 불로동에 6만수 규모의 최신식 완전자동화시설을 독일로부터 도입하게 된다. 계사 1동에 한꺼번에 3만수를 입식하기 위해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K산란계 종계장 육성농장에서 80일령의 중추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입식 20여일만에 가금티푸스가 발병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중추에서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중추 구입비의 일부를 보상받긴 했으나 그 당시엔 치료약이 없고 백신도 없을때라 피해가 막심했고 소독을 하고 다시 입식한 것도 재발하는 등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농장주변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이 되어 더 이상 양계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고 자의반 타의반 농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가금티푸스 감염으로 인해 정신적 재정적 피해가 컸으나 양계업을 천직으로 여겨 다시 옮겨 농장을 하려고 이천에 땅을 마련해 놓고 사업계획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종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 지금은 골프연습장으로 적지라며 권유하는 이가 있어 검토해 보니 인기있는 유망 업종이고 외상이 없는 사업이라, 양계하기보다 수월하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제2의 인생길로 접어들게 되고 양계업과는 멀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후 골프연습장 운영에 전력을 쏟고, 연습장 협회에도 관여하여 이사, 부회장직을 맡은 바 있다.

▲ 양계장 자리를 골프연습장으로 바꾸어 제2의 사업을 꾸려가고 있는 이재식 사장은 스포츠 문화를 통해 국민들의 건강에 일조하고 있다.

▲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에 위치한 검단골프랜드

성당에 봉사하는 기쁨

이재식 사장은 부인 홍옥 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으며 현재는 큰 아들에게 골프연습장을 맡기고 가끔 골프연습장에 들러 운영상황을 점검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성당에서 나눔,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재식 사장은 일본연수를 시작으로 양계업에 인연을 맺어 한국가금협회 일을 보고 부화장, 종계장, 채란계업을 운영하면서 양계산업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대한양계협회 이사, 감사, 부회장직을 보면서 협회의 위상 및 회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양계를 통해 알게 되었던 많은 분들에게 내 일(골프장)에만 전념하면서 연락을 못했던 것을 가장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이재식 사장은 아직도 마음속에는 영원히 양계인으로 남고 싶다는 입장을 내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