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함경섭 대산농장 사장(전 본회 이사)

  • Published : 2016.10.01

Abstract

Keywords

이 코너는 그 동안 양계산업을 위해 허신해 온 양계인들을 만나 최근의 근황을 들어보고 과거의 추억(업적)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하였다. 이번호는 대산농장 사장이며 전 본회 이사를 지낸 함경섭(72세) 사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 함경섭 대산농장 사장

이 코너는 그 동안 양계산업을 위해 허신해 온 양계인들을 만나 최근의 근황을 들어보고 과거의 추억(업적)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하였다. 이번호는 대산농장 사장이며 전 본회 이사를 지낸 함경섭(72세) 사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43년 양계업 발자취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양계장들이 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에서 유일하게 부화장을 하고 있는 뚝심의 양계인이 있다. 현재 6만수 규모의 대산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함경섭 사장이 바로 주인공이다. 강화와 김포지역에서는 이미 가장 오래된 양계인으로 강화지부를 설립하고 현재는 고문을 맡아 양계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함경섭 사장은 우리나라 종계·부화산업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함경섭 사장은 강화도에서 부유한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덕분에 1960년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으며 건국대학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였다. 이 학문이 기초가 되어 씨앗을 만들어 농가에 공급하는 종계업에 입문하는데 큰 원동력이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1965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부친이 운영하던 사업(어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되면서 맨손으로 시작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졸업하고 첫 직장은 당시 서울 뚝섬에 위치했던 삼일부화장이었다. 당시 한일농원, 천호부화장과 백중지세를 이루던 삼일부화장에서 영업실적이 뛰어나 책임자에게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임금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1976년 남광풍 사장과 함께 경기도 광주(쌍령리)에 풍전부화장을 설립하여 대표를 맡아 4년간 부화장을 이끌어 왔다. 당시 천호부화장에서 PS를 분양받았는데 마렉이 발생하면서 40%의 종계가 폐사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그 책임을 지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인천으로 내려와 육계사육을 하고 있을 무렵 한일농원에서 사업확장을 위해 고급인력을 모집하였고, 그중에 경력이 뛰어난 함경섭 사장을 영입하면서 한일농원이 새로운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일농원(회장 차두흥)은 국내 산란계 35%를 점유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회사이다.

당시 1980년도에 ㈜한일농원 상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정직과 신뢰’로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계자 인계과정에서 7년간 헌신해온 직장을 뒤로하고 1987년 현재 강화에 나무로 7개동(6M*50M) 1만수 규모를 짓고 본격적인 종계업을 경영했다. 이것이 현재 6만수 규모의 종계장으로 성장하였으며, 대산부화장까지 인수하면서 부화와 종계를 함께 경영하는 책임자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대산부화장 전경

신뢰와 믿음이 최우선

한일농원에서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함 사장의 고집, 거짓없는 마음과 신념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업계에는 영업직원들의 비리가 만연했고 원칙이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한일농원에 근무할 당시 병아리가 부족해 예약된 농가에게도 주기 힘들 때 회장님이 부탁하는 것도 사표를 낼 각오를 하면서 과감히 거절할 정도였다. 원칙없이는 일을 추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용납하질 않았다. 이것이 고객과의 신뢰였다. 또 직원들과의 신의도 두터웠다. 한번은 종계장에 방화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직원이 술에 취해 밤에 저지른 사건이었는데 당시 함경섭 상무이사는 급하게 일을 수습하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아 나중에 추궁을 받게 된 적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한번의 실수로 파면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책임을 지기로 하고 없던 일로 한 것이다. 재산상 큰 피해는 없었지만 이러한 신의를 인정받아 사장으로부터 더 큰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 2억이 넘는 숙소를 무상으로 지원 받을 정도였으니 그 능력과 신뢰는 더할 나위 없었다.

삼일부화장에서 있던 일이다. 이때도 병아리가 모자라 너도나도 병아리를 찾을 때였는데 폐결핵을 앓는 농가(O씨)가 있어 이곳에 우선적으로 분양해 줬다. 동정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추후 병아리가 남아 가격이 낮게 형성될 때 폐결핵을 앓고 있던 O씨가 여기저기 영업을 자처해 팔아주면서 결초보은을 실천해 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욕심없이 이익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면 복은 자연히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백세미 인정하려면 제대로된 관리 필수

함경섭 사장은 현재 국내에 보급되고 있는 ‘백세미’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중국, 미국 등에 삼계탕이 수출되고 있는 시점에서 대부분 백세미가 수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제대로된 방역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되고 있는 현실을 이들이 알 경우 나라망신은 물론 어렵게 개척해 놓은 수출길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애초에 축산법에서 종란을 씨알로 바꾼 것은 계열업체들의 이익을 챙겨주기 위한 정부의 가장 큰 실수이며, 이제라도 산업화로 접어든 백세미를 보호하려면 PS를 종계와 같이 등록을 해서 정상적인 환경에서 관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경섭 사장은 현재 종계장은 동생에게 책임을 맡겨 운영하고 있으며, 김포에 있는 부화장은 정부로부터 시설자금을 지원받아 최신기기로 바꾸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경영학을 공부하고 K그룹에 근무하고 있는 아들에게 차후 업을 물려줄 계획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푼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40년 넘게 오직 양계업에 종사해 오면서 잃었던 선산을 다시 찾고 양계장과 부화장을 경영하고 있으니 더 바랄게 없다고 설명하는 함경섭 사장은 시대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양계업계에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고 밝혔다.